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미안
입술은 가만히 닿았다. 그리고 한숨을 한 번 쉴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느리게 떨어졌다.
입술이 떨어졌다 해서 거리가 멀어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숨결이 스칠 것처럼 가까웠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서로의 시선이 닿는다. 파르르 떨고 있는 선우의 눈동자와 흔들리는 문도의 눈동자가 하나로 얽히며 서로를 담았다.
선우는 숨이 막혀 왔다. 시간이 멎은 것 같았다.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싶은데 떼어지지 않았다. 밝고도 어두운 남자의 눈동자가 선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선우가 작게 숨을 터트렸을 때였다. 문도는 충동적으로 다시 고개를 내렸다. 부드러운 입술을 베어 물듯이 당기며 한 번 더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빈틈없이 포개어지며 서로의 숨이 섞여들었다.
문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슴이 저며 왔다. 오랫동안 그리워한 이선우의 감촉이었다. 그래. 정말 마지막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너와 입맞춤을 하는 사이 세상의 종말이 오면 좋겠다고. 먼 훗날 서로를 품에 안은 채로 발견이 되어도 좋겠다고.
더 깊이 닿고 싶었지만,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했다. 이선우와 닿게 되면 눈이 돌아 버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밤, 이 어둠으로부터 이선우를 지켜 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문도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둠 속에서 마주한 선우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혼란, 당황, 불안. 그리고 알 수 없는 흔들림.
“미안.”
혼란을 더해 준 것에 대해 사과를 한 뒤, 문도는 선우를 힘주어 품에 안았다. 아이가 무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선우가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쿵, 쿵, 쿵, 쿵 문도의 심장 소리가 귀를 울렸다. 선우는 어지러웠다. 자신을 감싸 안은 남자의 체온이 오래된 기억들을 불러왔다. 목 끝까지 더운물이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시간이 걸릴 테니까 아이 생각해서라도 한숨 자.”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입맞춤을 한 남자가 말했다. 아니다.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가만히 대었던 첫 번째 입맞춤은 위로. 조금 더 깊었던 두 번째 입맞춤은 우발적인 충동. 미안하다는 말이 가슴을 맴돈다.
“네.”
선우는 남자에게 대답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침착하게 들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얗게 뒤덮인 어둠 속에서 선우는 눈을 감았다.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불을 끄듯이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튼튼이 걱정은 하지 마.”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퍼져 나갔다. 선우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있는 선우의 등을 쓸어 준 뒤 문도가 말을 이었다.
“태몽 이야기를 해 줬었나.”
선우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일 크고 빛났던 별이 내 품으로 떨어졌거든. 내 품이 자기 자리라는 듯이 뛰어드는 걸 놓치지 않고 받았어.”
눈을 감은 채 선우는 반짝이는 별을 그려 보았다. 남자의 품으로 슝 떨어져 품에 안기는 모습도 생각했다.
“그러니까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걱정하지 말고 한숨 자.”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마음이 놓였다.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과 애틋하게 뒤섞였던 숨은 잊기로 한다. 절박한 순간에 나온 충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
남자의 체온에 몸을 맡긴 채 선우는 다시 한번 눈을 꾹 감았다. 이 밤, 아이도 자신도 무사하길 바란다.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 * *
도로는 두 시간 정도가 지난 뒤에 풀렸다. 김 기사가 중앙선 안전 펜스 위로 건네준 휘발유와 배터리 점프 스타터로 문도는 차를 살렸다.
대교를 건너가 제일 가까운 대학 병원에 먼저 들렀다. 산부인과 응급 진료를 보고 아이가 무사한 것을 확인했다. 피고임이 사라지고 자궁 상태도 괜찮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침이었다.
“고생했어요. 몸 좀 녹이고, 한숨 푹 자야겠네. 아기는 괜찮은 거죠?”
장 여사가 따뜻한 둥굴레차를 내어 주면서 선우에게 말했다.
“네. 괜찮대요.”
“씻고 나와요. 아침 차릴 테니까.”
갈아입을 옷을 들고서 선우는 욕실로 향했다. 멍한 얼굴로 거울을 보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몸은 천근만근인데 배가 고팠다.
“어서 와요. 김칫국 끓여 봤는데, 어떨라나. 입에 안 맞으면 된장국도 있고.”
“김칫국 먹어 볼게요. 냄새부터 맛있어요.”
선우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차려진 음식은 1인분이었다. 2층으로 올라간 문도가 생각나 망설이다가 장 여사에게 물었다.
“전무님은 식사하셨어요?”
“나가서 드신다고 선우 씨 편히 먹으래요.”
그 말이 신호라도 되었는지 계단 위쪽에서 서문도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샤워를 마친 말끔한 모습이었다.
“여사님, 저 출근해요.”
앞으로 걸어가며 말하던 서문도가 문득 이쪽을 보았다. 선우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자 피식 웃는다.
“오늘은 푹 쉬어.”
알겠다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도가 시선을 돌려 장 여사를 보았다.
“여사님도 본가 잘 다녀오시고요.”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됐어요.”
문도가 가볍게 거절을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더니 잠시 목을 뒤로 젖혔다.
선우는 그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리던 문도가 선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가볍게 웃더니 엘리베이터를 탔다.
“선우 씨, 앉아.”
“아, 네.”
마음이 이상했다. 식사도 못 하고 바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니 신경이 쓰였다. 선우는 얕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어때, 괜찮아?”
장 여사가 선우가 한술 뜨는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맛있어요.”
습관처럼 말을 하다가 깨달았다. 속이 뒤집혔던 음식 냄새가 역하지 않았다. 미식거림은 여전했지만 전처럼 많이 거북하지 않았다.
선우는 젓가락을 들고 불고기를 먹었다. 물김치도 떠먹고, 숙주나물과 시금치나물도 먹었다.
“여사님. 저요.”
선우는 접시에 사과를 담아 오는 장 여사를 보았다.
“왜요. 속이 안 좋아?”
“아니요. 입덧이 좋아졌나 봐요. 반찬도 많이 먹었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장 여사가 사과를 앞에 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새콤달콤한 사과를 먹는데 거실에서 반짝이고 있는 커다란 트리가 보였다. 하룻밤을 길 위에서 보내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여사님, 몇 시에 출발하세요?”
“이거 치워 놓고 가야지.”
선우는 그 말을 듣고 방으로 향했다. 며칠 전 장 여사가 생각나서 사 두었던 화장품 세트를 서랍에서 꺼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 봤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식탁으로 돌아와 장 여사에게 포장된 물건을 건넸다. 장 여사의 눈이 커다래지는데 괜히 쑥스러웠다.
“뭘 이런 걸. 잘 쓸게요.”
“여긴 제가 치울게요. 먼저 가 보세요.”
“됐어. 치울 게 뭐 얼마나 된다고.”
선우는 손을 젓는 장 여사를 따라다니며 그릇도 옮기고 반찬도 정리를 했다.
“나 없는 동안 여기서 꺼내 먹어요. 제일 위에 반찬. 그다음에 국하고 김치. 샐러드 있고, 아래엔 과일. 데워 먹기만 해요.”
“네.”
“입맛 없으면 시켜 먹거나 숙소동에 인터폰을 하거나 하고.”
“네. 잘 챙겨서 먹을게요.”
선우는 대답하며 웃었다. 하룻밤 외출에 냉장고 가득 음식을 채워 놓은 장 여사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다녀오세요.”
본관으로 건너가는 장 여사에게 인사를 한 뒤, 선우는 눈을 비볐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배불리 밥을 먹어서 그런지 노곤함이 밀려왔다.
방으로 돌아온 선우는 커튼을 닫고 스탠드를 작게 켰다. 포근한 침대 속으로 들어갈 땐 눈꺼풀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꽃병의 꽃이 바뀐 것이 보였다. 장미와 소국, 리시안셔스와 이름 모를 푸른 잎이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였다.
‘미안.’
입술을 떼며 남자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 바로 전에 애틋하다는 듯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던 것도.
생각하지 말자.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할 테니 한숨 자고 일어나면 태교 인형을 만들자. 시간이 남으면 손 싸개도 만들고.
선우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꿈이 없는 잠을 자고 싶었다.
* * *
문도는 손에 부드러운 크림색 천을 쥐고 잠이 든 선우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린 거실에 반짝반짝 트리가 빛났고, 소파에 앉아서 아이 옷을 만들던 여자는 잠이 들어 있었다.
달칵.
주방의 불을 켠 문도는 냉장고를 열었다. 장 여사가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 보였다. 육수를 부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유부 전골을 꺼내고 칸칸이 담아 놓은 밑반찬도 꺼냈다.
수저 한 벌을 식탁에 올려놓고 밥솥에 있는 밥을 떴다. 끓고 있는 전골의 불을 내리고 식탁 위에 올려놓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오신 줄 몰랐어요. 잠깐 졸았는데, 시간이 벌써…….”
핸드폰을 본 선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흰 눈이 다시 날리기 시작한 정원이 어두워서 밤인 줄 알았는데, 아직 7시밖에 되지 않았다.
“잘 자고 있길래 안 깨웠어. 먹고 그냥 둬. 치우는 건 내가 나중에 한꺼번에 할 테니까.”
선우는 눈을 깜빡였다. 물컵에 물을 따르는 남자의 앞에 차려 놓은 음식들이 보였다.
“아니에요. 저는 알아서 먹을게요. 전무님 드세요.”
“먹어. 난 이따 먹을 테니까.”
돌아 나온 문도가 말했다. 벗어 두었던 모직 재킷을 팔에 걸고 2층으로 올라간다. 홀로 다이닝룸에 남은 선우는 남자가 차려 놓은 식탁 위의 음식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밖에는 다시금 눈이 내린다. 반짝이는 트리가 거실을 밝히는데, 식탁 위에는 1인분의 식사만이 차려져 있었다.
코트를 벗어 덮어 주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밤새도록 괜찮다고 말을 해 주었던 모습과 마주치지 않을 테니 편히 밥을 먹으라고 했던 모습도.
선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지우라는 말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지만, 언제까지 남자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아이를 혼자 키우고 싶어서 도망을 치려 했던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서문도가 자신을 억지로 별채까지 끌고 오긴 했지만 가능한 잘해 주려 노력을 하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어쨌든 아이로 연결된 사이였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엔 잠깐씩이나마 얼굴을 마주해야 할 일들이 있을 거였다.
그렇다면 더는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뾰족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
선우는 서랍을 열고 수저 한 벌을 더 꺼냈다. 밥그릇을 꺼내 밥을 푸고 앞접시도 하나 더 놓았다. 그렇게 차려 놓은 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핸드폰을 들었다. 숨을 크게 마신 뒤 서문도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괜찮으시면 식사 같이해요.”
미워하는 마음 같은 거, 원망하는 마음 같은 거, 이제는 그만 삼켜 버리기로 한다. 아직 응어리진 어떤 부분들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테고.
저밀 듯 욱신거리는 마음도 언젠가는 삼켜지겠지. 그렇기를 바라며 선우는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