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20화 (120/168)

120. 다 싫다고 @AW

점심을 먹던 이선우가 화장실로 향했다. 그가 다이닝룸에 내려온 직후였다. 따라가려는 문도를 장 여사가 잡았다. 그리고 대신 선우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리며 쓸어 주었다.

“여사님, 죄송해요. 으읍.”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명치를 움푹 패게 했다. 괴로운 듯 웅크리는 소리와 콜록이는 소리가 이어지며 문도의 귀를 아프게 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제법 먹었으니까. 입 헹구고 나와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 여사가 먼저 화장실에서 나왔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주방으로 향했다.

물소리가 멎고 눈이 빨갛게 충혈된 선우가 화장실을 나왔다. 물기가 남아 있는 얼굴이 말개서 붉어진 눈시울이 더 눈에 띄었다.

“여사님, 이제 괜찮아요.”

이선우는 원망의 눈빛도, 미움의 눈빛도 없이 유령처럼 그를 스쳐 지났다. 다시 다이닝룸으로 들어가 조용히 그릇을 개수대로 옮기고 장 여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잘 먹었습니다.”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먹고 싶은 건 잘 들어간다는데. 말만 해요.”

“없어요. 주시는 음식, 다 맛있어요.”

“아깐 잘 먹더니.”

“조금만 쉴게요. 쉬면 괜찮아질 거 같아요.”

투명인간이라도 된 건가.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왜 내려왔냐는 말도, 자리를 피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이선우는 먹던 음식을 고스란히 토해 내고 장 여사는 그걸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내가 원인인가.”

문도는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선우에게 말했다.

“사라져 주면 되나.”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보는 선우의 눈빛에 아무것도 없었다. 길을 가다 낯선 사람을 본다고 해도 이보다는 덜 건조할 것 같았다. 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그런 이선우라도 가져야겠다고 데려왔으니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여사님, 이선우 며칠 본관에서 지낼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월요일부터 2층 수리 들어가면 시끄러울 테니까.”

선우가 생활하기 편하도록 중문 안쪽의 공간을 아이와 선우의 전용으로 만들 생각이다. 아무래도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지내려면 독립된 공간이 좋을 테니까.

아래층 서유라가 쓰던 게스트룸을 문도의 서재로 바꾸고, 2층의 미디어룸과 그 옆의 서재를 그가 쓸 드레스룸과 침실로 바꾸는 공사를 하기로 했다.

자신만 보면 구토를 해 대니, 며칠간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야 어차피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니 공사의 소음과는 관계없을 터.

이선우를 며칠간 본관에 보내고 싹 새로 단장을 하면. 블라인드도 달고, 침실 인테리어도 이선우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새로 하고, 아기방도 새로 꾸미면. 그러다 보면 입덧도 조금은 진정이 되지 않을까.

“병원 예약은 언제죠?”

“강 원장님 스케줄 되시는 날로 잡았어요. 수요일 오후 4시예요.”

수요일 오후에는 팀장급 미팅이 있다. 점심에 시작해 3시 부근이면 끝나곤 했지만, 집에 들러 이선우를 태워 가기엔 빠듯할 수 있었다.

“가능하면 4시 반으로 조정해 주세요. 아니면 아예 오전으로 하거나.”

문도의 말에 장 여사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선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할 말이 많은 눈동자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전무님. 잠시 이야기를 했으면 해요.”

* * *

장 여사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선우는 거실의 커다란 소파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길게 들어온 햇살이 남자의 무릎에 닿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처음 명 실장의 안내를 받아 이 집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난다. 같은 자리에 앉아 문도는 고용 계약 서류를 들춰 보았고, 그녀는 긴장한 채로 앉아 무사히 통과하기를 기다렸었다.

햇빛을 가르며 거침없이 내려오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남자는 펜대를 세우고 물었다. 내일부터 괜찮죠, 라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을 떠올리다가 선우는 입을 열었다.

“2층 수리는 하지 마세요.”

왜? 라고 묻듯이 문도가 눈을 들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셨으면 해요. 전무님은 그대로 2층 쓰시고, 저는 전처럼 숙소동에서 지낼게요.”

우현희가 했던 이야기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를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을 거다. 그녀가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면, 이 집은 아이에게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었다.

그건 이선우라는 여자와 상관없는 아이의 권리였다. 그리고 선우는 아이가 누구보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넓고 넓은 집, 서문도와 마주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공간은 많으니.

“숙소동으로 가겠다고.”

고작 그 얘기를 하려 했냐는 듯, 문도가 입매를 비틀어 웃으면서 말했다.

“왜 숙소동으로 가려는데.”

그야 당연히.

“거기가 편하니까요.”

서문도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래도 견딜 만했으니까. 보기 싫은 사람이 피하는 게 맞지, 집주인에게 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너만 편한 거겠지. 직원들이 퍽이나 편하게 생각하겠네. 고용주 아이를 가진 여자가 입덧하고 있으면, 밥이나 제대로 먹겠어.”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를 비웃었다. 듣고 나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생각이 짧았네. 선우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네요. 그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럼 유라 씨 쓰던 게스트룸을 쓸게요.”

그 말에도 남자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2층에서 지내.”

“싫어요.”

“왜.”

“전무님 공간이니까요.”

은은히 배어 있는 청량한 향과 매끄러운 시트의 감촉. 창으로 보이는 풍경까지 모두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낯익은 공간이 주는 편안함도 싫었다. 그 공간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데 편안함에 익숙해질까 무서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거기 있으면 바보 같은 내 모습이 자꾸 보여요.”

선우는 담담히 말했다. 그 방에 있으면 숨죽여 서랍 하나하나를 열었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뿐이면 그래도 견딜만 할 텐데 남자의 품에 안겨 반짝이는 눈으로 웃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참 이상하지. 창녀 취급을 당했던 것도, 비참할 정도로 수그렸던 것도, 씻을 겨를도 없이 서랍을 뒤졌던 일도 꿈처럼 먼데 웃었던 순간들은 너무 선명했다.

장난 어린 눈길을 받으며 입맞춤을 했던 순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던 순간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서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모습도 보였다. 선우는 남은 말을 이었다.

“아이 낳을 때까지만 머물 건데,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럴 만한 자격도 없고요.”

“내 아이야. 자격 같은 거 따질 필요 없고.”

남자의 반박에 선우는 깊이 숨을 쉬었다. 왜 자꾸 고집을 피우는지 알 수 없었다.

“염치없는 사람 만들지 말아요. 게스트룸에서 지낼 거예요. 그리고.”

또 뭐가 있냐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는 문도에게 선우가 말했다.

“제게 반말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피식 웃었다.

“저는 이제 전무님 아랫사람이 아니에요. 예의를 갖추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만난 이후 남자는 계속 반말이었다. 잠자리를 하던 사이였을 때조차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던 사람이었다. 친밀한 순간에만 반말을 썼던 남자의 습관을 안다. 깍듯한 존댓말이 나왔을 땐 거리를 둘 때였다는 것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반말을 하는 남자가 싫었다. 이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거리 같은 거 집어치워 버린 듯 성큼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싫었다.

“할 말 다 했어?”

“아니요.”

“또 뭔데.”

“병원은 장 여사님과 다녀올 테니까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해요.”

아이를 원치 않는다 했지. 지우라 했었지. 그 말들이 뼈에 새긴 듯 욱신거렸다. 그런 남자와 아이와 관련된 것들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의 소중한 시간에 날 선 눈빛을 얹기는 싫었다.

“그러니까……. 내가 해 주는 것들이 싫고, 쓰던 공간도 쓰기 싫고, 병원도 같이 가기 싫다.”

“…….”

“다 싫다고.”

혼잣말처럼 말한 문도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목을 젖혀 천장을 보며 한숨처럼 웃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잠시 후 단단히 응축된 눈동자가 선우를 향했다.

“첫째, 2층 수리는 널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야. 둘째, 2층을 쓰라고 한 것도 아이를 낳았을 때 돌보기 좋은 공간이라 그런 거고. 셋째, 병원은 네가 오라 마라 할 권리가 없지. 가고 말고는 온전한 내 권리야. 예약일 잡히면 알려.”

누가 들으면 아이를 꽤나 위하는 사람인 줄 알겠다.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린 뒤 따르라 말하는 오만함이 불편했다. 선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 마음이 불편한데 아기가 편할 리 없잖아요. 억지로 여기까지 왔어요. 아이 낳을 때까지 여기서 지내기로 한 약속은 지킬 거니까, 다른 건 간섭하지 마세요.”

문도가 선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선우 역시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늘한 공기가 거실을 맴돌았다.

“병원은 타협 못 해.”

문도가 말했다. 선우는 그쯤에서 타협을 하기로 했다. 아빠가 갖는 권리라는 말을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쁜 사람이니 어차피 한두 번 시늉이나 하다 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왜 말이 계속 짧은 건지.

“반말은.”

“싫어.”

선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도가 말했다. 그러더니 소파에 등을 기대며 뻔뻔한 표정으로 선우를 본다.

“억울하면 너도 반말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선우는 어이가 없었다.

“싫습니다.”

“그럼 나도 싫어.”

선우는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건조한 듯한 남자의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이 없다. 당신은 항상 뭐가 그렇게 당당할까.

이런 게 싫었다. 평온하려고 애써도 남자와 마주하다 보면 결국 속이 뒤틀리는 게. 마음이 긁히는 게. 그래서 똑같이 긁어 주고 싶어지는 게 싫었다.

물리적인 거리를 멀리할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멀리 두고 싶은 마음뿐이다. 안전한 거리를 지키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로 지내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더 이상 남자에게 화를 내고 싶지도, 마음을 다치고 싶지도 않다. 바라는 건 그저 조용히 지내다가 아이를 건강히 낳는 것. 그 아이를 절반이라도 키울 수 있게 되는 것.

“편한 대로 하세요. 어차피 이야기 나눌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식 웃는 남자의 모습이 어쩐지 공허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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