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이상한 꿈
수면제를 끊었다.
끊었다기보다 전부 버려 버렸다. 이선우의 행방을 알아보라고 지시한 날부터였다.
며칠간은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만,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으니 언젠가는 잠이 들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웃기게도 잠이 왔다.
이선우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환영도 보이지 않았다. 미친놈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잠이 드는 데 술이 필요하긴 했지만, 죽을 만큼 마시고 고꾸라지듯 잠이 들 필요는 없었다. 마시고 나른한 정도면 되었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네 잔 정도를 마신 뒤 가만히 눈을 감으면 가벼운 웃음이 나면서 눈이 감겼다. 이런저런 생각 사이를 떠돌다 보면 어느 순간 까맣게 어둠이 내려오곤 했었는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술을 입에 대기도 전에 잠이 밀려왔다. 씻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낮에 전주까지 출장을 다녀와 그런 모양이라 생각하며 밀려오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고요한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커다란 달이 호숫가의 표면을 반짝이게 만들었고, 뒤의 울창한 숲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달이 유난히 밝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물 같은 밤하늘에 은하수가 보였다. 흘러가는 별들의 강을 보면서 밤하늘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별 하나가 흔들렸다.
달 옆에 붙은 제일 크고 예쁜 별이었다. 마치 그를 향해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반짝이며 깜빡거리더니 슝, 하고 미끄럼을 타듯이 내려왔다.
놀라야 하는 일인데 그리 놀랍진 않았다. 내 것이구나,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자신에게로 뛰어드는 별을 잘 받아 다치지 않게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별은 제자리를 찾아온 것마냥 반짝이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고, 문도도 그 별을 단번에 품에 안았다. 찬란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별을 받고서 빙그레 웃고 있다가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깨어나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아 이쪽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문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
아침 식사를 하러 건너간 본관에서 문도는 현희를 불렀다.
“응.”
“저 가지셨을 때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셨다고 하셨죠?”
“응. 그랬지.”
마침 과일을 가지고 들어오던 장 여사가 한마디를 더했다.
“참 요란하게 오셨어요. 전무님 태몽을 안 꾼 사람이 없었으니까.”
자라면서 몇 번 들었던 이야기다.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했을 때 집안사람들이 돌아가며 태몽을 꾸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와 할머니까지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래도 태몽을 꾼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나중엔 나도 꿨잖아요. 부회장님이 강가에서 햇볕을 쬐는데 가까이 가 보니까 그게 죄다 무지개였던 꿈.”
그게 어찌나 생생하던지,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
장 여사가 하는 말을 들으며 문도는 포크를 들었다. 예쁘게 깎아 놓은 배 한쪽을 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우현희가 그런 문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문도는 우현희에게 답하며 빙그레 웃었다.
* * *
선우는 긴장한 얼굴로 앞치마에 물기 묻은 손을 닦았다. 식탁에 앉아 있는 미숙에게 커피도 내주었고, 사과도 깎아서 내어놓았다.
며칠 동안 이모에게 언제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 학원 수업이 없는 날, 이모가 다른 약속이 없는지 물어보고 집으로 초대를 했다.
“선우야, 너도 앉아.”
“네. 이모.”
선우는 물 한 잔을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는 선우를 보고 미숙이 말했다.
“응? 커피 안 마시고?”
별로 마시고 싶지 않다는 말로 둘러대려다가 선우는 결심을 굳히고 미숙을 불렀다.
“이모.”
“응. 얘, 여기는 바깥이 참 좋다. 저층이라 그런지 창밖이 꼭 정원 같네. 이 집 얻기를 잘했어.”
식탁 너머 거실 창을 보며 말하던 미숙이 돌아보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우가 평소보다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 한잔하자고 부르더니,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야?”
“네.”
선우가 조금은 난처하고도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렇게 긴장을 할까 싶어 미숙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데, 선우가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저, 이모…….”
“응.”
“저……. 아이 가졌어요.”
순간 미숙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내내 혼자였던 아이가 어찌…….
“낳을 거고요. 혼자 키울 거예요.”
담담한 목소리를 듣는데 미숙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무슨, 앞뒤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얘, 잠깐.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멍해서 그래.”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미숙을 보고 선우는 난처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임신을 했다고?”
“네.”
“아이를, 가졌단 말이지?”
“네.”
두 번이나 확실한 답을 들은 미숙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선우에게 물었다.
“애 아빠는? 아이 아빠는 어디 있어? 너 혼자 애를 가진 건 아닐 거 아니야.”
“서울에 있을 때 잠깐 만났던 사람인데요, 헤어졌어요.”
“아이 가진 건 알아?”
“아니요. 알릴 필요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어요.”
“아니, 그래도 애 아빠면 알아야지.”
선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임신을 안 순간부터 혼자 키울 생각이었다. 아이를 빌미로 엮이고 싶지도 않았고, 서문도를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다.
“제 아이예요. 그 사람이랑 상관없는.”
아이고. 미숙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이고. 한 번 더 소리를 내서 말하더니 천장을 올려다본다.
“얘, 혹시 그……. 유부남이거나……. 말 못 할 그런…… 사정이…….”
“그런 건 아니에요.”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숙이 너무 심각한 얼굴이라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이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키울 수 있어요.”
“그래도 알려야지. 아무리 헤어졌대도 지 새끼 가진 건 알아야지. 사지 멀쩡한 놈이면 데려다 결혼이라도 해.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어찌 애를 혼자 키우겠다고 그래.”
아이를 가진다고 해서 꼭 결혼하는 법이 없다는 건 미숙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남의 일일 때나 그런 거고, 당장 눈에 밟히는 조카의 일이 되어 버리니 사리 분별은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이모.”
선우가 차분히 미숙을 불렀다. 그녀를 보는 선우의 눈빛이 맑고 곧았다. 진심이구나. 진짜 아이를 가졌고, 진짜 혼자 키울 생각이야. 미숙의 머리가 절로 아파 오는데 선우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저 그 사람 다시 만나기 싫어요.”
왜,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미숙은 애써 삼켰다. 헤어질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남자가 영 시원치 않아서 이러는 걸 수도 있고.
그래.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기엔 개차반인 그런 놈이었나 보다. 생활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놈팡이였나 보다.
선우가 외로워서 그런 놈을 만났다가 정신 차리고 헤어졌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런 개차반인 놈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암.
“혼자서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모, 그러니까……. 조금만 도와주세요.”
그 말에 미숙의 마음이 울컥였다. 세상에 기댈 곳이라곤 자신밖에 없어서 도와 달라고 애써 웃으며 말하는 선우를 보니 마음이 아파 왔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아비 없는 애라도 낳아서 저렇게 키우고 싶어 할까. 그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한 것 같아 또 마음이 쓰렸다.
“선우야. 아이 키우는 거, 그거 말도 못 하게 힘들어. 도현이네만 봐도 평일엔 친정엄마가 봐주고 중간중간 내가 며칠씩 데려다 봐주는데도 힘들어해.”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혼자 돈도 벌고 애도 봐야 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 될 건지 잘 생각해 봐.”
다시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다 정해 놓고 듣는 척만 하는 건 지 엄마랑 똑같다고 생각하며 미숙은 한숨을 쉬었다.
“외롭고 힘든 일이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둘이잖아요. 이모, 저는…….”
선우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미숙은 알 것 같았다. 민우가 죽은 뒤 선우는 한동안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았었다. 저러다 남은 선우마저 잘못되면 어쩌나 가슴을 졸일 정도였다.
아이는 선우에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어 줄 거였다.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선우를 단단히 땅에 묶어 힘내어 살아가게 해 줄 거였다.
“각오는 되어 있지?”
“네.”
“그래. 이모가 도와줄게. 같이 키우자.”
“고마워요. 이모.”
안심이 되었는지 그제야 선우가 웃었다. 미숙은 선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 * *
막 퇴근을 하려던 찰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세종특별자치시 새뜸마을 3단지.]
문도는 명 실장이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선우의 이모가 살고 있는 주소였다. 그 아래에는 이선우의 새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다.
낯선 번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고 뚜렷했다.
문도는 사무실 창턱에 걸터앉아 불빛이 빛나고 있는 광화문 사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너머의 경복궁과 어둠에 잠긴 커다란 북악산까지.
어쩌면.
다시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할 거였다. 부서진 폐허 속에서 벽돌을 골라 주웠던 미친놈처럼, 쌓고 다시 쌓아도 부서지는 벽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다시. 또다시. 될 때까지, 혹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다시.
문도는 핸드폰을 들었다. 기억해 둔 이선우의 새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발신음을 들으며 멀리 경복궁 불빛을 바라보았다.
받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지.
가구도 집도 몽땅 남에게 넘긴 여자였다. 그를 보는 순간 표정이 굳던 것도 기억난다. 전화번호까지 바꾸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을 것이다.
문도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일어났다. 밤이다. 이선우를 만나기에 좋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