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10화 (110/168)

110. 운주사 @AW

서유라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선우는 꽃집 앞에 차를 세웠다.

“소국 한 다발만 주세요.”

흰색 소국이 풍성한 꽃다발로 만들어지는 동안 선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날씨가 스산해서 걱정했는데 오늘은 춥지만 하늘만큼은 맑은 날이었다.

“날씨가 추워요. 가을도 이제 다 간 것 같죠? 국화가 물만 갈아 주면 오래가거든요, 이건 영양제인데 물에 타 주시면 돼요.”

“아, 절에 가는 거라서요. 영양제는 안 주셔도 괜찮아요.”

“그러시구나. 예쁘게 포장해 드릴게요.”

상냥히 웃는 꽃집 주인에게 선우도 웃어 주었다. 닭발에 소주를 사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절에 가져가는 건 아닌 것 같아 선택한 게 꽃이었다.

꽃다발을 받아 들고 차에 탄 선우는 내비게이션에 운주사의 주소를 입력했다. 한 시간 반. 주행 시간과 함께 지도 위에 푸른 길이 생기는 것을 보고 시동을 걸었다.

가을도 다 지나 겨울이 코앞이었다. 얼마 전에 겨울옷을 꺼내다가 서유라가 물을 뿌렸던 코트와 블라우스를 발견했다.

그다음 날 별채로 들어가느라 드라이를 할 시간이 없어서 말리기만 하고 그대로 두었더니 물 얼룩이 남아 있었다.

‘블라인드 달으라고!’

면접을 보았던 첫날 서유라가 했던 말이었다. 발을 쿵쿵 구르면서 나타나선 욕을 하며 블라인드를 달아 놓으라 했었다. 그리고 선우를 발견하고는 생수병째로 물을 뿌렸었다.

서유라와의 날들을 생각하면 오늘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 많았었다. 햇빛이 잘 드는 거실에서 사진도 많이 찍어 주었고,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는 서유라를 깨우기도 참 많이 깨웠다.

그래서일까.

분명 힘들었던 시간인데 자꾸만 미화가 된다. 서유라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시간도 아니었고. 나중엔 잘 지냈었지.

사실은 잘 지냈던 날들보다 참고 견뎌야 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좋은 말을 들었던 날보다 상처 되는 말을 들었던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야 너는 눈썹도 잘 그린다.’

서유라의 목소리가 떠올라 선우는 옅게 웃었다. 블라인드를 달아 놓으라 난리를 치곤 했지만, 햇빛 아래에서 사진을 찍을 때 제일 환하게 웃었던 사람이었다.

서유라에게 가는 길이 맑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선우는 속력을 높였다.

운주사에 도착하니 오후 3시였다.

주차장에서 운주사 입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드높은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고 있는 산책로를 걷다 보니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절의 입구가 나왔다.

“저, 위패를 모신 곳에 가려고 왔는데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선우는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며 물어보았다.

“명부전으로 가시면 되세요. 대웅전 왼쪽에 있어요.”

“감사합니다.”

산책로가 이어지더니 사천왕문이 나왔다. 전에 외할머니를 따라 절에 올 때면 할머니가 합장하며 일일이 인사를 드렸던 게 기억나 선우도 인사를 올렸다.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니 우뚝 선 대웅전이 보였다. 대웅전을 제외한 다른 법당들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아주 크고 넓은 절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선우는 대웅전에 먼저 절을 올린 뒤, 명부전을 찾았다. 장 여사의 말에 따르면 서유라의 유해는 선산에 뿌리고 위패는 이곳에 모셨단다.

수없이 많은 위패가 걸려 있는 명부전에 서서 선우는 제일 마지막에 걸린 위패를 찾았다. 서유라의 이름을 보는데 눈물이 고여 들었다.

한참 그 이름을 바라보다가 꽃을 내려 두고 부처님께 절을 했다. 두 손을 모아 무릎을 꿇고 엎드려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세 번을 내리 절하며 간절히 빌었다.

유라 씨 편히 쉬게 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합장을 하여 인사를 드리고 다시 위패 앞에 섰다. 서유라가 했던 짓을 생각하면 극락이나 천국에는 못 갔을 것 같다. 그래도 편히 쉬었으면 한다.

입구에 선 서유라가 화를 내며 내가 왜 못 들어가냐고 발을 구르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해 피시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르겠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무리 이렇게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존재했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더는 볼 수 없는 것. 그리하여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이제 더는.

선우는 손을 모아 유라에게도 빌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이제 더는 내 곁의 사람들이 먼저 떠나지 않게 해 줘요. 나는 너무 많이 보냈어. 이제 누군가를 잃는 건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고요하고 깨끗한 곳이다. 엄마와 아빠, 민우와 서유라를 위해 등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조용히 법당을 나왔다.

* * *

“지금 올라가는 길인데 운주사 들렀다 가려고요. 네, 기다리지 마세요.”

우현희와의 통화를 마친 문도는 속력을 줄이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오창 공장에 들를 일이 있어 내려온 김에 서유라의 49재가 생각나 들렀다 올라가려는 참이다.

위패 등록을 하며 받았던 주차증이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나는 박소영에게 주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를 드렸던가. 차에 두었던가.

수면제 처방을 받은 이후로 나타난 새로운 증상이다. 어떤 기억들이 전생처럼 멀었다. 잠들지 않는 신경들을 억지로 잠들게 하는 약은 한 번씩 현실을 꿈처럼 만들곤 했다.

일종의 유체이탈과 비슷했다. 어떤 순간순간이면 제 몸에서 쓱 빠져나가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을 허공에 떠서 관조하듯 바라보게 되었다.

그럴 때면 꼭 현실은 꿈처럼 느껴진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소리를 들어도 웃을 수 있고 심장이 지끈거려도 농담을 할 수 있었다.

이래서 서유라가 약을 못 끊었나. 네게도 조절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까. 자신의 의지로 통제가 되지 않는 무엇이 있었나. 그래서 그렇게 약에 절어 있었나.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긴 일이다. 그토록 경멸했던 서유라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니.

수면제를 처방받은 건, 꿈에 나타나는 미친놈 때문이다.

꿈속의 그는 매일 깨진 벽돌을 모았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모아 새로 쌓는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른다는 듯 부서지면 쌓고 부서지면 또다시 쌓았다.

지켜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을 넘어 두 달이 되어 가니 이쪽이 미칠 지경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눈이 감기지 않는데, 술을 마시고 눈만 감으면 미친놈이 나와서 벽돌을 쌓았다.

끈질기고 미련하게 폐허에 다시 집을 짓는 남자는 포기를 몰랐다.

그만.

더는 그 꼴을 못 봐주겠을 때, 문도는 미친놈에게 말했다. 다 끝났다고. 그러니 미련 버리고 그만하라고.

붉은 눈을 한 미친놈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나는 다시 시작해.

우스웠다. 부서진 벽돌로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다 쓰러져 가는 집을 지어 무엇하게. 이 집에 그 여자를 부르기라도 하게? 바람이 숭숭 새는 집을 지어 놓고 내가 다 고쳤다, 자랑이라도 하게?

미친놈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가 파편을 주워 든다. 반으로 갈라진 벽돌을 골라 후후 불어 먼지를 턴 뒤 깨끗한 땅에 다시 내려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중히 벽돌을 쌓고 있다. 무너져 내릴 것이 뻔한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남자는 벽돌을 쌓았다.

문도는 그쯤이 되자 깨달았다. 내가 미쳐 가는구나. 자야 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내가 미쳐 가고 있구나.

그날로 술을 끊고 처방을 받았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분량의 약을 먹고 눈을 감았다. 강제로 잠을 자게 된 뒤로 미친놈은 보이지 않는다. 꿈처럼 부유하는 순간이 늘었을 뿐이다.

낙엽이 쌓인 길에 오후의 햇살이 가득했다.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보인다. 운주사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문도는 창문을 조금 열고 담배를 물었다.

‘너도 피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서유라에게 불을 붙여 주는 심정으로 라이터를 켠 뒤 한 모금을 길게 빨았다. 절에서 피울 순 없는 노릇이라 차에서 먼저 한 대를 올려 주었다.

담배를 거의 다 태워 갈 때쯤 주차장이 보였다. 문도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핸들을 꺾었다. 그늘이 남은 자리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10미터쯤 걸었을 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멀리 치맛자락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자 한 줄기 햇살이 길게 눈을 찌르며 시간이 천천히 멎는다.

바람도 햇볕도 멎은 길을 여자가 걸어온다. 선이 고운 몸과 고요한 걸음걸이가 닮았다. 가녀린 하얀 목과 작은 얼굴이 닮았다.

이선우를 닮은 여자의 표정이 굳더니 아주 짧게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지나가는 여자를 멍하니 보았다. 꾹 깨문 입술과 무표정한 얼굴이 묘하게도 이선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가 문도를 스쳐 가는 순간, 가늘게 뜬 시야 속에서 금빛 먼지가 춤을 추었다.

심장이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꿈처럼 모든 것이 부유하며 시간이 멎는 듯하다.

익숙한 일이다. 이선우의 환영을 보는 것. 심장이 할퀴어진 듯 아파 오는 것.

문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몇 초만 지나면, 이 순간만 지나면.

다 괜찮아지는 것을 안다. 깊게 숨을 쉰 문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환영이었구나, 생각을 하는데 주차되어 있던 흰색 차가 그를 스쳐 갔다.

운전석 안에 꼭 이선우처럼 생긴 여자가 타고 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의 뒷모습을 보는데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뛰었다.

아니. 너일 리 없어. 진짜 너였을 리 없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뜨거운 것이 목을 치고 올랐다. 핏물 같은 마음이 울컥 터져 나오며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문도는 정신없이 달려가 멀어지는 차를 쫓았다. 흙길에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지는 차를 이를 악물고 쫓았다. 가슴이 터질 듯하고 시야는 어지럽게 흔들렸다.

얼마를 달렸는지 모른다. 문도는 시야에서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멈추어 섰다. 타는 듯이 목이 말랐고 거칠어진 숨에서 쇳내가 났다.

“씨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이선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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