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듣기를 원했던 대답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서문도가 냉소하며 말했다.
“기억을 해 봐. 네가 내게 뭐라고 했었는지. 그 입으로 무슨 말을 뱉었는지.”
비스듬히 웃고 있는 남자의 눈빛이 찌를 듯이 날카로웠다. 선우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좋아한다고, 옆에 있고 싶다고,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었지. 안 그래?”
아득히 멀었던 날들의 기억이 선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간절히 매달려 방으로 들어갔던 날들. 벌거벗은 몸으로 남자에게 안겼던 날들.
“기억나? 올라오고, 또 오고, 기어이 다시 와서 안아 달라고 했었지? 내가 널 잘라 낼 때마다 이렇게 간절히 매달리면서 원하는 건 나 하나라고 했어!”
짓씹듯 말을 뱉은 문도가 웃음을 웃는다.
“매일 밤 좋아한다고 속삭였던 너야. 안아 달라고 매달렸던 게 너야. 나를 속이고 침대까지 뛰어든 게 너라고. 그런 너를 나보고 믿으라고?”
웃음을 삼키는 남자의 눈동자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한참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냉정히 말했다.
“나는 너 안 믿어.”
선우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이번엔…….”
정말 아니야. 선우는 얼어붙은 혀를 움직였다.
“이번엔 진짜예요. 속이는 거 아니에요. 당신 속이고 들어간 것도 맞고, 좋아한다고 거짓말한 것도 맞아요. 그런데 이번엔 아니에요. 진짜 아니야. 아니에요.”
선우는 필사적으로 거듭해서 말했다. 이제 와 남자를 속일 이유가 무엇이 있나. 보여 줄 수 있다면 속을 뒤집어 보여 주고 싶었다.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고 했던 것도, 지우겠다고 한 것도 너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선우의 심장을 옥죄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거는, 그렇게라도 낳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요.”
서문도가 그녀를 비웃었다. 몇 번의 거짓말을 거듭한 너를 어떻게 믿냐는 표정으로.
“그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해. 네 멋대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뜻이야.”
“당신은 원하지 않잖아요!”
절박해진 선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신은 다 가졌잖아. 부모도 있고 돈도 있고 부러울 것 없이 살잖아. 울컥 마음이 쏟아져 내렸다.
“당신에겐 필요 없잖아!”
그러다 정말 남자가 아이를 없애 버릴까 두려워서 선우는 문도를 다시 붙잡고 매달렸다.
“약속할게요. 절대로 그런 일 없어요. 내가 왜 그러겠어요.”
문도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몸이 아득바득 매달려 온다. 앙상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서 이선우는 반복해서 말했다.
없어져 주겠다고.
사라져 주겠노라고.
원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뿐이라고.
까맣게 타 버린 웃음이 나온다. 이제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데. 어쩌나. 문도는 묵묵히 선우를 내려다보다 표정 없이 말했다.
“지워.”
이선우는 사형 선고라도 들은 것처럼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내가 네 눈에는 괴물 같아 보일까.
괴물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
공포가 이선우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다준다면, 떠날 수 없게 발을 묶어 주고 날개를 꺾어 준다면, 기꺼이 휘두를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 따위 처음부터 주지 않을 생각이다.
“싫어…….”
선우는 도리질을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싫어. 못 지워. 내 아이예요. 내, 아이야. 내가 가진 내 아이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선우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였다.
“내 아이예요! 지금 여기, 내 배 속에 있는 내 아이야! 당신이 뭔데 지우라고 해? 내가 낳아 내가 키우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이제 와서!”
누르고 눌러 왔던 감정들이 솟구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뜨거워진 눈에는 보이는 것도 없어졌다.
“그래, 내가 당신 속였어. 그런데 그게 뭐? 당신도 나 속였잖아! 다 알면서! 다 알고 있었으면서!”
수치를 무릅쓰고 매달렸던 순간들이 있었다. 속이면서도 혹시나 남자가 자신에게 진심이 되어 버릴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다 결국엔 아프게 마음에 담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런 내게 당신은 좋아한다고 말하라 했었지. 숱하게 많은 밤, 나는 당신을 보고 웃어야 했어. 좋아한다고 매달려야 했어. 함부로 만져 대는 손길에도 나는. 나는…….
그 손길 아래에서 흐느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선우는 어깨를 웅크렸다. 속는 줄도 모르고 밤마다 달려가 안아 달라고 애원을 했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그리 잘못했을까.
“다 끝났잖아! 당신 마음대로 다 했잖아! 나 내쫓고서 보란 듯이! 우리 민우까지!”
눈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민우의 이름이 적힌 음성파일을 보았을 때 온 세상이 빨갛게 보였다. 민우의 마지막 목소리를 세상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들었어. 어떻게 그래.
“내가 얼마나 더 아파야 만족해요?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 왜 이렇게! 내게, 왜!”
뭉친 핏덩어리 같은 감정이 토해져 나왔다. 선우는 붉게 터진 눈을 하고 문도를 노려보았다. 원망은 분노가, 분노는 증오가 되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말해 봐요. 억울하게 죽은 내 동생 핸드폰이라도 가져 보겠다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진실을 알아보려는 게 잘못이야? 내 아이 내가 낳아서 키우겠다는 게 하면 안 되는 짓이야? 당신이 뭔데! 대체 뭔데 내게 이래!”
밑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온 절규가 새벽의 도로 위에 울려 퍼졌다. 선우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문도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왜 내 아이를 빼앗으려 해! 당신과 상관없는 내 아이인데, 그거 하나만 갖게 해 달라는 게 그렇게 무리한 소원이야? 내게 왜 이래요. 정말…….”
모르겠다. 전생에 아주 많은 죄를 지었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생이 내게 잔인하게 구는가 보다. 선우는 흐느끼며 다시 애원을 했다.
“각서 쓸게요. 필요한 건 다 할게요. 그래도 안 돼? 나는……. 살아가면 안 돼? 나 좀 살게 해 주면 안 돼요? 꼭 이렇게 내게 잔인해야 해요?”
눈물로 일그러진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눈물 속에 갇혀 있는 남자의 얼굴도 일그러져 보였다.
“부탁할게요. 뭐든지 할 테니까.”
문도는 고개를 수그리고 애원하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가는 손가락이 붙들고 있는 재킷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가슴에 둔통이 일었다. 그래도 놓을 수는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한 줄기 희망을 주자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올 거야. 그리고 그 아이는 내 밑에서 크게 될 거야.”
다시 절망으로 물들어 가는 선우의 눈을 보다가 문도는 말했다.
“자라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면, 낳을 때까지 내 옆에 있어.”
이렇게라도 너를.
“그게 내 조건이야.”
붉게 터진 선우의 눈시울에 다시금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절망이 뒤섞인 희망 앞에서 선우는 넋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흘리던 선우가 눈을 감았다. 힘겹게 무언가를 넘긴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할게요. 아이 지우라고만 하지 말아요.”
눈물이 얼룩진 얼굴을 하고 이선우가 말했다. 듣기를 원했던 대답이었는데 목으로 쓴물이 넘어갔다.
언젠가 나도 너에게 그토록 간절한 존재가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그래. 안 할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에 힘이 빠진 선우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뒤늦게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남자의 구둣발이 보였다. 깨끗하게 반짝이는 구두를 보며 선우는 숨을 골랐다. 문득 자신과 아이는 이 남자의 구두에 묻은 오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닦아 내고 싶고, 지워 내고 싶은 그런 존재.
서문도의 인생에 오물을 튀길까 봐 통제해야 하는 존재.
선우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아이를 지우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는 아이를 지켜 낼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다. 상대는 서문도였다. 감정적으로 굴어서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였다.
선우는 남은 힘을 그러모아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무릎을 짚고서 다시 일어났다.
마주 선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신기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남아 있던 일말의 감정 같은 것도 눈물에 쓸려 내려간 듯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남자가 멀고 낯설었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선우의 인사에 문도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 표정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이만 서울로 올라가세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너무 많이 울었고, 그래서 지쳤고, 이제는 서 있는 것도 점점 힘들었다.
선우는 무릎을 굽혀 아까 떨어트렸던 가방을 주웠다. 핸드크림이며 핸드폰, 아이들에게 받은 비타민과 챙겨 먹는 엽산까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먼저 차 키부터 집는데 문도가 낮은 한숨을 쉬며 몸을 굽혔다. 건네주는 물건을 멍한 상태로 받아 가방에 넣고 일어서는데 남자가 물었다.
“……먹고 싶은 건, 없어?”
이상했다. 선우를 보고 있는 남자의 눈빛이 무언가로 얼룩진 것 같았다. 대답을 하지 않는 선우를 끈질기게도 본다. 누가 보면 퍽이나 위해 주는 사람인 줄 알겠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대답을 하니 문도가 뭐라 말을 할 듯 입술을 떼었다가 지그시 물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우에게 말했다.
“차 보낼 테니까 서울로 올라올 준비하고 있어.”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만 더 있다가 갈게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마뜩지 않아 하는 표정의 남자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정리는 하고 가고 싶어요. 학원 일 마무리되면 연락드릴 테니 그때까진 기다려 주셨으면 해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문도가 말했다.
“데려다줄게.”
“아니요. 혼자 가고 싶어요.”
선우는 차 문을 열었다. 남자를 남겨 둔 채로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돌아보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시간을 벌었으니, 이제 도망갈 곳을 알아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