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11화 (111/168)

111. 놓아지지 않는 것

차에 앉은 문도는 불이 켜진 이선우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저녁에 도착해서 불이 켜진 지금까지 한 시간 정도를 건조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이선우를 보고 싶은 것인지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 무엇을 확인하러 왔는지, 의외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왔고, 그냥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문도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옷을 툭툭 털고 슈트의 단추를 잠갔다. 놀이터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1층, 2층, 3층. 코너를 돌 때마다 주황빛 센서등이 켜지는 계단을 올라서 402호 앞에 섰다.

딩동.

벨을 눌렀다. 안쪽에서 누군가 말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듣는 순간 움찔 미간이 모여든다.

설마.

벌써 누군가를.

우습게도 그 순간 마음이 뒤집혔다. 내내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던 마음이 단번에 뒤집히며 눈에서 불이 튀었다.

딩동, 딩동, 벨을 누르는 소리가 성급해졌을 때 안쪽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가요. 잠시, 만요.”

허둥거리는 굵은 목소리를 듣는데 짧은 순간 별별 상상이 다 들었다. 옷을 주워 입으면서 나오는 중인가. 어떤 놈일까. 이선우를 만졌을까. 어디를 어떻게 만졌을까.

죽여 버릴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자신이 놀랍지 않았다.

택배인가? 안쪽에서 다시 걸쭉한 목소리가 들리며 덜컹 문이 열렸다.

“어…….”

스물서너 살쯤 되었나. 문도는 눈을 좁혀 스포츠머리를 한 앳된 남자를 노려보았다.

“택배……? 아니세요?”

입가에 묻은 검은색 양념을 손등으로 쓱 닦으며 물어보는 남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문도는 한참 남자를 바라보다 입을 뗐다.

“이선우.”

“네?”

그때 안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김정수 군만두 내가 먹는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안쪽의 풍경이 보였다. 시커먼 사내놈들이 모여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있었다. 문도가 문을 열어 조금 더 발을 들이니 남자애가 뒷걸음질을 쳤다.

“어어. 근데 누구세요?”

“전에 여기 살던 사람, 어디 갔죠?”

“아……. 그 누나요? 이사 갔는데요.”

“언제?”

“어……. 두 달 전인가? 그러니까 대충 그 정도 된 것 같은데요.”

대답을 들으며 문도는 눈으로 안쪽을 훑었다.

그대로였다. 작았던 침대, 화장대를 겸했던 책상. 원목 시트지가 붙은 옷장. 싱크대 위의 그릇. 물컵. 자잘한 물건들까지 전부 그대로인데, 네가 없다고? 그게 말이 되나?

“물건들이 왜 다 그대로 있지?”

“아, 그게.”

남학생은 침을 넘겼다. 왜 긴장하는지 모르겠지만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살벌한 기운에 등에서 땀이 흘렀다.

“그 누나가 다 주고 갔어요. 집 보러 왔던 날에 쓸 거면 주고 가고 아니면 버리고 가겠다고 하셨는데, 저는 다 필요한 거였어서 감사히 받았습……니다.”

“공짜로?”

문도가 한 번 더 짚자 남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필요 없다고 하면서 공짜로 주고 가셨어요.”

두 달 전에, 공짜로.

문도는 느리게 그 말을 소리 내어 보았다.

이선우는 두 달 전에 전부 버리고 떠났다. 그가 허상을 그렸던 두 달 내내 이곳, 여기에 없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통째로 버려진 주제에 웃음이 나온다.

“알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어요. 짜장면 마저 먹어요.”

주춤거리며 남학생이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목소리도 들려왔다. 누구야, 몰라, 얼른 먹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기만 했다. 이제 여기는 더 이상 그 여름의 밤을 간직한 이선우의 작은 집이 아니었다.

어떻게 네가 없지?

멍했다가 깨닫는다.

이런 거였다. 끝이 났다는 건 이런 거였다. 네가 당연히 여기에 있을 거라 제멋대로 짐작하며 술이나 처먹고 환상이나 보는 그런 건 진짜 끝이 아니었다.

끝은 그딴 사치스런 낭만일 수 없었다.

진짜 끝은, 이선우와 누웠던 침대에 시커먼 사내놈들이 앉아 짜장면을 처먹고 있는 거였고, 그럼에도 뭐 하는 짓이냐고 밀어낼 수 없는 거였다.

소중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아까웠던 작은 집을 강도를 맞듯 빼앗기는 것이 이별이었고,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이선우를 함부로 만질 수도 있는 게 이별이었다.

생각만으로 머리가 돌 것 같은 그런 일이, 이별이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문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뿐일까. 이선우가 두 달 전에 서울을 떠났던 것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어느 날 그녀가 크게 다쳐도 모르는 게 이별이다.

서유라처럼 사고로 한순간에 세상을 뜬다고 해도 살아 있는 줄 알고서 꿈이나 꾸는 그런 씨발스러운 일이 이별이었다.

문도는 소리 내서 웃었다. 깨달음은 더없이 명료했다.

그런 거였네. 내가 뭘 몰랐어. 끝난다는 게 어떤 건지 내가 몰랐어. 너만 안 보면 되는 줄 알았지. 네가 진짜 없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몸을 돌린 문도는 핸드폰을 들고 명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전무님.

“이선우 어디 있는지 찾아요.”

— 아……. 네. 알겠습니다.

“세종에 이모가 있습니다. 거기부터 시작해요.”

그리움 따위 필요 없다. 사랑했던 기억 따위, 필요 없다. 환영 속의 이선우? 지겨웠다. 부서지는 집을 매일같이 짓고 있는 미친놈도 지긋지긋했다.

진짜 이선우가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선우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꼴을 보느니 다시 가져야겠다. 울고 웃고, 화를 내고 슬퍼하는 이선우를, 살아 움직이는 이선우를 다시 가져 봐야겠다.

그러고 보면 이선우에 대해선 늘 생지랄을 떨고서야 깨닫는 바가 있었다. 돌고 돌아 결국은 알게 되는 것. 너는 놓아지지 않는다는 것.

어디를 가.

나를 두고 네가 어디를.

서문도는 이선우를 놓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을 돌아온 결론이었다.

* * *

생리가 없다.

선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약국 앞을 서성였다. 원래 불규칙한 편이라 한 번 정도 건너뛰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두 달째였다.

오늘 남자를 보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났을 수도 있었다.

운주사에서 서문도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낯선 사람 보듯 그녀를 보던 남자를 돌아보지 않으려 힘껏 액셀을 밟았다.

앞만 보고 한참을 달리다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마음을 진정시킨 뒤 다시 출발을 하는데, 오랫동안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아닐 거야.

원래도 불규칙한 편에, 큰 대회가 있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건너뛰는 일이 없지 않았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까지 약은 꼬박꼬박 먹었다. 서문도도 피임은 성실히…….

허벅지 안쪽으로 불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던 감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순간 선우는 숨을 멈추었다. 회장이 죽던 날 호텔에서 한 번. 삼우제가 끝난 날에도…….

약은 먹고 있었잖아.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하는데 밥 냄새에 속이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헛구역질이 나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머릿속으로 날짜를 거꾸로 세었고, 최근에 이상 징후가 있었는지도 뒤집어 생각해 보았다.

아니라고 믿었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지막 두 번의 정사가 마음에 걸렸다.

두 달이 넘도록 생리를 하지 않았고,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도 선우를 불안하게 했다.

결국 물 한 모금을 넘기지 못하고 약국으로 달려왔다. 그래 놓고 들어가지 못해 서성이는 중이다.

질끈 눈을 감은 선우는 약국 문을 열었다. 카운터를 지키는 직원에게 다가가 임신 테스트기를 달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로 직행했다. 선반에 놓아둔 뒤 문을 닫고 나왔다. 테스트기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임신이면…….

그 뒤는 생각나지 않았다. 깜깜한 먹물 같기만 하다. 선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 시계를 바라보다가 3분이 지난 뒤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두 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선우는 세면대를 짚으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

* * *

“이선우 씨, 3번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세요.”

세종에서 제일 크다는 산부인과는 평일 오전에도 북적였다.

동그랗게 부른 배를 안고 있는 여자들 사이에 앉아 선우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고, 선우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앉으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안경을 쓴 의사는 이모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선우는 잠시 숨을 들이마신 뒤, 의사에게 말했다.

“임신인지 확인을 하려고 왔어요. 어제 테스트기로는 양성이 나왔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에게 마지막 생리일과 관계일을 말하고, 초음파 기계가 연결된 의자에 앉았다.

티셔츠가 걷어지고 배 위에 차가운 젤이 발렸다. 어둑한 진료실에 선우의 심장 소리만이 두근두근 울리는 것만 같았다.

“자, 어디 한번 볼까요?”

의사가 초음파 탐촉기를 선우의 배에 댔다. 둥글게 문지르며 화면을 바라본다. 흑백의 부채 모양 화면에 검은 동그라미가 있고,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아기가 있네요. 보이시죠? 여기 머리, 배, 다리.”

밤새 생각을 했다. 아이가 있다 해도 놀라지 말자고, 의연하게 대처하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 젤리곰같이 생긴 아기를 보자 울컥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 보여요. 선생님, 아기가 보여요.”

선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중년의 의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선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흘렀다.

“8주 되었네요. 심장 소리 한번 들어 볼까요?”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다시 한번 탐촉기를 선우의 배에 가져다 댔다. 지직거리는 소리 위로 마치 기차가 달리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쿠궁쿠궁쿠궁— 힘차게 뛰는 소리에 뜨거운 것이 북받쳐 올라 선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엄마가 아기를 많이 기다렸나 보다. 아기 심장 소리도 좋고, 잘 있어요. 우리는 다음 진료일에 볼까요?”

의사의 말에 선우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밖에서 다음 진료일 예약하시고 임신확인서도 받고, 산모 수첩도 받고. 엽산, 먹고 있었나요?”

“아니요.”

“처방해 줄 테니까 챙겨 먹고요.”

네, 네. 고개를 끄덕이는 선우에게 의사가 웃어 준다.

“자. 아기 사진.”

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었다. 다시 눈물이 뿌옇게 고여 들었다.

밤새 생각했었다. 아이를 갖게 되면 어떡하지. 앞날을 생각하면 지우는 게 맞는데. 그게 맞을 텐데. 일단 병원에 가서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고 그때 다시 생각을 하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단숨에 날아갔다. 그녀의 아이였다. 그녀의 배에서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그녀의 아기.

“안녕.”

선우는 작은 젤리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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