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내리는(3)
붉은 피가 선우의 다리 사이로 번져 있다.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선우는 토하듯 울고 있었다.
“괜찮아.”
침착하게 말했지만, 이미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삼켜진 선우에게는 괜찮다는 말이 닿지 않는 듯했다.
“이선우.”
문도는 선우의 얼굴을 덮고 있는 손을 잡았다. 억지로 아래로 내리게 한 뒤 눈을 맞추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이 문도를 보더니 다시 울컥 눈물을 흘렸다.
“아까 패드 댔었지?”
병원을 나서기 전 스테이션에서 생리대를 빌린 선우가 화장실에 다녀왔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패드가 담아내지 못할 양의 출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색깔은 선명한 붉은색. 문도는 숨을 마시고 핸드폰을 들었다.
“네. 병원이죠? 두 시간 전에 진료 보았던 이선우 산모 보호자입니다. 출혈이 있는데, 당직 교수님 상담이 필요합니다.”
차라리 논현역 근처였으면 걸어서라도 병원에 데려갔을 텐데. 이미 한남대교 안으로 진입해 버렸다. 돌아가는 길은 막혔고 사방은 도로, 앞에는 강이다.
“양은 생리대를 넘쳤을 정도. 색은 붉은색이고요. 네. 알겠습니다.”
당직 교수와 이야기를 했지만 병원에 와서 살펴봐야 한다는 말만 할 뿐, 조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만 아이는 괜찮을 수 있다고, 피고임이 있던 것이 흘러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한다.
“뭐……래요?”
여전히 눈물을 가득 담고서 선우가 물었다.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눈동자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여 있던 피가 흘러내린 거래.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괜찮았고.”
“이렇게 많이도…… 괜찮았대요?”
“괜찮았대.”
여전히 불안해하는 선우의 눈을 보며 문도는 다시 한번 말했다.
“괜찮아.”
닿지 않는 말이라도 상관없다. 믿지 못하는 이선우에게 열 번, 백 번이라도 알려 줄 생각이다. 아이는 괜찮다고. 그러니 무서워 말라고.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아.”
“그냥 어떻게 알아요…….”
선우의 뺨으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괜찮다고 말을 했던 여자는 실은 내내 불안했던 거였다. 억지로라도 입원을 시켰어야 했나,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문도는 몸을 기울여 선우의 얼굴을 잡았다. 자그마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밀어내며 말했다.
“나는 다 알아.”
“……거짓말.”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선우가 말했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아주 잠깐 예전처럼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문도는 선우의 눈동자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추고 오래 선우를 보며 선우의 불안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주변의 소리가 잦아들고, 눈보라가 멀게 느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문도는 말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헛된 소리라고 여겨도 괜찮다. 거짓이 필요하다면 거짓을, 확신이 필요하다면 확신을 줄 생각이다. 만에 하나 아이가 잘못된다고 해도 같은 말을 할 거다.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니까.”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강한 여자라는 걸 안다. 체념을 몰랐던 이선우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려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니 이선우가 무너지지 않게 받쳐 주는 게 그가 해야 할 일이다.
문도는 문을 열고 나갔다. 운전석 뒤를 받은 차주는 자신의 차를 받은 다른 차주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온 문도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도 뒤에서 받혀서 이렇게 된 건데, 보험사 처리하시죠.”
“수리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신 몇 가지를 구하고 싶은데요.”
문도는 중앙선을 넘어 상대 차주와 그 뒤의 차주에게 임산부가 있다는 말을 전하고 물과 여분의 담요를 얻었다. 혹시 몰라 초콜릿과 사탕도 얻은 뒤,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주하는 기사에게 한남대교에 정차해 있다는 말을 전하고, 제설이 시작되어 길이 뚫리면 휘발유과 주유 장비를 싣고 반대편 차선으로 와 줄 것을 부탁했다.
선우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차에는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길만 뚫린다면 집까지는 문제없이 갈 수 있는 양이긴 하지만, 연비가 좋지 않은 차라 지금처럼 10미터를 한 시간에 가야 한다면 무사히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대교 위로 늘어진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내리고 있었다.
* * *
두 시간이 흘렀다. 한남대교 초입에 있던 차는 이제 강물 위에 서 있었다. 그 상태로 멈춘 지는 40분이 지났다.
실시간 교통 상황과 본가에서 전해 주는 소식에 의하면 대교 건너편에서 차들이 뒤엉켰다고 한다. 몇 중 추돌일지 모를 사고가 있었는데 덕분에 렉카차도, 제설 차량도 진입을 못 하고 있다고.
문도는 눈을 감고서 조수석에 누워 있는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잠을 자는 건 아니었다. 그저 불안을 상쇄하고 싶어 눈을 감은 듯 보였다.
자정이 넘어간 시간, 사람들은 이제 차를 버리고 걷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대교 위를 건너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사납게 휘날렸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온 듯했다.
문도는 차를 옆 차선으로 붙였다. 인도와 인접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히터를 제일 약하게 조절했다. 시동을 ON모드로 돌려 엔진을 껐다. 전원만 들어온 상태로 남겨 놓는데 선우가 눈을 떴다.
“왜…….”
선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다리만 건너가면 한남동이다. 기사는 반대편 초입에서 길이 풀리기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라고 했다.
기사가 대기 중이니 강만 건너가도 괜찮겠지만, 하혈을 한 선우를 데리고 칼바람이 부는 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길이 풀릴 때까지 기름을 아껴 시간을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버텨야 할 것 같아.”
고개를 든 선우는 차창 너머로 차를 버리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여기서요?”
“응.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건너편에서 김 기사님이 건너오려고 준비 중이긴 한데 사고가 있어서 수월하지 않아. 견딜 수 있겠어?”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아프다거나, 하혈이 계속되지는 않고?”
서문도는 신기할 정도로 침착했다. 밖은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평온한 집에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괜찮은 것 같아요.”
믿고 싶어진다. 흔들림이 없는 남자를.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말을 하는 남자를 믿고 싶어진다.
고개를 끄덕인 문도가 시트를 뒤로 밀어 공간을 만들더니 몸을 비틀어 코트를 벗었다.
“히터가 약해서 추워질 거야.”
담요 위로 코트가 덮였다. 문도가 바람이 들지 않게 코트 깃을 어깨 안으로 밀어 넣어 주며 선우를 꽁꽁 싸맸다. 그리고 그 위에 새 담요로 다시 감쌌다. 얼굴만 남은 선우를 보며 싱긋 웃는다.
“볼 만한데.”
조금 어이가 없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나.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웃음 끝에 예고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실은……. 낮에 배가 살짝 아팠는데……. 자주 그랬으니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오늘 나오지 말걸. 나왔을 때 신경을 쓸걸. 아이만큼 소중한 게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왜 자꾸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모든 순간들이 후회가 되어 눈물로 흘러내렸다.
“입원……할걸 그랬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입원할걸. 왜, 그냥 괜찮을 거라고 했는지…….”
모두 자신의 잘못 같다.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튼튼하게 태어나 주기만을 바랐던 아이였는데, 그냥 존재해 주기만 해도 감사한 아이였는데, 그런 아이를 자신의 잘못으로 잃을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마. 튼튼이는 날 닮아서 독할 거니까.”
남자의 입에서 튼튼이라는 말이 나왔다. 무척 안 어울렸다. 그다음 말도 이상했다. 선우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으면서, 이번엔 자신을 닮았을 거란다.
그래서일까. 눈물이 멎으며 불퉁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 닮았으면 좋겠다면서요.”
“좋겠다는 거지. 닮았다고는 안 했어. 먹는 것만 봐도 날 닮은 게 맞아.”
선우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문도를 보았다.
“나는 포기도 모르고 체념도 몰라. 내 아이도 그럴 거니까 이제 그만 울어.”
“안 울어요.”
“울었잖아.”
“그건.”
뭐라 말을 더 하려다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툭 소리가 나며 전원이 나갔다. 문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히터에 손을 대었다. 시동 버튼을 눌러도 걸리다가 말았다.
“배터리 나갔나 보네.”
가지가지로 악재가 겹쳤다. 선우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문다. 이미 냉기가 돌고 있던 차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냉동창고처럼 변해 갔다.
“이제…… 어떻게 해요?”
피에 젖은 다리 사이에 한기가 들었다. 선우는 으스스 몸을 떨며 문도를 바라보았다. 문도가 잠시 생각을 하고는 뒷자리를 확인했다.
“뒤로 갈 거야.”
“뒤로요?”
“체온으로 버틸 거니까 불편해도 참아.”
말을 하는 문도의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번졌다. 모른 체하고 있었지만 코트도, 담요도 전부 선우에게 둘러 준 문도는 슈트 차림이었다.
“벨트 풀어.”
선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도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살을 에는 바람을 뚫고 조수석으로 돌아갔다. 몸을 일으킨 선우를 감싸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뒷좌석으로 들어온 문도는 선우의 몸에 둘린 담요와 코트를 벗기고, 그 아래 입고 있었던 그녀의 코트도 벗겼다. 얇은 니트 차림의 선우를 자리에 눕히고, 그 위로 켜켜이 옷을 쌓았다.
마지막으로 두 장의 담요까지 잘 덮어 준 뒤, 옷 무더기와 시트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긴장한 선우를 품에 바짝 안고 빙그르르 몸을 돌려 빈틈없이 선우를 감쌌다.
차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관에 들어와 있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이대로 세상의 종말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밤이다.
“무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사락사락 쌓이는 눈이 유리창을 전부 덮었다. 쌓인 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멈춘 것 같은 시간과 외따로 떨어진 것만 같은 공간.
“나쁘지 않네.”
문도가 말하자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고개를 조금만 내려도 입술을 머금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문도는 선우의 얼굴을 세세히 눈으로 쓸었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마지막 순간까지 너를 안고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며 문도는 선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