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30화 (130/168)

130. 묻어 두면 되는 일 @AW

크림색 실을 손가락에 감고 코바늘을 돌린다.

한 코를 뜨고, 다시 거기에 한 코를 연결해서 이어 가다 보면 한 줄이 생기고, 그 위로 다시 한 줄이 생겼다. 그렇게 몇 줄을 뜨던 선우의 손이 천천히 느려지다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미안해. 그때 네 동생을 두고 와서.’

서문도가 사과를 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먼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어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리고 민우를 두고 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더불어 선우에게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도.

‘그것 때문에 네가 여기까지 와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도, 미안하게 생각해.’

뒤늦게 어딘가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지난 시간에 대해 미안하다고 하는 건가. 처음부터 다 알면서도 작정하고 가지고 논 거면서.

힘든 시간을 보란 듯이 안겨 준 장본인이면서, 마치 본인이 의도한 잘못이 아니라는 듯이 말을 할 수 있나.

처음부터 되짚어 생각을 하면 그렇게 기막힐 수가 없는데.

서문도는 그녀가 간절한 것을 알면서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물었다 놓기를 반복했었다.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 잠자리를 하고 싶다고 올라온 그녀를 안았다. 몇 번의 거절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다가 결국은 서슴없이 옷을 벗겼다. 카드를 내밀어 수치심을 주었고, 그 뒤로도 돈을 노린 여자 취급을 하며 비웃었다.

그렇게 죽지 않을 만큼 물었다가, 살짝 풀어 긴장을 놓게 했다가, 다시 아프게 물면서 제대로 가지고 놀았다.

그래도 거기까진 이해해 보려 노력할 수 있었다. 끈질기게 달려들어 같이 자자고 하는 여자를 마다하는 게 귀찮아졌을 수도 있고, 잠시 흥미가 일었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건 선우의 절실한 마음을 시험했다는 거였다.

중간중간 마치 네가 어디까지 절실할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몇 번이나 그만두라고. 눈에 보이지 말라고. 해고를 하겠다고.

그때마다 곁에 머물게 해 달라고 빌었던 일들이 새삼스럽게 생각나 선우는 숨을 깊이 쉬었다.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한 뒤 몇 코를 더 뜨다가 다시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

스스로 옷을 벗게 했고, 환한 불빛 아래서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좋아한다 말하라 했고, 애원하며 매달리라 했었다.

잠자리를 가졌던 숱하게 많은 밤이, 사실은 남자가 의도적으로 숨통을 쥐었다 놓으며 놀았던 시간이라 생각하면 삽시간에 목이 뻣뻣해지곤 했다.

그뿐일까.

그러는 사이사이 뼈가 녹을 정도로 다정하기도 했었다. 진심으로 선우를 좋아하는 것처럼, 진짜 연애를 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 결국엔 마음까지 주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별채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가 잘못되지 않았나.

네 사정을 다 알았으면서 그런 식으로 가지고 놀아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민우를 두고 온 건 미안하고, 내게 그런 짓을 한 건 미안하지 않은 걸까.

우르르 마음이 끓어올라 선우는 손에 있는 크림색의 모자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눈을 꾹 감고 깊이 숨을 쉬었다.

전부 잊겠다고 말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원망하는 마음, 이제는 없으니 마음 쓰지 말라고 먼저 화해의 말을 건넸었다.

그러니 나를 가지고 놀았던 건 미안하지도 않냐는 질문은……. 이제 와서 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도 너무 잔인하지 않나. 이민우의 누나인 것을 속이고 들어왔다는 게, 그 오랜 시간을 가지고 놀 정도로 잘못한 일일까. 바닥까지 던져질 정도로 잘못한 일일까.

왜 내게 그런 짓까지 했을까.

자비가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최지상의 사건을 터트릴 때만 보아도 그랬고, 그녀를 잘라 내던 순간에도 머뭇거림은 없었다.

거기까진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얼어붙은 그녀를 체온으로 녹여 주었을 때였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뜻 모를 말을 해 놓고, 입을 맞추었을 때였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또 있었다. 정말 모두 다 거짓이었냐고, 나를 기만하기 위해 말했던 거냐고 붙잡고서 물어보고 싶은 순간들.

‘네가 너무 좋아.’

선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픈 감정이 뻐근하게 목을 넘어갔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밤의 일이다. 등 뒤로 스며들었던 그 밤의 목소리는 아무리 지워 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이유 없이 마음이 아팠던 말.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나랑 있어.’

왜 그런 말까지 해 가며 나를 속였을까. 그렇게까지 나를 치밀하게 속였어야 했을까. 정말 속인 게 맞을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나를 속인 게 아니었다면. 그런 거라면.

선우는 거기서 멈추었다.

앞으로 뻗어 가려는 생각을 억지로 닫았다. 다시 찾아와 아이를 지우라 했던 남자였다. 싸구려 여자 취급을 하며 너를 어떻게 믿겠냐고 했었다. 그때의 서문도는 예전보다 더 잔인했었다.

선우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그 시간들은 모두 지났고, 잊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잊어야 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숨을 가다듬고 다시 뜨개를 뜨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힘없이 웃었다. 부지런히 떴던 마지막 몇 줄의 코바느질이 엉망이었다.

중간이 비고 몇 개를 빠트리며 건너뛴 부분들이 마치 자신의 마음을 보는 듯했다. 연결되지 않는 어떤 지점들이 구멍처럼 뚫려 있어 엉망인.

선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부분들은 구멍이 난 채로 남겨 두는 것도 현명한 일이지 않을까.

지난 시간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새로 맞이해야 하는 앞으로의 날들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묻어 두면 되는 일이다. 굳이 물어보지 않으면 될 일. 선우는 엉망으로 떠진 실을 풀어 다시 뜨기 시작했다.

* * *

크리스마스는 고요히 지나갔다. 병원에서 괜찮다고는 했지만 아직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선우는 주로 침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다이닝룸에서 문도와 마주치게 되는 바람에 함께 식사를 했고, 저녁 시간은 선우가 쪽잠을 자면서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새벽같이 깨어난 선우가 방에서 손뜨개를 마저 하다가 따뜻한 우유라도 마실까 싶어 주방으로 나섰을 때였다.

“선우 씨, 일찍 일어났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장 여사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잘 다녀오셨어요?”

“잘 다녀왔어요. 아침으로 프렌치토스트를 해 왔는데, 지금 차려 줄까? 아직 따뜻한데.”

안 그래도 빈속이 쓰려 우유로 달래려던 참이었다. 선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배고팠어요.”

“그럼 앉아 있어요. 차리기만 하면 되니까.”

“네. 저 차 한잔 타려는데, 여사님도 드실래요?”

“응. 나는 믹스커피로 부탁해요.”

선우는 무선 주전자에 물을 받아 버튼을 눌렀다. 머그잔 두 개를 꺼내어 하나는 루이보스 티를 넣어 놓고, 하나에는 믹스커피를 준비해 놓았다.

끓는 물을 차례대로 부은 뒤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니 장 여사가 프렌치토스트와 편으로 썬 딸기와 바나나를 담은 접시를 선우의 앞에 차려 주었다.

“맛있겠어요.”

선우는 프렌치토스트 위로 메이플 시럽을 뿌렸다. 칼로 잘라 한 입 넣으니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잘 먹으니깐 만드는 보람이 있어.”

장 여사가 커피를 한 입 마시며 말했다.

“네. 저도 입덧 그쳐서 좋아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개의치 말고 말해요.”

“네.”

대답하며 선우가 웃는데 다이닝룸으로 성큼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여사님. 아침 안 먹어요.”

출근 준비를 마친 서문도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선우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천천히 내려왔다. 선우가 앉아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문도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전무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음을 가다듬은 선우는 먼저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래전 일개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을 때처럼 지내볼 생각이었다.

처음 별채에 들어와서 서유라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을 때, 서문도라는 남자는 선우에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부르면 간단히 보고를 하면 되었고, 오가다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면 됐었다.

할 이야기는 덤덤히 했었고,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딱히 신경을 쓰지도 않았었다. 앞으로도 그 정도의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선우의 인사가 뜻밖이었는지, 문도가 선우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인사를 건넨 선우는 시선을 내려 다시 포크를 들고 딸기를 입에 넣었다.

“아침 안 드신다고요?”

아일랜드 쪽에 서서 커피를 마시던 장 여사가 문도에게 확인하며 물었다. 문도는 장 여사를 한 번, 선우를 한 번 보고 다시 대답을 했다.

“아니. 먹을 건데요.”

문도는 마치 처음부터 먹을 생각이었던 것처럼 의자를 빼고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지금 여기서 먹는다고요?”

평소 눈치가 착착이었던 장 여사가 한 번 더 확인을 한다. 이선우가 불편해하니 먹지 말고 나가거나 본관으로 건너가라는 뜻이겠지.

“아직 말 안 했나 보네.”

문도는 딸기를 씹고 있는 선우를 보며 말했다. 뭐를요? 라고 묻는 듯이 선우의 눈이 들렸다.

“나랑 같이 있어도 괜찮다는 말.”

그 말을 왜 굳이?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선우를 보고 피식 웃은 문도는 장 여사에게 말했다.

“입덧 좋아졌대요. 앞으로 식사는 별채에서 할 거니까 같이 준비해 주세요.”

‘같이’라는 부분에서 꿀꺽, 선우가 딸기를 씹다 말고 목으로 넘겼다.

당황해서 딸기만 삼켜 버린 선우를 감상하듯이 바라보다가 문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야 여사님이 편하지.”

장 여사가 언제부터 자기 신경 썼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도를 보았다.

“내가 원래 여사님 많이 생각하잖아요.”

태평하게 말한 문도는 속눈썹만 깜빡이고 있는 선우를 보았다. 하나씩 다시. 이선우와 다시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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