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재회
전화벨이 다시 울린 건 막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임신을 알게 되고 나서 구입한 육아 다이어리에 날짜를 적던 선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생각 없이 들었다가 화면을 보고 멈칫했다. 이름 없이 울리는 번호가 아까와 같았다. 선우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베개 아래에 핸드폰을 묻어 두고 뒤를 돌아 문을 닫았다. 생각해 보면 예전 번호도 아니고 새 번호로 전화를 잘못 걸 일은 없는데,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었다.
번호를 새로 바꾸며 가까운 지인에게만 연락처를 알렸기에 방심한 것도 있었지만, 당연히 연락 같은 건 오지 않을 거라 생각을 했었는데.
받지 말아야지.
선우는 다시 식탁에 앉으며 생각했다.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받지 않을 생각이다. 아이를 가진 지금은 더더욱 남자를 피하고 싶었다.
다이어리를 펼친 선우는 전화가 끊어지기를 기다리며 딸기 사탕을 그려 넣었다. 동그란 딸기 사탕을 그리고 색칠까지 한 뒤,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는 그쳤겠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방으로 들어가 베개 밑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는데, 부재중 전화와 함께 같은 번호로 메시지가 와 있는 것이 보였다.
누르니 사진 한 장이 떴다. 이모네 아파트 지하 출입구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아래에 짧게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전화받아요. 아니면 내가 올라가고.]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다시 벨이 울렸다.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받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끊어졌으면 했다.
하지만……. 남자를 안다. 이 늦은 시간 이모의 집에 올라가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올라가서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꾹 감았던 눈을 뜬 선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크게 숨을 마신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귀에 가져다 대고 입술을 깨물었다.
작정하고 받았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휘이, 바람이 부는 소리만이 귀를 스쳐 간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려 해, 선우는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이선우입니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기이한 적막이 귀를 채워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선우는 핸드폰을 힘주어 잡았다. 단지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휘청인다. 선우는 허리를 세우며 대답했다.
“아니요. 전화로 하셨으면 해요.”
건너편에서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도 마음이 우그러드는 기분이 들어 선우는 주먹을 꾹 쥐었다.
— 아니. 만나야겠는데.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을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오만한 말투는 여전했다.
“전화로 전하기 싫으시면 메시지로 남겨 주세요.”
— 주소 불러요.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까 내려오고.
“아니요.”
— 주소.
“전무님.”
— 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선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용건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이런 소모적인 통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미련 없이 끊으려던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만나는 게 내 용건인데, 뭘 더 말하라는 거지?
한숨을 쉬더니 이어 말했다.
— 내가 이 시간에 굳이 이모님을 깨워야겠어요?
앞에 있었으면 힘껏 노려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비열할 수 있을까.
가족이 선우의 약점인 걸 알면서 쥐고 흔들어 댄다.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싫은데, 남자에 대해 이모가 알게 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잠깐이면 돼.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다시는 이런 식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선우는 문도에게 말했다.
“……국세청 건물 맞은편에 패스트푸드점이 있어요. 거기서 뵙겠습니다.”
— 그래요.
남자의 목소리를 잘라 버리듯이 전화를 끊고 선우는 잠시 몸을 웅크렸다. 핸드폰을 쥐고서 숨을 깊이 쉬었다.
조금 전 마트를 다녀올 때만 해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다짐이 순식간에 무색해지고 말았다.
후우.
외투를 입은 선우는 잠시만 견디자고 주문을 걸었다. 이 밤이 지나면 볼 일 없을 거니까. 정말로 마지막이 될 테니까. 결심을 굳힌 선우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24시간 영업을 하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불빛은 자비 없이 밝았다.
입구의 키오스크에는 고장이 났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고, 피곤한 얼굴의 알바생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커피 두 잔…….”
카운터 앞에 서서 주문을 하려다가 문도는 말을 멈추었다. 음료의 종류가 적힌 메뉴판을 훑은 뒤 다시 주문을 했다.
“커피 한 잔 하고 오렌지 주스 한 잔 부탁합니다.”
음료를 받아 2층으로 올라온 문도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매장에는 아무도 없고, 창문 밖으로는 불이 꺼진 상가와 가로등이 켜진 적막한 도로가 내려다보였다.
문도는 식어 가는 커피를 앞에 두고 묵묵히 시간을 죽였다. 아직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금 뒤면 이선우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텅 빈 매장에 1층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문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계단 쪽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위로 이선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시릴 정도로 창백한 조명 아래에서 이선우의 모습이 차근차근 드러났다.
문도를 본 선우의 얼굴이 굳었다. 멀리서 고개를 짧게 숙이며 인사를 하는 선우의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선우에게 말했다.
“앉아요.”
선우가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 세 잔과 오렌지 주스 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우스운 풍경이다.
다시 자리에 앉은 문도는 눈앞의 이선우를 보았다. 마주 앉아 있음에도 현실인 듯 현실 같지 않아 천천히 이선우를 뜯어보았다.
창백한 얼굴. 그늘진 눈매. 그럼에도 여전한 눈동자. 하나로 묶은 머리와 앞을 여민 얇은 코트.
문도가 그 전부를, 그리고 하나하나를 오래 바라보는데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건부터 말씀해 주세요.”
목소리를 듣는데 웃음이 나왔다. 뜨거운 물을 삼켰을 때처럼 목이 막혀 왔기에. 창백한 불빛 아래에서 문도는 뼈저리게 실감을 했다.
이선우였다. 그림자 같은 환영이 아닌 진짜 이선우. 그 사실이 왜 이렇게 사무치는 건지. 문도는 천천히 마른 입술을 뗐다.
“잘 지냈어요?”
선우가 조금 어이없어하며 문도를 바라보았다. 기막혀하는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며 목이 메어 왔다. 빌어먹게 좋았다.
이선우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문도의 등줄기가 저릿거렸다. 일렁이는 감정으로 꽉 찬 선우의 눈동자가 심장을 뛰게 하였다. 비로소 살아 있는 기분이 들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용건부터 말씀하세요.”
이선우는 딱딱하게 말했다. 그를 달갑지 않아 하는 게 눈에 너무 보였다. 천하의 쌍놈이 되어 있겠지. 알고 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얼른 이 만남을 끝내고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선우의 얼굴을 보며 문도는 천천히 말했다.
“용건은……. 이제부터 생각을 해 보려고.”
선우가 눈을 찡그렸다. 찡그리는 표정도 예뻤다. 하기야, 네가 언제는 안 예뻤을까.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오물 속에 파묻혀 있어도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이겠지. 답도 없는 새끼가 용케 버텨 왔다는 걸, 매 순간 깨닫게 된다.
“무슨 그런…….”
기막힌 표정을 짓는 것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이선우는 처음이다. 그의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를 보니 이제 정말로 알겠다. 진짜 이선우가 지금 여기, 그의 눈앞에 있었다.
“얼굴 보러 왔는데 자꾸 용건을 물으니.”
문도는 식어 버린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한 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이제부터 생각해 볼게.”
입술을 꾹 깨문 선우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지 탁자를 쥐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앉아.”
문도가 선우에게 말했다. 선우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직은 헤어질 수 없었다. 조금 더 봐야겠다. 눈이 아릴 정도로 담아 놓을 생각이다.
“조금만 더 앉아 있어.”
하. 선우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다 단호히 말했다.
“싫어요.”
그 한마디를 하는데 선우는 마음이 울컥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늘 남자의 말 한마디에 마음을 졸여야만 했던 시간이 생각나며 눈앞이 뜨거워진다.
“전무님과 한자리에 앉는 것, 싫습니다.”
남자는 이제 선우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선우는 더 이상 그의 고용인도 아니고, 매달려 애원해야 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그 생각을 하며 선우는 서문도를 보았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가늠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당신이 무슨 표정을 짓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앉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선우는 문도를 힘주어 노려보았다.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팽팽하게 조여 오는 공기도 싫었다.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패스트푸드점의 냄새도 싫었다.
마주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아리는 것도 싫고, 익숙한 체취가 맡아지는 것도 싫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그 생각으로 선우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용건이 생각났어.”
남자가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이 가진 것, 언제 말할 생각이었지?”
선우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