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18화 (118/168)

118. 외면의 시작

새벽 동이 아직 트지 않은 시간, 문도는 본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고 긴 복도의 안쪽, 주방의 불빛만이 밖으로 번져 나오고 있었다.

똑똑.

문도는 벽을 두드려 인기척을 냈다. 쌀을 씻던 장 여사가 그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문도는 주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벌써 건너오셨어요? 오늘 일찍 가 보셔야 하는 일 있으셨나?”

장 여사가 걸어 놓은 티타월에 손을 급히 닦았다. 주방 벽 한편에 붙어 있는 커다란 보드에는 출장이나 야근 같은 식구들의 스케줄과 식사 참석 여부가 적혀 있었다.

“그냥 일찍 깼어요.”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며 하는 말에 장 여사가 싱겁다는 듯이 웃었다.

어릴 때는 주방에 자주 들어왔었다. 밖에서 놀다가 뛰어 들어와서 냉장고를 열면, 장 여사는 문도를 끌어다 싱크대 앞에 세우고 손부터 닦아 주었다.

발뒤꿈치를 세워 싱크대 위로 팔을 쭉 뻗으면 장 여사가 꼼꼼히 거품을 내어 어린 문도의 손을 닦아 준 뒤 티타월로 물기를 싹싹 훔쳐 주었다.

365일 바쁜 부모님은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텅 비어 있는 커다란 집에 불이 켜진 곳은 언제나 주방이었고, 그곳에는 늘 장 여사가 있었다.

“예전 생각나네요.”

장 여사가 압력솥에 밥을 안치며 말했다. 문도는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한 번씩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장 여사에게 물을 튀기곤 했었다.

문도는 희미하게 웃으며 장 여사를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같이 있을 때 말할 수도 있지만, 먼저 주방으로 들어왔다. 장 여사가 장 여사이기 때문이었다.

“여사님.”

“네.”

“이선우 데려왔어요.”

장 여사가 뒤를 돌았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거리며 문도를 본다. 문도는 이어 말했다.

“아이 가졌어요.”

커다랗게 눈을 뜨는 장 여사를 보면서 문도는 말했다.

“맞아요. 내 애야. 혼자 낳겠다고 도망가는 거 붙잡아 왔어요.”

“선우 씨가 별채에 있다고요.”

장 여사가 눈썹에 힘을 모아 그를 보면서 말했다. 사태가 심각할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전무님 아이를 가졌고요.”

고개를 끄덕이자 끙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대표님은 아세요?”

“이제 말씀드려야죠.”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알릴 게 아니라 대표님께 먼저.”

“그냥, 여사님한테 먼저 말하고 싶어서.”

문도는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장 여사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챙겨 줘요. 몸이 한 줌이야.”

문도는 장 여사에게 말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짐도 별로 없이 도망 나온 이선우였으니 필요한 것들도 사다가 채워야 하고, 방도 새로 꾸며 주어야 했다.

별채에 블라인드도 달아야 하고 병원도 새로 정해야 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이선우에게 필요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장 여사가 될 거였다.

“혼은 나만 내고요.”

문도의 말에 장 여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식 웃은 문도는 벽에 기댔던 어깨를 떼었다. 막막한 표정을 짓던 장 여사가 문도에게 물었다.

“몇 주나 됐어요?”

“두 달 하고 일주일, 그 정도 됐겠네요.”

“병원부터 알아봐야겠네.”

장 여사가 몸을 돌려 보드에 선우의 이름을 적었다. 병원, 침구, 식사 등의 글씨가 아래로 쓰이는 것을 보다가 문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 * *

눈을 뜨니 커다란 창이 보였다. 아침이 밝았는지 창으로 해가 들어오고 있었다. 선우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난 두 달의 시간을 누군가 접어 버린 것 같았다. 밤마다 이 침실로 올라와서 남자에게 안겼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선우는 부스스 일어나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커다란 창문과 그 아래의 윈도우 벤치. 시트의 냄새와 감촉. 대리석 벽과 낮고 긴 월넛 서랍장.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익숙했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가구, 익숙한 감각들 사이에서 낯선 것은 오로지 자신 하나였다.

이 자리를 당연한 듯 차지하고 있는 이선우가 낯설었다. 이 방에 더는 숨어서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신세라니. 그 남자의 아이를 가져,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니.

선우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이마를 묻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허무해서 웃었다.

도망은 시도에서 막혔다. 포기와 체념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맴돈다.

어찌 되었든 남자의 감시 아래 들어왔으니 아이는 낳게 해 주겠지. 약속한 대로 자라는 동안 지켜보게도 해 주겠지. 적어도 혼외자의 엄마로 살아가게는 해 주겠지.

피식 웃는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얼마 전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머리글자를 같게 지으면 어떨까 생각을 했었다. 자신의 성을 물려주고, 머리글자도 비슷하게 짓는 건 어떨지. 손수건 아래에 같은 이니셜로 수를 놓는 생각을 했었는데.

성을 나누어 주는 일은 없겠구나.

아이는 남자의 아이로 자라게 될 거였다. 선우의 배 속에 있고, 선우가 품어 선우가 낳을 건데도 그랬다.

그 사실이 기막힌데, 더 기가 막히는 건 현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었다.

돈과 권력 앞에서 부조리해지는 현실을 지겹도록 겪어 왔는데, 아이를 두고서 다시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이제는 지친 것도 같았다. 포기할까. 체념할까.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까. 그러면 조금은 내게도 주어지는 게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가야, 엄마는 이제 방법을 모르겠어.

똑똑.

상념을 깨트린 건 노크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스터룸의 문이 열렸다. 서문도일 거라 생각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랬더니, 어찌 애를 가졌어.”

선우의 고개가 스르륵 다시 돌아갔다. 장 여사였다. 안쓰러움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가슴이 꽉 메어 오더니 막을 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사……. 여사님.”

장 여사는 눈물을 쏟는 선우의 옆에 앉았다. 서러움이 가득한 울음을 울며 선우가 장 여사의 옷깃을 붙들었다.

“왜 그때보다도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온 거야. 내가 잘 지내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어엉— 울음을 터트리는 선우를 안고 장 여사는 등을 토닥였다. 한 줌밖에 안 남았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장 여사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선우는 종잇장 같았다.

“왜 이렇게 말랐어. 밥은 먹어요? 입덧이 심한 거야?”

선우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잔뜩 얼어붙었던 마음이 장 여사의 손길에 투둑투둑 금이 가며 녹아내리는 듯했다.

“엄마가 돼 가지고 이렇게 울면 안 돼.”

장 여사는 선우의 어깨를 잡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숙소동 사람들한테는 말을 잘해 놓았으니까, 선우 씨는 아이만 생각해요. 울 때가 아니야. 응?”

주방 일로 억세어진 손이 선우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선우는 자신에게 눈을 맞추어 오는 장 여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덧은 어때요? 밥은 먹어?”

무뚝뚝한 말투 속에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선우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못 먹겠어요.”

“그때는 다들 그래. 괜찮아, 괜찮아. 너무 힘들면 수액 맞으면 되고, 먹을 수 있는 거 찾아서 먹으면 돼. 엄마가 되는 게 쉽나.”

불안했던 마음을 다독여 주는 말에 자꾸 눈물이 나왔다. 장 여사가 다시 선우의 눈물을 쓱 닦아 주며 말했다.

“그만 울고 세수하고 내려와요. 혹시 뭐 좀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챙겨와 봤어.”

“네.”

대답하는 선우의 어깨를 다독인 뒤 장 여사가 문을 열고 나갔다. 선우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두 발을 디뎠다.

그래. 별채였다. 가슴 졸였던 일이 많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곳.

숨을 가다듬은 선우는 눈물을 닦았다. 아이만 생각해요. 장 여사의 말을 떠올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 * *

1층 다이닝룸으로 내려가니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밥 냄새에는 그렇게 미식거렸던 속이 뒤집히지 않아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커피 한 잔을 들고 앉아 있는 서문도가 보였다.

“아.”

선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서문도가 여기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선우 씨, 얼른 앉아요.”

선우를 본 장 여사가 국을 뜨며 말했다. 선우는 주춤거리다 문도가 앉은 자리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았다.

“대표님이 전무님 가졌을 때 이걸 잘 드셨다고 하셔서 끓여 봤는데 아기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 간혹 애가 아빠 입맛을 닮을 때가 있거든.”

아빠, 라는 말에 문도와 선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선우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맹물처럼 연하게 끓였는데, 어때요?”

선우는 연한 갈색의 된장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신기하게도 속이 가라앉으며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어,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잘됐네. 괜찮으면 좀 더 먹어 봐.”

선우는 숟가락을 들었다. 한 번 두 번을 떠먹다가 그릇째로 들어 한 모금을 길게 마셨다. 따뜻한 국물이 사르르 속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괜찮아?”

“네. 맛이…… 없는데, 맛있어요.”

선우가 장 여사를 보며 웃었다. 문도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순하게 웃는 희미한 미소를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장 여사를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데, 국을 마시던 이선우와 시선이 부딪혔다.

움찔 놀란 이선우가 그대로 국그릇을 내려놓더니 곤란한 듯 숨을 쉬었다. 그러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을 틀어막고 게스트룸 옆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그대로 국을 게웠다.

“우욱.”

손끝이 하얗게 되도록 변기를 붙잡고 선우가 구역질을 했다. 뒤따라온 문도가 등을 두드리려는 찰나, 선우가 그 손을 쳐내더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세면대 앞으로 가서 입을 헹구고 얼굴을 닦은 선우는 문도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욕실을 나갔다.

“죄송해요, 여사님.”

“죄송할 게 뭐 있어요. 배 속에 애가 있어 그런 걸.”

장 여사가 등을 토닥이자 선우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맛있었다고 말을 했다. 선우의 눈은 오로지 장 여사만을 향해 있었다. 문도는 쓴웃음을 삼켰다. 철저한 외면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