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뉴스에 나왔던 그 나쁜
물에도 냄새가 있었다. 선우는 물을 넘기다 말고 그대로 토해 냈다. 신기하게도 임신 진단을 받았던 그날 이후, 기다렸다는 듯 입덧이 심해졌다.
아랫집에서 밥을 해도 속이 미식거렸다. 잠시 미식거렸다가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 24시간 미식거렸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를 맡으면 그대로 속이 뒤집혔다.
“하아.”
선우는 가그린을 물었다가 뱉으며 맹물로 입을 헹구었다. 싱크대에 서서 입을 헹구는 것도 고역이었다.
“배는 고픈데 먹을 게 마땅치가 않네. 우리 이것만 마저 하고 마트에 나가 볼까?”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선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가 생긴 뒤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수아 꺼는 다 됐고, 지안이 꺼랑 유주 꺼만 더 하면 되겠다. 그치?”
꼬마 숙녀들과의 작별 선물을 만드는 중이었다. 아직 며칠 시간이 남았지만 미리 준비를 해 두는 중이었다.
선우는 토끼 모양의 비닐 팩을 열고 아이들이 잘 먹는 젤리와 초콜릿을 넣었다. 하나씩 아이들 이름을 붙인 뒤 귀를 묶었다. 예쁜 튀튀 스커트를 하나씩 넣어 둔 쇼핑백에 토끼를 넣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모인가?
식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보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름은 없어도 익숙한 번호였다.
선우는 핸드폰을 던지듯 식탁에 놓고 몇 걸음을 물러섰다. 여러 번 울리던 전화는 어느 순간 끊겼다. 그리고 다시 울리지 않았다.
잘못 걸었을 거야.
애써 그렇게 생각한 선우는 급히 생각을 돌려 다시 배 속의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마트 갈까. 먹을 만한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치?”
남자의 생각을 지우고, 아직은 평평한 배 위에 한 손을 올려놓은 뒤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냉장고 문에 붙여 놓은 젤리곰의 사진을 보니 쿵쾅거렸던 심장이 천천히 제 박자를 찾았다.
“비스킷이 좋대. 조금씩 녹여 먹으면 그래도 낫대. 오늘은 주스도 도전해 보자.”
선우는 사진을 보며 말한 뒤 일어나 외투를 챙겨 입었다. 지갑과 장바구니를 들고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가벼운 산책을 겸해 아파트 상가에 있는 마트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가자.”
문을 닫고 나와 아파트 산책로를 걸었다. 세상일은 마음먹기 달린 거라는 말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이를 가졌을 뿐인데 용기가 생겼다. 홀로 걷는 길이 무섭지 않았고, 혼자 잠드는 밤이 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엽산을 처방받아 사 온 뒤로 수면유도제는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원망 안 해. 안 할래.”
선우는 아이에게 말하듯 혼잣말을 하며 걸었다. 남자가 생각나면 한 번씩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올 때가 있었다.
별채를 나와서부터는 다른 의미로 힘든 밤을 보냈다. 낮은 그래도 괜찮은데 밤이 되어 자리에 누우면 마음이 까맣게 엉겨 붙었다.
누군가 할퀸 듯 마음이 아파 왔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등을 안아 주며 더 자라 말을 했던 것. 팥빙수를 사 주며 웃었던 것. 별채 곳곳에서 몰래몰래 입을 맞추었던 것. 그런 순간들이 밤이면 불쑥불쑥 생각이 났다.
여기는 세종이고, 전부 끝난 일이라 생각해도 소용없었다. 이모와 이모부가 바깥에 있는 것을 알아도 그랬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나랑 있어.’
그런 말은 왜 했을까. 미친놈이라 생각하라고 그랬지. 다 알았으면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버릴 거라서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론은 하나로 모였다. 일부러 그랬구나. 더 힘들라고, 더 많이 아파하라고 내게 일부러 잘해 주었구나. 진짜 나쁜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겠는데,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났다.
눈을 감으면 희미한 담배 냄새가 섞인 청량한 냄새가 맡아지는 것만 같았다. 등을 안아 주던 체온과 장난스런 눈웃음이 생생했다.
마음이 잘려 나간 듯 아픈 것도 힘이 드는데, 온기가 거두어진 밤이 너무 추웠다. 그럴 때마다 삼켜지지 않는 기억들을 곳곳에 심어 놓은 남자가 미웠는데.
“우리가 만났으니까, 이제는 원망 안 할게.”
마음가짐을 달리하려 한다. 아이를 선물해 주고 사라진 사람이라 생각하면 그리 밉지 않았다. 과거가 어떠했든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면 된다.
힘들던 밤도 아이가 생기며 괜찮아졌다. 아이와 어디를 갈까. 무엇을 할까. 태명은 무엇으로 지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남자는 어른어른 먼 그림자처럼 느껴졌으니까.
“다 왔다.”
선우는 마트에 들어가 레몬 꾸러미와 딸기맛 사탕 몇 개를 샀다. 입덧에 좋다는 비스킷도 몇 통을 고르고 탄산수도 골랐다.
집으로 돌아가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차근히 계획을 세워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발걸음을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밤이었다.
* * *
서울에서 세종까지는 두 시간이 걸렸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문도는 바깥으로 나와 단지를 걸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니 10시 반이었다.
명 실장에게 받은 주소를 생각하며 아파트 앞에 섰다. 위를 올려다보니 11층의 불이 켜져 있었다.
이 시간에 벨을 누르는 건 무례한 일인가.
잠깐 생각했다가 피식 웃었다. 앞으로 수많은 무례한 짓을 저지를 생각이면서 벨 하나에 고민을 하다니.
뚜벅뚜벅 걸어 아파트 입구에 섰다. 호수를 누르고 호출 벨을 누르려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나오며 문이 열렸다.
종이 박스를 든 중년의 여자였는데, 생김새가 눈에 익었다. 명 실장이 보내온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이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쌀쌀하네요.”
주민인 줄 알았는지 이선우의 이모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웃을 때 눈이 접히는 모양이 비슷했다. 그 사실만으로 쿡, 하고 어딘가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시선이 저절로 따라붙었다.
상냥히 인사를 건넨 정미숙이 분리수거장으로 향하다 말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어디서 봤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문도는 몸을 돌려 정미숙을 마주 보았다. 성큼 계단을 내려가 분리수거장 앞으로 향하니 정미숙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은 한데, 누구…….”
생각이 날 듯 말 듯하여 미숙은 남자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는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헤매고 있는데 남자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서문도입니다. 이선우 씨 이모님 되시죠?”
얼결에 명함을 받아 들면서 내려다보았다.
서도 케미컬 전략부문장 서문도. 서도 케미컬, 서문도…….
“아, 뉴스에 나왔던 그 나쁜…….”
이제 생각났다는 기쁨과 아주 나쁜 새끼들이라고 욕을 했던 기억이 겹쳐지는 바람에 미숙은 주춤거렸다.
유가족들에게 유감이라 했던가. 사과를 한다고 했던가. 기억이 가물거렸지만 분명 그때 그 얼굴이었다.
“밤늦게 실례지만, 여쭤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서도 그룹에서 뭘 물어보러 왔나. 이상한 증언 같은 걸 바라나? 의심하며 노려보는데 남자가 차분히 말했다.
“이선우 씨를 찾아왔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선우의 이름이 나와 미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밤에 나타나 선우를 찾는 젊은 남자라니.
“우리 선우는 왜요? 민우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그냥 가세요. 사과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종이 박스를 버리고 손을 탁탁 턴 미숙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서문도, 저 이름에 대한 기억이 맞다면 서도 부회장의 아들이다. 그런 남자가 왜 우리 선우를 찾아.
“물어볼 것이 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요.”
아무 사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해 보려 해도 남자의 목소리만으로 알겠다. 담담히 말하는 목소리에 감정이 깊이 실려 있었다.
선우가 이 남자랑 연애를 했구나. 깨닫는 순간 깊은 한숨이 나왔다. 어쩌려고 이런 남자랑 연애를 했어.
“선우 여기 없어요.”
미숙은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뜨며 말했다. 남자가 엷게 웃는다. 아니……. 생긴 건 또 왜 저렇게 사람을 홀리게 생겼어.
“있는 거 알고 왔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남자가 잠시 미숙을 보았다. 직선의 눈빛이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도 기가 센 것이 느껴졌다.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우가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거기다 민우의 일에도 얽혀 있었다. 그리고 이제껏 어디서 뭘 하고 있다가 선우를 찾아.
세종으로 내려왔을 때, 선우는 정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미숙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고개를 저었다.
“선우 여기 없습니다. 잘못 찾아왔어요. 돌아가세요.”
“말씀드렸지만.”
남자가 조금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알고 왔습니다.”
“알기는 뭘 알아. 선우, 이사 갔어요. 멀리 갔어요. 어딘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니까 가세요. 아무리 와도 선우 여기 없으니까.”
미숙의 말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미숙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려는 듯 몸도 돌린다.
진짜 없는 걸 알았나? 의외로 쉽게 물러나네, 라고 생각을 할 때였다.
“아.”
몸을 돌리던 남자가 다시 미숙을 보았다.
“혹시 아이 가진 것도 알고 계셨나요?”
미숙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둥글게 떴다. 잠시 당황하다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임신이라니, 아직 결혼도 안 한 애한테 할 소리예요?”
목소리 높여 말하는 미숙을 남자가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문도는 시트에 몸을 기대며 머리를 젖혔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깊게 숨을 마셨다.
이선우는 여기 없다. 그건 직감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을 한다. 이대로 돌아가 명 실장에게 다시 주소를 알아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는 기다리기 싫었다. 보겠다 마음을 먹었으니 봐야겠다.
문도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선우의 새 번호를 찾아서 다시 눌렀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차 문을 열고 나가 지하 출입구의 사진을 찍었다. 여기가 어딘지 이선우는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전화 받아요. 아니면 내가 올라가고.]
사진과 함께 전송을 했다. 이제 이선우의 대답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