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첫 진료
며칠이 흘렀다. 그사이 별채의 모든 창문에는 전자동 블라인드가 달렸다. 2층의 수리는 하지 않았지만, 선우가 쓰기로 한 게스트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제 다 됐네.”
장 여사가 뿌듯한 얼굴로 게스트룸을 둘러보았다.
“선우 씨랑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어때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네.”
“부담스러워요.”
첫날은 침대와 옷장이, 둘째 날엔 화장대와 스툴이 딸린 1인용 소파가 들어왔다. 폭닥한 구스 이불이 침대에 덮였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는 도톰한 카펫도 깔렸다.
커다란 창에는 블라인드 대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커튼이 달렸고, 오늘 아침엔 아이의 침대가 들어왔다. 우아한 모양의 스탠드 조명과 따스한 느낌의 그림까지.
인테리어 잡지에 실려도 될 것 같은 내추럴한 분위기의 엄마와 아기방은 그렇게 3일 만에 완성이 되었다.
“부담 가질 거 없어요. 전무님이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드르륵드르륵 블라인드를 다는 소음에, 수시로 가구를 들고 들어오는 직원들까지. 정말 딱 2층 수리만 안 했지 하고 싶은 건 다 해 버린 사람이 서문도였다.
화병에 꽂을 꽃까지 배달이 왔을 땐 정말 왜 이러나 싶었다. 말뜻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2층 수리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건, 아무것도 해 줄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한 건데.
“원래는 2층에 올리려고 고른 거라 사이즈들이 크긴 한데, 그래도 쓰기엔 나쁘지 않겠어요. 전무님이 까다롭게 굴었다는데, 실장님이 잘 맞췄나 봐요.”
선우는 무슨 소린지 몰라 멀뚱히 장 여사를 바라보았다.
“인테리어 봐주시는 실장님이 있거든. 원래 그런 쪽으론 까다롭게 구는 일이 없는데 시안 올린 걸 두 번이나 퇴짜를 놨다고 하더라구.”
부담에 부담이 더해지는 말이었다. 무언가를 받는 게 불편하고 염치없다고 했더니 더 불편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정말 이럴 필요 없는데요.”
선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요.”
장 여사가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정돈하며 말했다.
“성격이 원래 청개구리야. 하지 말라면 더 하는데, 내버려 두면 알아서 수그러들어요.”
선우가 입술을 깨물자 장 여사가 방을 쭉 둘러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해 주고 싶었나 보네. 방만 봐도 딱 선우 씨 방처럼 보여요.”
아니다. 자신은 살면서 한 번도 이런 방을 가져 본 일 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공들여 만든 것 같은 원목의 가구도, 곳곳에 놓인 여성스러운 소품도 선우가 가져 봤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방은 그저 부담스럽게 만들려고 억지로 떠안긴, 남자 멋대로 생각한 이선우의 방일 뿐이다.
“만둣국 먹고 싶댔죠?”
“네.”
“금방 차려 줄게요.”
그제부터 계속 따끈한 국물에 끓인 칼칼한 김치만두가 생각나 망설이다가 아침에 장 여사에게 말을 했었다. 모처럼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 준비되는 대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는데 건너가서 바로 만들었나 보다.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전하는 선우를 보며 장 여사가 빙그레 웃더니 방을 나서며 말했다.
“아기가 아빠 입맛을 닮았나 봐.”
마주 웃어 주기엔 속상한 말이라 선우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입맛이 바뀐 것 같긴 했다. 만둣국만 해도 그랬다. 외할머니가 해 줄 때 맛있게 먹긴 했지만, 먹고 싶어서 눈에 어른거릴 정도로 간절했던 음식이 아닌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뿐일까.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도, 선우가 잘 먹었던 음식도 속이 뒤집혔는데 장 여사가 해 주는 음식들은 그나마 넘길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편하게 잘 먹을 수 있는 건 우현희 대표가 입덧할 때 먹었다는 음식들이었다.
“선우 씨는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따라 나오는 선우에게 장 여사가 물었다.
“둘 다 좋아요. 그냥 건강하게만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누가 됐든 선우 씨 닮았으면 좋겠네.”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이었다. 외로운 선우의 마음을 헤아려 주려는 마음 씀씀이를 느낄 때마다 아이도 이런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에 병원 가야죠?”
맑게 끓인 만둣국을 선우의 앞에 내려 주며 장 여사가 물었다.
“네.”
선우는 대답을 하고 국물을 한술 떴다. 따뜻한 국물로 입을 적신 뒤, 통통하게 빚은 만두를 반으로 갈라 입에 넣었다. 장 여사가 눈을 반짝이며 선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때, 괜찮아?”
“네. 맛있어요.”
선우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생각했던 맛은 아니지만 먹기 힘들지는 않았다. 따뜻한 국물로 속을 채워 가면서 만두 두어 개를 더 먹은 뒤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만 먹게?”
“많이 먹었어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부회장님이 입덧을 3개월 정도 하고 그쳤다는데, 선우 씨도 그랬으면 좋겠네.”
“그러셨대요? 저도 얼른 끝났으면 좋겠어요.”
웃으며 대답하면서 선우는 아쉬움을 삼켰다. 머릿속에는 먹고 싶었던 만둣국의 맛이 선명했다.
맑은 국물. 양지를 찢어 무친 고명. 투박한 만두피에 슴슴하고 깔끔한 맛. 딱 한 번 먹었던 그 맛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다음에 외출을 하게 되면 나가서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선우는 장 여사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첫 진료를 예약해 둔 시간은 4시 반이었다, 문도는 3시 반을 조금 넘겨 별채에 도착을 했다.
별채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주방에도, 다이닝룸에도, 거실에도 선우가 없어서 게스트룸의 문을 두드렸다. 불러도 나오지 않아 문을 열었더니 아무도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2층까지 훑었다. 텅 빈 집을 샅샅이 돌아보고서야 이선우가 없다는 걸 알고 본관에 인터폰을 했다.
“이선우는요?”
— 먼저 나갔어요.
장 여사가 대답을 했다.
“진료 시간 아직 멀었는데, 어디를.”
— 서점도 가고 쇼핑도 한다더라고요. 핸드폰도 다시 사야 한다고 하고.
“기사님은 어느 분이 따라갔어요?”
당연히 차를 태워 보냈겠거니 하는 마음에 물었다. 기차역에 핸드폰을 버려 버린 이선우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기사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야 했다.
— 택시 타고 갔어요.
순간 머리가 띵했다. 문도는 수화기를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임신한 여자를, 핸드폰도 없는 사람을 기사도 없이 혼자 내보냈다고요.”
생각이 있는가. 거기다 불과 며칠 전에 전부 다 버려 가며 도망을 쳤던 여자였다. 있어 줄 것처럼 굴어 놓고 숨어 버리면 그땐 어쩌려고.
문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 여사가 태평하게 대답을 했다.
— 나야 김 기사님이랑 같이 가라 했지. 본인이 그럴 필요 없다고 극구 사양하는데 어쩌겠어요. 여기저기 들르려면 택시가 편할 것 같기도 하고.
“여사님.”
일부러 이러는 거지. 짜증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병원 같이 가겠다고 했던 것 들으셔 놓고.”
— 아니 나는 병원으로 바로 가실 줄 알았지. 집에 들를 줄 알았나요. 그나저나 진료 시간 늦지 않으려면 출발하셔야 할 거 같은데.
문도는 한숨을 삼키며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혹시나 늦을까 싶어 칼같이 회의를 끝내고,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집으로 왔는데 먼저 나갔다고.
— 선우 씨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병원으로 잘 갈 거니까 걱정 말고 출발하세요.
“누가 걱정을.”
해요, 라는 말을 잇기도 전에 인터폰이 뚝 끊겼다. 문도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후, 숨을 쉬어 삭힌 뒤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지하 3층에서 올라온 문도는 별관 1층의 소아청소년과와 약국을 지나 중앙에 있는 뜰로 향했다.
3층, 산부인과.
본관 로비의 안내 팻말을 따라 문도는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넓은 홀이 보였다. 대기석이 촘촘히 있고, 자리마다 산모들이 앉아 있었다.
넓은 홀 가운데에 선 문도는 빙 둘러보며 이선우를 찾았다. 남편과 함께, 아이와 함께 앉아 있는 산모들을 눈으로 훑는데 어디에도 선우는 없었다.
한숨을 삼킨 문도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선우가 핸드폰을 새로 사겠다며 나갔다고 했으니 전에 썼던 번호를 그대로 살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갔다.
— 네.
선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도망간 건 아니었네.
“어디야.”
— 진료실 앞에 있어요.
“어디 진료실.”
— 강순희 원장님 진료실 앞이요.
문도는 뒤를 돌아 눈을 가늘게 떴다. 스테이션 옆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가 있고, 그 뒤로 진료실 팻말이 보였다.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뚜벅뚜벅 걸었다. 서너 개의 진료실을 지나자 복도 끝에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무릎에 쇼핑백을 올려놓은 선우는 대기석의 끝에 홀로 앉아 있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다들 남편과 사이좋게 앉아 있는 와중에 혼자 외따로 앉은 모습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뚜벅뚜벅 걸어 앞으로 가니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선우의 말간 얼굴을 보는데 문도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화는 나는데 그보다 걱정이 앞섰고, 그 걱정보다는 힘껏 안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말도 없이 왜 먼저 나왔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불안하고 초조하니 나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빈 주먹만 움켜쥔 문도는 말없이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우가 닿을 듯 말 듯한 몸을 떼며 살짝 옆으로 이동을 했다. 스치는 것도 못 참을 정도로 내가 싫은 거냐는 말이 차오르는 걸 꾹 눌러 삼키며 선우에게 말했다.
“다음부턴 먼저 연락을 해.”
그 말에 선우가 고개를 돌려 문도를 보았다. 부채처럼 펼쳐진 긴 속눈썹과 말간 눈동자가 선명히 보였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가까워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바쁘시잖아요.”
대답을 하는 이선우의 옆모습이 가슴 저미게 예뻤다.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곡선과 그 아래 도톰한 입술이. 부드럽게 번지는 살냄새와 말간 뺨이.
개 같네.
물색없이 치솟는 열망이 개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선우를 숨도 못 쉴 정도로 바짝 안고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었고, 눈을 감고서 체취를 깊이 마시고 싶었다. 문도가 마른침과 함께 욕 나오는 열망을 삼킬 때였다.
“이선우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부름에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진료실을 향해 걷는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문도는 선우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낚아채 성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