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내리는(1)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지났다.
선우의 하루는 비슷비슷했다.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장 여사가 차려 주는 아침을 먹었다.
입덧은 여전했다. 어떤 날은 반 그릇을 넘게 비울 때도 있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미지근한 둥굴레차만 간신히 넘길 때도 있었다.
점심까지는 아이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만들거나 손뜨개를 했다. 대학원 준비도 할 겸, 지루한 일상도 보낼 겸 어학원을 다녀 보려고 알아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임신 초기에는 조심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 많아서 등록은 미뤄 두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산책을 겸한 걷기를 했다. 동네를 도는 것으로 시작했던 산책은 점점 그 반경이 넓어져 남산타워까지 걸었던 적도 있었다.
처음 산책을 나섰던 12월 초만 해도 도톰한 외투면 괜찮았는데, 날씨는 매섭게 추워져 지금은 긴 패딩을 입고도 목도리를 둘러야 했다.
눈이 내리는 날도 잦았다. 으스스한 추위와 함께 하늘이 낮아지면 어김없이 눈발이 날렸다. 그런 날에는 일찍 산책을 접고 따뜻한 별채로 돌아왔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오면 틈새 틈새 낮잠을 잤고, 한 번은 태몽을 꾸기도 했다. 나무에 반짝반짝 매달려 있는 황금색 보석을 땄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현희도 선우가 치마폭에 찬란한 보석을 가득 담고 있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별채에서 서문도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딩, 하고 울리는 엘리베이터 소리를 듣는 게 전부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전에는 식사 중에 지나가는 모습을 보거나, 퇴근 후 잠깐 주방에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었다.
별채에서 그림자도 볼 수 없는 서문도를 만나는 곳은 병원이었다. 1차 기형아 검사를 겸한 검진 날, 병원 문을 열었더니 접수 대기를 하는 자리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서문도는 검사 내내 자리를 지켰다가, 헤어질 때 택시를 불러 주었다. 다음 검진일을 물었고, 선우가 내미는 초음파 사진을 지갑 안에 끼워 넣었다. 그 안에 얼핏 지난번에 건넸던 초음파 사진이 보였다.
겨울은 그렇게 고요히, 아무 일 없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 * *
“부회장님 미국 출장 스케줄이 당겨져서 오늘 출발하셨어요. 가시는 길에 이걸 보내셨네.”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였다. 본관에서 몇 번 선우와 식사를 했던 우현희가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모두 모여 외식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었다.
강요는 아니니 불편하면 말을 하라 했지만,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에서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크네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모형이었다. 따로 배달된 박스에는 색색의 조명과 아기자기한 장식 오너먼트들이 있었다. 기사들이 와서 거실의 한쪽에 트리를 설치하고 조명을 감아 주었다. 선우와 장 여사는 반짝이는 트리에 별과 달을 다는 중이었다.
“식사는 못 하게 되었으니까, 다음에 하자고 하셨어요.”
“저는 괜찮은데요. 식사는 아무 때나 해도 되고요.”
선우는 발뒤꿈치를 들어 양말 모양의 오너먼트를 달면서 대답했다. 바빠서 식사는 같이 못 하게 되었어도 생각하는 마음은 있다는 걸 표현한 것을 알기에 고맙기만 했다.
“25일이 우리 아버지 기일이라, 내가 24일부터 집에 가 있거든. 연말이라 겸사겸사 직원들 쉬게 해 주려고 선우 씨 입덧 있는 거 아셨어도 외식하자고 한 거고.”
그런 이야기는 몰랐었다.
“혹시 저 때문에 직원분들이 남으셔야 하는 거면.”
“이틀간 직원들 휴가는 확정되었고, 선우 씨 식사는 내가 미리 챙겨 놓고 갈라구 하는데. 괜찮죠?”
“그럼요.”
“숙소동에 남는 이들도 있을 거니까.”
“네. 걱정 마세요.”
선우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내 왔던 날들이었다. 장 여사도 마음 놓인다는 듯 웃으며 오너먼트를 달았다.
“이럴 때 보면 모자가 똑 닮았어.”
장 여사가 지나가듯 말했다.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오너먼트를 뒤적였다.
가끔, 서문도 생각을 했다. 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생각이라기보다 의문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까.
왜.
그 질문을 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설명되지 않는 일련의 행동들과 역시 설명되지 않는 남자의 말들이 너무 많았다.
방은 왜 꾸며 주었나. 일주일에 두 번씩 꽃은 왜 보낼까. 만둣국은 왜 사 왔고, 아이 사진은 왜 달라고 했을까.
지우라고 했으면서. 아이를 빌미로 한몫 떼어 가는 여자 취급을 했으면서. 뒤탈 없으려고 데려오는 거라 했으면서.
왜 그런 여자에게.
“표현을 잘 안 해서 그렇지, 마음까지 없는 건 아닐 거예요.”
장 여사가 선우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 말했다. 선우는 애꿎은 입술만 씹었다. 서문도라는 남자를 이제는 잘 모르겠다. 알 것 같은 날들이 있었는데, 민우의 핸드폰을 던져 준 그날 이후로 남자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
“이따 약속이 몇 시라고 했었죠?”
“5시요. 그런데 4시쯤 나가려고요. 들를 곳이 있어서요.”
은정 선배를 만나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서유라가 그렇게 되고 나서 통화를 몇 번 했었다. 세종에 내려갔다는 말도 전했고, 다시 서울로 왔다는 이야기까지 며칠 전에 했었다.
아주 온 거냐는 질문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고, 그날이 오늘이었다. 조금 일찍 나가 학원에 들러서 가르쳤던 아이들도 보고, 함께 지냈던 선생님들도 볼 생각이다.
“선우 씨도 약속 있고 하니, 나도 시장에 다녀와야겠네.”
장 여사는 장도 볼 겸 청량리 재래시장에 있는 고모님을 뵈러 가야겠다는 말을 했다. 선우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별채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며 장 여사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결혼을 하며 우 대표의 친정 살림 도와주던 일을 그만두었던 것. 아이를 사산했던 것.
그 뒤로 임신이 안 되었던 것. 결국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을 하고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걸 우현희 대표가 다시 불러들인 것.
“눈이 많이 온다는데, 아직은 잠잠하네.”
마지막 커다란 별 모양의 오너먼트를 제일 위에 달고 난 뒤, 장 여사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낮게 내려온 회색 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 같은 날이다.
“우산 가져가고, 길 조심해요.”
“네.”
선우는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단조로웠던 거실에 커다란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 * *
선우는 두 손 가득 도넛과 커피를 들고 학원 문을 열었다. 교무실로 쓰는 사무실로 들어가는 동안 발레복을 입은 꼬마 아이들이 총총 지나가는데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왔어? 드디어 얼굴 보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정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선우를 반겼다. 옆에 있던 다른 강사들도 모여들어 인사를 했다.
“심 쌤은 결혼한다고 그만두셨어요. 남편분 따라서 부산으로 간다고. 오 쌤은 유치부 차량 운행 나가셨고요.”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뒤, 선우와 은정은 학원 앞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이고, 배고프다.”
은정이 테이블 앞의 의자에 풀썩 앉았다. 직원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펼치면서 선우에게 물었다.
“서울엔 언제 왔어. 어떻게 지냈던 거야. 나 몰래 다른 학원 취직하고 그런 거 아니야?”
“얼마 전에 왔어요.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아, 그 사정이 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여러 번 고민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발레단을 그만두며 친구나 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은 친구들도 민우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경찰서로, 클럽으로 뛰어다니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정과 아현은 마지막까지 선우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속여서 거리를 두려면 얼마든 그럴 수 있겠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임신을 했어요.”
쿨럭. 사레가 들린 은정이 기침을 했다. 한참 쿨럭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우에게 물었다.
“너, 남친 있었어?”
“그게……. 아뇨. 잠깐 만났던 사람인데 헤어졌고, 아이 가진 건 늦게 알았어요. 그런데 낳으려고요.”
쿨럭. 쿨럭. 은정이 다시 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싱글맘이 되겠다 그거지?”
“네.”
“음……. 그래. 용기 있는 결정했네. 넌 잘할 거야. 축하한다.”
간단한 축하의 말에 선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은정이 뭘 이런 걸로 우는 거냐며 티슈를 건네주었다.
“내가 니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미 결심한 거잖아. 오늘 내가 축하 턱으로 쏠게. 제일 비싼 거 먹어.”
“입덧이 심해서 많이 못 먹어요.”
“아주 골고루 한다. 그럴 거면 저녁 먹자고는 왜 했어.”
“선배는 먹을 게 있어야 마음이 넉넉해지니까.”
은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선우도 웃었다. 피자와 샐러드를 시켜, 대부분은 은정이 먹고 선우는 샐러드를 주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간중간 배가 싸르르 아프기는 했지만 익숙한 느낌의 아픔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한 뒤, 식당을 나왔다. 어두워진 하늘에 눈발이 제법 날리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가니?”
“네. 잠깐 건너편 서점에 들렀다가 가려고요.”
초음파 사진이 많아지며 수첩에 붙이는 것도 한계가 생겼다. 학원 건너편의 문구를 겸한 서점에서 작은 앨범을 사서 사진만 따로 모을 생각이다.
“눈 많이 온다더라. 그 전에 얼른 들어가.”
“네. 선배, 그럼 들어가요.”
“응. 너도 잘 들어가. 또 연락하고.”
“네.”
신호등이 켜져, 손을 흔들며 길을 건넜을 때였다. 아래에 무언가 묻어나는 기분에 선우는 숨을 멈추었다.
많지 않은 양이지만 분명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서점으로 들어간 선우는 화장실부터 찾았다. 갈색 피가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 속옷에 묻어 있었다.
침착해.
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별일 아닐 거야.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산부인과로 전화를 걸었다.
“네, 병원이죠? 상담드릴 게 있는데요. 네. 이선우예요.”
일단은 병원으로 오라는 안내를 받고, 전화를 끊었다. 장 여사님이 시장에 다녀왔을까. 선우는 장 여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 네, 선우 씨.
“여사님, 지금 어디세요?”
— 나 아직 청량린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 별일은 아니고요.”
불안한 마음을 미리 가질 필요는 없었다. 선우는 숨을 깊이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갈색 피가 조금 나왔는데, 병원에선 초기에 그럴 수 있대요. 그래도 병원 다녀오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들렀다가 가려고요.”
— 피가 많이 났어요?
“아니에요. 조금 묻은 수준이에요. 간호사 선생님도 괜찮을 거라 말했고요. 얼른 갔다가 들어갈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장 여사가 잠시 망설였다.
— 그래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요.
“네.”
전화를 끊은 선우는 바로 길로 내려와 택시를 잡았다. 임신 초기에 있을 수 있는 증상이라고 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