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크리스마스 선물
선우는 유부 전골을 한 국자 떠서 앞접시에 담았다. 전골을 각자의 그릇에 담고 각자 알아서 먹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인 식사가 이어졌다.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를 배경음 삼아 절반 정도 밥을 먹었을 때, 문도가 물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이제는 나랑 같이 먹어도 괜찮은 건가.”
샐러드를 집던 선우는 물을 마시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입덧이 많이 좋아졌어요. 전처럼 속이 뒤집히진 않아요.”
“잘됐네. 많이 먹어.”
고개를 끄덕이며 문도가 말했다. 담담해 보이는 얼굴 아래로 옅게 깔린 피곤이 보였다. 길 위에서 밤을 새고 한숨도 못 잔 채로 출근했으니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피곤할 터였다.
선우는 다시 수저를 드는 문도를 보며 망설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오랫동안 남자를 미워하고 원망해서 그런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선우의 목소리에 문도가 눈을 들었다. 선우는 입술을 깨물다가 결심을 했다.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 보자고.
“어제 일은 고마웠어요.”
문도가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은 표정이었다.
“전무님 덕분에 편히 있었고, 많이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그 소리에 문도가 한 번 더 눈썹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뭐가 고마운데.”
“아……. 그냥 다요.”
조금 당황한 선우는 말을 덧붙였다.
“혼자 병원에 갔다가 택시 탔으면, 훨씬 힘들었을 거니까요.”
병원에 혼자 갔다가 택시를 탔더라면. 그 택시가 눈길에 멈췄는데 하혈을 했더라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겁을 잔뜩 먹어 패닉에 빠졌던 걸 흔들어 깨워 준 것도, 불편하지 않게 보살펴 준 것도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잊었나 본데 네 배 속에 있는 애는 내 아이야.”
조금 삐딱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선우는 입술만 깨물었다. 이러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내 새끼 내가 챙기는 게 뭐가 고마워.”
“알아요. 전무님 아이인 거.”
잊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잊을까. 매 순간 실감하며 살고 있다. 낯선 음식이 먹고 싶을 때마다, 이 공간에 머무는 모든 순간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알면 그만 고마워해.”
그렇게 말을 하고 뭔가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문도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선우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먼저 연락을 해. 그래도 돼. 그게 당연한 거야. 내 아이니까.”
나름 풀어서 설명을 하려는 것을 알겠다. 서문도에게 이선우는 그냥 이선우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이고, 그러므로 신경을 쓰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다.
전이라면 그것조차 거부하려 했겠지만 이제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난 일들은 묻어두고 그냥 담백하기를 바란다.
“네. 그럴게요. 앞으론 아이 관련해서 생기는 일들은 먼저 연락을 드릴게요.”
그 말에 문도가 미간을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되었다는 듯 한숨을 쉰다.
“그래. 그래 주면 좋겠어. 그리고 이건.”
문도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동차의 스마트 키였다.
“차고에 뒀으니까 필요할 때 써. 주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선우가 키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문도는 성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색깔이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면 바꿔 줄 테니까.”
선우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주는 건 아닌데 마음에 안 들면 바꿔 준다니.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서문도는 이상하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못된 말은 가차 없이 하면서 자꾸 뭘 주겠다고. 예전에도 그랬었다. 너는 그런 여자라고 했으면서 목걸이를 주고, 팔찌를 주고, 밥도 사 주고, 수박도 사 줬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잘 쓸게요.”
웃으며 대답을 하는 선우를 문도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올려놓은 키를 선우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
피곤에 잠긴 것 같은 눈동자가 선우를 오래 보았다. 밥을 먹던 것도 잊었는지 그렇게 한참 선우만 보고 있어, 기분이 이상해지려 했다.
선우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떴다. 그리고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실은 아까 잠깐 박소영 씨 생각이 났어요.”
스마트 키 뒷면의 로고가 박소영이 처음 받았던 국산 차의 로고였다. 문도는 순간 속으로 욕을 씹었다.
기사 딸린 차는 극구 거부를 하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편히 다니라고 고른 차일 뿐이다.
그나마 부담되지 않을 가격으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눈길에서 안전할 사륜구동으로 고르느라 고른 건데 하필 같은 브랜드일 게 무언가.
“그런 의미로 주는 게 아니라.”
“알아요. 그냥 생각이 났어요. 미국 가셨다고 들었는데 잘 지내고 계시겠죠?”
선우가 그런 뜻 아닌 것 잘 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대답했다.
“여기보단 낫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같이 있는 게 아무래도 어색하고 힘이 드는지 선우가 입술을 다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색함을 깨 보려는 듯 다시 말을 했다.
“유라 씨 생각도 났어요. 나갈 때마다 운전시켰던 것도.”
“제 손으로 하면 될 것도 남 시켜 먹는 건 일등이지.”
“아니에요. 유라 씨 면허 없었어요.”
금시초문이었다. 문도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
“필기에서 다섯 번인가 떨어져서 포기했대요. 상식으로 풀면 된다고 해서 상식으로 풀었는데 점수 미달이었다고요.”
그 말을 하면서 선우가 웃었다. 눈이 반달처럼 되는 진짜 미소를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문도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이선우는 억지로 만들어 낸 것처럼 웃었는데, 실제의 이선우는 저렇게 웃는다. 별처럼 반짝여, 눈이 부시게.
“고모님답네.”
“생각이 많이 나요. 고생도 많이 했지만 마지막엔 그래도 나름 재밌었거든요.”
서유라와 이선우가 거실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망나니 같았던 서유라가 선우 앞에서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던 것도. 마지막에는 이선우 어디 갔느냐며 울면서 찾았던 것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나도 그래.”
서로가 서로를 보는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유감이야. 서유라가 죽은 것도, 서유라 사건으로 네 동생이 그렇게 되었던 것도.”
한 번도 선우에게 이민우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그날의 진실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 이민우에 대해선 알려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우가 그렇게나 진실을 찾아 헤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날.”
말을 하고 선우를 보았다. 눈빛으로 그날이 언제인지 알아들은 선우가 입술을 맞물었다.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었어. 새벽 4시를 조금 넘겨서, 서유라에게 가 보라고. 사고를 친 것 같다고.”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날의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면, 내가 아닌 너겠지. 문도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클럽엘 갔어. 문을 열었을 때 젊은 남자 둘이 누워 있는 걸 봤고, 죽은 것도 확인을 했어.”
청바지를 입었던 남자와 검은색 슬랙스를 입었던 남자. 일이 더럽게 돌아갈 수도 있겠다고 예감을 했던 그때.
“바닥에는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던 김영재와 머리에 상처가 난 네 동생이 있었지. 이미 죽은 상태였고, 현장에는 정신이 나간 서유라와 최지상이 있었어.”
선우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약에 취한 서유라가 횡설수설 거짓말을 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어. 조금이라도 얽히는 게 싫었거든.”
일이 꼬이든 말든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서유라의 일은 서유라의 일일 뿐, 그에게까지 얽혀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의 처리만 하고 현장을 나왔다.
“내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으로 최지상이 나왔고. 서유라는 변호사 대동하고 경찰서로 갔지. 경찰 조사 받고 나오는 서유라를 기다렸다가 재활 병원에 보내 버렸어. 내 할 일은 거기가 끝이라 생각했지.”
선우는 애써 침착히 이야기를 듣는 듯 보였지만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돌아보면 이선우를 울게만 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준 적은 거의 없이.
“미안해. 그때 네 동생을 그렇게 두고 와서.”
문도의 사과를 들은 선우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도는 잠시 사이를 띄웠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네가 여기까지 와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도, 미안하게 생각해.”
태엽을 감아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 자리에 남았을까. 서유라의 거짓말을 비웃으며 사실 그대로를 조사하라고 경찰에게 말했을까. 네가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너를 만나지 않는 길을 선택했을까.
이선우를 보내고 나서 생각을 해 보았다.
진짜 미안한 건 따로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반복할 거였다.
이선우로 하여금 그 모든 고통을 다시 겪게 하고, 몇 번이고 트레이너를 구하여 이선우가 이 집으로 들어오는 날을 기다릴 거였다.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이고.”
선우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라도 사실대로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미안하다고 해 주신 것도요.”
자꾸 나오는 눈물이 민망한지 몇 번 더 손으로 밀어내고는 입술을 깨물며 문도를 보았다. 후, 작게 숨을 내쉬어 진정하려고 노력한 뒤에 입을 다시 열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다 지나갔고, 전무님 덕분에 민우의 진실도 밝혀졌고요. 그래서……. 이제 그만 잊으려고요.”
잊으려 한다는 말이 반갑지 않은 건 왜일까. 애써 만든 미소를 보이는 게 그리 기쁘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일까.
“솔직히 며칠 전까지 전무님 원망했었는데, 이젠 아니에요. 아이 건강하게 낳아서 잘 키우는 것만 생각할래요. 그러니까 전무님도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해요.”
더는 외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겠다고 선우가 말했다. 분노도 거두고 원망도 거둔 너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래. 아이 건강히 낳는 것부터 생각해.”
문도의 말에 선우가 빙그레 웃었다. 만들어진 것 같은 미소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보고 다시 웃어 준다는 것이 좋았다. 여기부터 다시.
부서진 벽돌을 쌓던 미친놈처럼 하나씩 새로 시간을 쌓아 가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너도 활짝 웃겠지. 문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