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살고 싶어요
서 있는 이선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도 하지 못하고, 부정도 하지 못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꿈을 꿨거든. 태몽 같았어.”
문도는 선우를 올려다보며 친절히 말해 주었다. 선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해 봤지. 두 달 정도 되었을 거야. 마지막 두 번은 그냥 했으니까.”
뜨거움에 몸이 녹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더 깊게 닿고 싶어서 사정을 하며 이선우를 바짝 안았었다.
마지막에는 절박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이대로 하나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아이는 그의 절박한 바람으로 생겼다.
논리 따윈 없지만 확신에 가까웠다. 간혹 신은 간절한 이에게 굵은 동아줄을 내려 주기도 하지 않나. 문도는 이 기회를 기꺼이 움켜쥘 생각이었다.
“임신……. 아니에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선우가 힘겹게 말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파르르 떨리는 손을 하고는 헛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문도는 담담히 말했다.
“아니야?”
“네. 아니에요.”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했어요.”
아이를 부정할 때마다 선우의 눈가가 빨갛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문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펴고 서서 무심히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병원에 같이 가서 확인을 할까?”
선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선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서 무언가를 결심하더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임신 맞아요. 8주 되었대요.”
잠시 숨을 마신 선우가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지울 거예요.”
문도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선우를 보았다. 아이를 숨기려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여자의 눈동자가 단단했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한데도 피하지 않고 그를 본다.
“지울 거라서 없다고 했어요.”
“아니.”
문도는 말했다.
“너는 아이 지울 생각 없어.”
선우는 단호히 말하는 남자를 보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빼앗아 갈 것이다. 그럴 만한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이를 지키려면 물러서면 안 되었다.
“지울 거예요. 제가 왜 아이를 낳겠어요?”
다시 말하는데 가슴이 찢기듯 아팠다. 좋은 말만 들려주려고 했는데. 예쁜 것만 보고 예쁜 말만 들려주려고 매일 노력했는데.
아이에게 미안해서 가슴이 아팠지만 선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에 없는 아이를 만들어서라도 지켜야만 했다.
“지울 수 있다고?”
남자가 가늘게 웃었다. 넌 못 할 거라 단정 지어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너는 못 해.”
“아니, 할 수 있어요.”
선우는 힘주어 말했다. 아이만큼은 빼앗길 수 없었다. 온전히 그녀의 아이여야 했다. 지우겠다는 말로 아이를 지킬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무님 아이, 절대 낳고 싶지 않아요.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저도 제 인생 살아아죠. 용건이 그거였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낳을까 봐 걱정이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선우는 까딱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침착한 척 걸으며 떨려 오는 손을 움켜쥐었다.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남자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그 생각만으로 선우는 홀을 가로질렀다.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는 걸음이 급해졌다. 도망치듯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빨리,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해.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는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길 건너에 세워 둔 차를 향해 정신없이 걸었다.
길을 건너면서 차 키를 꺼내려 가방에 손을 넣었을 때였다. 발걸음이 겹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뒷목이 쭈뼛 서며 등 뒤가 서늘히 식었다. 뒤를 돌아보니 입을 꽉 다문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선우는 급하게 들고 있던 가방에서 키를 찾았다. 아래를 마구 헤집다 헛손질을 하는 바람에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물건들이 흩어졌다.
굴러가는 물건들을 주울 생각도 못 하고 키만 주워 삐릭, 문을 여는데 몸이 휙 돌려졌다.
“정말 지울 수 있다고?”
“네.”
단호히 답하며 몸을 돌리는 선우를 문도가 다시 돌려세웠다.
“잘 생각해 보고 말해.”
남자가 싸늘히 말했다. 뭘 더 생각할까. 아이는 지켜야 하고 남자는 멀리해야 했다. 선우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지울 거예요. 다른 남자의 아이는 다 낳아도 전무님 아이만큼은 지울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대답이 되었나요?”
순간 남자의 눈에서 까맣게 빛이 났다.
“그래?”
섬뜩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문도가 말했다.
“그럼 그 아이, 내 눈앞에서 지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선우는 커다랗게 눈을 떴다.
“병원 예약을 할까? 길게 끌 것 없이 내일은 어때?”
서늘한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자의 입에서 직접 지우라는 말이 나오니 심장이 조여든다. 정말로 지우라는 걸까.
“너도, 나도 원치 않는 아이,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지 않겠어?”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란 듯이 그녀를 비웃으며 누군가의 번호를 찾았다. 화면에 명 실장의 이름이 떴고, 뚜르르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네, 전무님.
명 실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선우는 문도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선우는 다급히 말했다. 이 남자는 정말로 눈앞에서 아이를 지우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명 실장님. 서문돕니다.”
— 네.
선우는 명 실장과의 대화를 이어 가려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는 남자를 보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식은땀이 났다.
잊고 있었다. 이 남자가 어떤 남자였는지.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속아 주는 척 달콤한 말을 속삭였던 사람이다. 그러다 승계 문제가 꼬여 버린 때에 단칼에 그녀를 제거한 사람이다.
그 이후의 행보들 역시 잔인할 정도로 냉정했다. 서유라의 치부를, 최지상의 흔적을, 민우의 마지막 목소리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사진조차 판을 짜는 데 이용했던 사람이다.
원치 않는 아이 하나쯤, 마음먹으면 가차 없이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니 선우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왜, 못 하겠어?”
말하는 남자의 싸늘한 얼굴을 보는데 오래전 남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프지 않겠어요. 콘돔은 계속 쓸 겁니다.’
이제야 납득이 된다.
연락이 없었던 남자가 갑자기 연락을 한 이유. 받지 않는 전화를 몇 번이나 해 가며 찾아온 이유. 늦은 시간에 기어코 얼굴을 봐야겠다고 불러낸 이유.
서문도는 아이를 빼앗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원치 않는 아이를 지우러 온 거였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공포로 몸이 조여들었다. 선우는 더듬거리며 문도에게 말했다.
“제가……. 알아서 지울게요. 병원에 혼자 갈 수 있어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병원 정도는 같이 가 줘야지. 그래도 애 아빤데.”
아니야. 안 돼. 화면으로 만났던 작은 젤리곰의 모습이 떠올라 선우는 다급히 문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그녀가 아이를 지울 수 있을 리 없다. 작디작은 몸을 보았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남자에겐 지워야 하는 실수일지 몰라도 그녀에겐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못…… 해요. 내가 어떻게…….”
파르르 손을 떨며 선우는 아이를 지울 수 없음을 인정했다.
“지우겠다며.”
“거짓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그래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뜨며 아프게 침을 넘겼다.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고여 들었다.
“아이를 어떻게 지워요. 빼앗길 것 같아서 그랬어요. 내 아이로 낳아서 키우고 싶은데,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다시 복잡하게 엉켜들까 봐.”
“복잡하게 엉켜들 걸 알면서, 낳겠다고?”
“네. 낳을 거예요. 낳아서 내 아이로만 키울게요. 전무님이랑 상관없이 키울게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상관이 없어. 내가 애 아빤데.”
비딱하게 웃은 문도가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 아이라고 들이밀면 나는 어떡할까? 지웠다고 말한 아이가 멀쩡히 살아서 갑자기 튀어나오면. 아, 그래, 나 몰래 낳았구나, 하나?”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솔직히 말하고 키우고 싶다고 하면 되었을까? 그래도 설마 지우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지? 선우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일 절대 없어요. 절대…… 없게 할 거니까.”
아이만 있으면 된다. 낯선 곳이어도 상관없었다. 남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이 내세워서 나타나는 일 절대 없다고 약속할게요. 정말로 그럴게요. 내 아이로만 키울게요. 그러니까.”
애원을 해도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나 무정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동정도 자비도 없었다.
그래도 남자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남았었나 보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까, 배려를 해 주겠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기대를 했었나 보다.
찾아온 남자를 보면서도 아이를 지우라고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존재를 들켰으니 숨겨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아이가 미래를 망칠 테니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라져 줄게요. 당신 인생에서 없어져 줄게요. 아이 데리고 멀리 떠날게요.”
선우는 문도에게 애절히 매달렸다. 나를 좀 불쌍하게 여겨 줘. 당신에겐 없어져야 하는 이 아이가 나에겐 생명이라는 걸 알아줘.
“내 유일한 가족이 될 아이예요.”
눈물이 자꾸만 고여 들었다. 무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남자에게 선우는 매달리며 말했다.
“알잖아요. 나는 세상에 혼자 남았어요.”
혼자. 그 단어가 얼마나 사무치게 외로운지 당신은 알까. 텅 비어 버린 삶을 알까. 모든 것을 멈춘 채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버리고 싶었던 마음을, 당신이 알기는 할까.
“나한테는 이 아이가 너무 절실해. 아이가 없으면 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을 한 남자를 붙들고 선우는 간절히 빌었다.
“낳게 해 줘요. 네? 맹세할게요. 각서도 쓰고, 공증도 할게요.”
선우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았다. 감정적으로 아무렇게나 뱉는 말이 아님을 남자가 알았으면 했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밑바닥의 마음까지 꺼냈다.
“살고 싶어요.”
선우의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그래. 살고 싶었다. 민우가 죽은 뒤로 따라 죽지 못한 이유를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살고 싶어서였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해서 서유라의 트레이너가 되었고, 미친 사람처럼 민우의 핸드폰을 찾았다.
하루하루 피가 말랐어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늘 발을 붙일 곳이, 마음을 쏟을 곳이 필요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찾았는데, 이렇게 빼앗길 순 없었다.
“멀리 떠나서 죽은 듯이 살게요.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어요. 아이 없다고 한 이유도 그거예요. 당신과 엮이기 싫어서, 혼자 키우고 싶어서 그랬어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걸 남자가 알았으면 했다. 자신은 박소영이 아님을, 아이는 서유라처럼 남자의 삶을 비틀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면 했다.
그때 문도가 비틀린 웃음을 웃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진심마저 비웃어 버리는 남자의 눈동자가 서럽도록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