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19화 (119/168)

119. 최선이 될 일

서문도가 말없이 자리를 떴다. 거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시야의 끝에 걸렸지만 선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이건 못 먹겠네.”

장 여사가 국을 치우며 말했다. 선우는 장 여사의 팔을 잡았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속이 편해지는 음식은 오랜만이었다. 순하고 따뜻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자꾸 먹는 연습도 해야 할 것 같아 선우는 장 여사에게 한 그릇을 더 달라고 부탁했다.

“괜찮은가 보네.”

“네. 그런 것 같아요.”

선우는 맑고 연하게 끓인 된장국 한 그릇을 천천히 다 먹었다. 끝에 살짝 칼칼한 맛이 도는 것도 좋았다.

“다행이네.”

장 여사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냄비째로 냉장고에 넣어 둘 테니 먹고 싶어지면 데워 먹으라는 말도 했다. 선우는 빈 그릇을 치워 주는 장 여사를 불렀다.

“여사님.”

“네.”

“숙소동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난감하기만 했다. 전에는 친척 어른이 위중하셔서 급히 나가게 되었다고 장 여사가 둘러대 주었다지만, 돌아온 이유는 어찌 말을 해야 할지.

지내다 보면 배가 불러 오는 것도 볼 테고, 아이 아버지가 서문도라는 것도 알게 될 텐데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잠시 아이를 낳으러 왔다는 말을 하기도 난감했다.

“옥수댁은 딸이 쌍둥이를 낳아서 거기 가 본다고 그만뒀고, 양 여사랑 미옥 씨는 아직 있긴 한데.”

“아주머니들도 제가 민우 누나라는 걸 알고 계실까요?”

“몰라요. 굳이 알릴 필요 없고. 일단은 내가 부회장님과 상의를…….”

해 보겠다고 장 여사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무슨 상의를 해요?”

우현희가 주방의 뒷문을 열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선우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장 여사가 우현희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선우 씨 데리고 건너가려 했는데, 뭐 하러 건너오셨어요.”

“아무나 움직이면 어때서요. 경황없을 사람한테 오라 가라 하고 싶지도 않고. 잠깐 선우 씨랑 이야기 좀 할게요.”

장 여사가 물기 묻은 손을 타월로 닦고는 뒷문으로 나갔다. 커다란 다이닝룸에 우현희와 둘이 남게 된 선우는 애꿎은 티셔츠 자락만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안녕하셨냐고 해야 할지, 잘 지내셨냐고 해야 할지 인사말을 마땅히 찾을 수 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선우에게 우현희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인사를 할 수가 없네요. 커피는 좀 그렇고, 마실 수 있는 차 있어요?”

“아……. 네. 다 괜찮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우현희가 직접 물을 올렸다. 머그잔을 꺼내 티백을 넣고 물을 부어 선우의 앞에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둥굴레차예요.”

“감사합니다.”

차를 받은 선우는 예의상 한 모금을 마셨다. 구수한 냄새가 나는 차는 선우의 속을 뒤집지 않고 아래로 따뜻하게 내려갔다. 우현희가 차를 마시는 선우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담담히 말했다.

“아이 가졌다고 들었어요.”

“……네.”

대답을 하는데 선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선우는 우현희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잘 알았다. 이민우의 누나. 서유라의 트레이너. 서문도와 잠자리를 했다가 쫓겨난 직원. 아이를 가져 붙잡혀 온 여자.

“당분간 별채에서 지내기로 했다고요.”

남자가 어떤 식으로 우 대표에게 말을 했는지 선우는 알지 못했다. 아이를 가진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부끄럽고 염치가 없었다. 여기 머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여자가 된 기분이라서.

그래도 선우는 고개를 들어 우현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무엇이라도 잡아 봐야 했다.

“네. 그래서 염치없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해 봐요.”

슈트를 입은 깔끔한 모습의 우현희는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곧은 눈빛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선우는 주먹을 꾹 쥐고 숨을 깊이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이를 빌미로 뭔가 요구할 생각, 전혀 없습니다. 전무님과 다시 마주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우현희가 계속하라는 듯 선우를 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는…….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선우는 어쩌면 우현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걸어 보았다.

“낳아서 키우기를 원했지만, 전무님과는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알리지 않았어요. 전무님은 원치 않으니 지우라는…….”

차마 이어지지 않는 단어에 선우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지우라 했지만, 저는 지울 수 없어요. 그렇다고 아이를 뺏기고 싶지도 않아요.”

자라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면 여기 있으라고 했었지.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죄를 지은 죄인마냥 이 집을 드나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낳은 생때같은 아이를, 아이의 존재를 달가워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맡겨 두고서 드문드문 얼굴이나 보며 살아야 하는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었다.

“아시겠지만 저는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동생도 유라 씨 일로 죽었어요. 아이는 제게 유일한 희망이에요. 전무님 입장에선 곤란하신 것도 알고, 절 믿지 못하실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아이의 존재를 원치 않으신 것도 이해하고요.”

선우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서문도는 그녀의 말들이 전부 거짓이라 치부하겠지만,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다를 수 있으니.

“약속드릴게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제 아이로만 키울게요. 아빠에 대해 절대로 모르게 할게요. 각서를 써도 좋고, 공증을 받아도 되고요. 필요한 일은 전부 하겠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선우는 간절한 마음으로 우현희에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대표님.”

침묵이 흘렀다. 선우는 마음을 졸이며 우현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흐음, 가볍게 한숨을 내쉰 우현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오해를 풀죠. 아이를 지우게 할 생각 없어요. 선우 씨에게서 빼앗을 생각도 없고요.”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문도 생각까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우 씨 혼자 아이를 키우게 할 수는 없어요.”

흔들리는 선우의 눈동자를 보며 우현희는 말을 이었다.

“아이를 낳고 말고는 선우 씨의 온전한 선택이 될 거고, 낳겠다고 결정했다면 우리도 그 아이를 함께 양육할 의무와 권리가 있어요. 서로를 배려해 가면서 충분히 이성적으로 같이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라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선우에게 우현희가 말했다.

“아이가 버젓이 존재하는 아빠를 모르고 자라는 게 좋은 일일까요? 선우 씨만 아이를 사랑할 거라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건…….”

“아이는 양가의 사랑을 골고루 받을 권리가 있어요. 그런 아이에게 아빠를 빼앗고 할머니를 빼앗는 건 선우 씨 욕심으로 보여요. 그게 아이에게도 최선일까요?”

선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마음이 쿡쿡 찔려 왔다.

“문도는 시간이 좀 필요할 거예요. 선우 씨도 그래 보이고. 사실 제일 중요한 건 아이를 잘 키우는 건데, 내 눈엔 두 사람 모두 너무 감정적으로 보여요. 아이를 키울 준비도 안 되어 있는 것 같고.”

정말로 최선이었을까. 정말 전부 내 욕심인가. 우현희의 말을 듣는 선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선은 여기 머물렀으면 해요. 혼자 몸으로 힘들게 버티지 말고,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받아요. 지내면서 아이는 어떻게 키울지 서로 이야기도 해 보고. 마음을 바꾸고 보면 여기처럼 선우 씨에게 힘이 되는 곳도 없어요. 차분히 생각해 봐요.”

선우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늘 이모 옆에 살면서 세종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상상만 해 왔었다. 아이의 아빠나 할머니, 이 집에 대해선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다. 당연히 혼자서 다 해내려 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일단 직원들에게는 약혼한 사이라고 해 둘 겁니다. 그게 제일 깔끔할 테니 그건 선우 씨가 이해해 줘요. 크게 말 나오지 않을 거니까 걱정은 말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현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우현희가 뒤를 돌아 선우를 보며 말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선우는 우현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선우 씨 부모님이라면 마음 아프겠지만 그래도 참 자랑스러울 것 같아. 동생이 참 좋은 누나를 뒀어요.”

울컥 마음이 솟아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에 눈물이 고이려 했다.

“아니에요.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력을 속여 이 집에 들어온 것. 남자를 유혹해 거짓된 사랑을 속삭인 것. 속는 줄도 모르고 밤을 같이 보냈던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가만히 있는 게 나았을 거였다. 별채로 들어오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남자는 서유라와 최지상의 사진을 풀고, 민우의 목소리를 세상에 뿌렸을 텐데.

오랜 시간 발버둥을 치고 얻은 건, 서문도가 버리듯이 던져 준 민우의 핸드폰뿐이었다. 그것도 내어 주었기 때문에 가져갈 수 있었던 거였다. 서랍을 뒤지고 진열장을 뒤졌던 건 전부 헛된 노력이었다.

“아니. 전부 다 선우 씨가 한 일이에요. 내 말은 믿어도 좋아요.”

우현희가 선우의 등에 손을 가볍게 대었다가 떼며 말했다. 그 단순한 동작이 선우의 마음에 닿는다. 눈시울이 붉어진 선우는 간신히 대답을 했다.

“감사합니다.”

우현희가 나간 뒤 선우는 다시 식탁에 앉았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고 아직까지 따뜻한 둥굴레차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아이를 지우게 할 생각 없어요. 선우 씨에게서 빼앗을 생각도 없고요.’

우현희라는 사람을 믿고 싶었다. 그 어떤 위협도, 협박도 없이 같이 아이를 키우게 될 거라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아이에게 최선이 될 일.

선우는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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