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22화 (122/168)

122. 같잖은 자존심

“우선 아기가 잘 있는지부터 볼까요?”

선우에게 간단한 질문을 한 뒤, 지난 병원에서 받았던 산모 수첩을 훑어본 의사가 말을 했다.

간호사가 선우를 안쪽으로 안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가 다 되었다고 의사에게 알렸다.

“아빠도 이쪽으로 오세요.”

문도는 어두컴컴한 진료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초음파 진료를 위해 자리에 비스듬히 누운 선우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차가워요.”

의사가 선우의 배에 젤을 바르며 말했다. 이어 탐촉기를 문지르자 화면에 희고 검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기는 잘 있네요. 10주 2일 되었고. 여기가 머리. 팔하고 손도 보이고요. 이쪽에 움직이는 게 다리. 아빠 잘 보이시죠?”

자그마한 태아의 모습이 보였다. 손과 팔, 발과 발가락처럼 보이는 것까지 선명히 보이는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목을 치고 올랐다. 문도는 힘주어 침을 넘긴 뒤 대답을 했다.

“네, 잘 보입니다.”

이선우와 그의 아이.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존재가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다.

“심장 소리도 들어 볼까요.”

곧이어 쿠궁, 쿠궁, 쿠궁, 세찬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아이가 꼬물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가는 팔과 다리를 뻗으며 기지개를 켜듯 쭉 몸을 폈다.

“꼭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것 같네요.”

그 말에 선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녕, 작게 말하며 손가락을 펴 아이에게 인사를 한다. 화면 속 아이를 애틋한 눈으로 보면서 가늘게 손을 떨고 있는 이선우의 입가에 고운 미소가 걸렸다.

저런 여자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했다. 빼앗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그러니 닿는 것도 끔찍하겠지.

“사진은 나가는 길에 받으면 되고, 다시 자리로 갈까요?”

의사와 문도가 먼저 진료실로 돌아오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선우가 조금 늦게 의자에 앉았다. 의사는 컴퓨터에 몇 가지를 기록하며 선우에게 말했다.

“불편하거나 힘든 점, 아니면 궁금한 거 있으세요?”

그 말에 선우가 잠깐 문도를 보았다. 그의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꺼려지는 듯 보였지만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은 없었다. 아이에 대한 것도, 선우에 대한 것도 전부 알아 둬야 하니까.

“저…….”

망설이던 선우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며 의사에게 물었다.

“배가 계속 아픈데요. 뻐근한 통증이 심했다가 괜찮아졌다가 그러거든요. 인터넷에 보니까 자궁이 늘어나서 그런 거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요.”

“맞아요. 자궁 근육이랑 인대가 늘어나느라 그런 거예요. 너무 걱정은 말아요. 혹시 쥐어짜듯이 아프면 병원으로 바로 오고요. ”

“네.”

잠깐 쉬었다가 선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꿈을 많이 꾸는데, 안 좋은 꿈이 너무 생생해요.”

“호르몬 때문에 그래요. 악몽 꾸시는 분들 많은데 정상이에요. 또 궁금한 거 있어요?”

“제가…….”

선우가 입술을 맞다물며 망설이다가 의사에게 물었다.

“아이 가진 줄 모르고 수면유도제를 먹었거든요. 전에 병원에 갔을 땐 경황이 없어서 여쭤보질 못했어요.”

“얼마나요.”

“아론정인데, 두 달 조금 안 되게 먹었어요.”

작게 줄어드는 목소리를 들으며 문도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지난 두 달의 이선우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팠었고, 잠을 자기 위해 수면유도제를 먹었다. 안 좋은 꿈을 꾸었으며, 배가 계속 아팠었다.

그의 짓이었다.

“괜찮아요. 임산부에게 처방해도 되는 등급이니까 걱정 말아요.”

“아, 정말요?”

“지금도 먹고 있나요?”

“아니요. 지금은 그냥도 잘 자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선우가 대답을 했다. 2주 뒤 기형아 검사로 예약일을 잡고 나서 진료가 끝났고, 선우와 문도는 진료실을 나왔다.

“수납은 저쪽에 있는 스테이션에서 하시면 돼요. 예약일도 그때 말씀해 주시면 되고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수납과 접수를 하는 스테이션 앞으로 갔다. 선우의 이름이 불려 문도가 앞으로 나서는데 선우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말을 했다.

“바우처 카드 있어요.”

문도는 선우가 수납을 하고 다음 진료일을 예약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진 건 돈뿐인데 그마저도 바우처가 대신하고 있으니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평생을 통틀어 오늘처럼 쓸모없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1층으로 내려와 주차장으로 연결된 별관으로 가려는데, 선우가 걸음을 멈추며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럼 들어가세요. 쇼핑백은 저 주시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가늘게 눈을 떴더니 선우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 들어가 보셔야 하잖아요.”

“내가 그렇게까지 개새끼는 아니야.”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길바닥에 버려두고 회사로 돌아갈 거라 생각을 했나. 어이가 없는데 선우가 그를 보며 말했다.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이깟 게 무슨 신세.”

“제 입장에선 그래요.”

맑은 눈동자가 문도를 향했다. 명확하게 금을 긋는 것같이 곧은 시선이었다. 이럴 때 문도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네가 아니라 아이 때문에 하는 일이야.”

“아이 때문에 별채에서 지내고, 아이 때문에 아주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들도 먹고 있어요. 좋은 병원에 좋은 의사 선생님께도 왔고요. 그거면 충분해요.”

그 이상 더는 받지 않겠다고 선우가 말하고 있었다. 몸도 꼴랑 한 줌밖에 안 되면서 혼자 어디를 가겠다고.

돌아다니다가 감기라도 들면. 가다가 갑자기 배라도 아프면.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사방이 위험인데 어디를 가겠다는 건지.

“됐어. 타고 가.”

“싫어요.”

싫어요. 그 말이 대체 몇 번째인지. 어차피 끌려 왔으면 해 주는 대로 받아먹고 편히 지내다가 아이를 낳으면 될 일 아닌가.

반항이랍시고 하는 게 게스트룸을 쓰고 택시를 타고 병원에 혼자 오는 거, 고작 그 정도면서 되지도 않는 고집이었다.

“그럼 위험 감수하고 걸어 다니게 둬? 어떤 놈들이 거쳐 갔는지도 모를 숙소에 처박아 둘까? 먹고 죄다 토하게 내버려 둬?”

“네. 그냥 그렇게 두세요.”

씨발, 진짜 고집하곤.

“그러다 아이 잘못되면.”

“그럼 전무님께는 잘된 거겠죠.”

아이가 죽기를 바라는 아비. 스스로가 자처했음에도 가슴이 움푹 패는 느낌이다. 이선우의 목소리가 담담해서 더 그랬다.

말없이 응시하는데 선우가 그가 쥐고 있는 쇼핑백을 가져가려는 듯 팔을 뻗었다. 문도는 쇼핑백을 다른 손으로 옮기며 선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두 번 말 안 해. 타. 데려다줄 테니까.”

“싫어…….”

뿌리치려는 이선우에게 문도가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애 얼굴도 못 보고 살게 해 줄까?”

끌려오는 선우의 얼굴이 참담히 구겨졌다.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한 지는 오래였다. 이제 와 새삼 착한 아빠 노릇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놔요. 내가 갈 거니까.”

선우는 손목을 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세게 잡힌 것도 아닌데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비틀면 쥐고 다시 비틀면 또다시 움켜쥐며 문도가 걸었다.

문도는 차 문을 열고 선우를 우겨 넣은 뒤, 벨트를 쭉 당겨 달칵 소리가 나도록 버클에 끼웠다.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선우를 보며 말했다.

“싫어도 하고, 역겨워도 참아. 같잖은 자존심 세우지 말고. 낳겠다고 우긴 건 너니까.”

이미 개새끼라면, 더한 개새끼가 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문도는 시동을 걸었다. 엉망으로 끝난 첫 번째 진료였다.

* * *

별채로 돌아온 선우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임신 출산에 관한 책을 꺼내고 초보 손뜨개 책도 꺼냈다. 실 꾸러미와 바늘까지 꺼내다가 입술을 깨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 집에서 해 주는 편의들을 당연히 누려서는 안 되는 거라고 생각을 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그건 무너뜨리면 안 되는 원칙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같잖은 자존심.

사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그깟 차 얻어 타도 되었고, 임신 기간 동안 기사님 딸린 차를 타도 되었다. 고작 그 정도를 편하게 누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이전의 삶이 낯설 정도로 불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장 여사나 우 대표 같은 사람이 건넨 호의였다면 감사하다 말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남자에게도 마음 없이 그렇게 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었다. 한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

해 주는 거 다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고 던져 버리고 싶고, 굳어지는 얼굴에 심한 말을 하고 싶었다. 화가 나게 만들고도 싶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선우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눌러도 서문도를 마주하면 삐거덕거리는 마음이 튀어나왔다. 여러 번 숨을 쉬어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한 뒤, 선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가는 동안 창 너머 정원을 보았다. 반 정도 열려 있는 커튼으로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이 보였다. 바람이 세게 불자 마른 가지가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 어, 그래. 선우야.

“이모. 잘 지내셨죠?”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어 인사를 했다. 제주도에 간다고 한 뒤로 연락을 하지 못했었다. 내일은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오늘이 되었다.

— 응 우린 잘 지내지. 너는 어때?

“저도 잘 지내요. 이모, 저 여기서 두 달 정도 있으려고요.”

언젠가는 이모에게 서울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말을 해야겠지만,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서문도와 서도 그룹까지 얽혀 있는 이야기를 하기엔 선우도 마음이 지쳐 있었기에.

— 어디에 있든 건강이 최고야.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알았지?

“네.”

— 목소리가 좋아서 다행이다.

미숙의 목소리도 밝았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선우는 핸드폰을 다잡았다.

“오늘 병원에 다녀왔어요.”

— 아, 그래?

“아기는 건강하대요.”

— 그래. 그럼 됐어. 너 건강하고 아이 건강하면 됐어.

“초음파 사진도 받았는데, 이따 보내 드릴게요.”

이모 옆에 있었으면 병원도 같이 가고, 초음파 사진도 같이 봤을 텐데. 마치 인사를 하듯 손을 뻗었던 아이 이야기를 도란도란했을 텐데. 이렇게 예쁜 아이를 본 적 있냐고, 나도 다른 엄마들처럼 웃으며 자랑했을 텐데.

밝게 웃으며 전화를 하려 했는데 괜히 목이 메어 왔다. 선우는 후, 다시 숨을 내쉬고 힘을 내서 말했다.

“이모, 이제 밥 먹으러 가려고요.”

— 응. 그래, 잘 지내고 또 연락해.

“네. 들어가세요.”

선우는 전화를 끊고 창밖을 오래 보았다. 회색빛으로 낮게 가라앉은 하늘이 꼭 자신의 마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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