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늦가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커다란 낙엽이 길가를 뒹구는 늦가을의 어느 날, 선우는 외투를 여미며 유치원 문 앞의 벨을 눌렀다.
딩동.
소리가 울리자 열매반 교사 정미영이 눈으로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수아 데리러 왔어요.”
“잠시만요, 금방 데리고 나올게요. 수아야, 발레학원 선생님 오셨네. 가방 챙기자.”
교실의 열린 문 너머로 수아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내 선생님 왔대.”
“친구들이랑 인사하고.”
“내일 또 만나자,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문 앞에서 열심히 인사를 건넨 수아는 선우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짙은 분홍색 트렌치코트에 옅은 분홍색 레이스 치마를 입은 수아가 귀여워서 선우는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수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선우를 꼭 안았다. 사과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수아 사과 먹었구나?”
“오후 간식이 사과파이였는데! 선생님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냐면.”
참새가 날아와서 말해 줬지. 선우는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이가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었다.
서유라가 죽은 지 40일이 넘어간다.
그사이 선우는 이사를 했고, 작은 규모의 어린이 발레학원에서 수업도 하나 맡았다.
선우는 아이의 이름표가 붙은 신발장에서 반짝이 구두를 꺼냈다. 수아의 앞에 놓고, 작은 발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찍찍이를 떼어 주었다. 여섯 살 수아가 발을 쏙 집어넣고는 스스럼없이 선우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저 여친 바뀐 거 아세요?”
“아니, 몰랐는데?”
“원래 효림이랑 저랑 여친이구요, 지아랑 유주가 여친인데요, 오늘은 서로 바꿨어요. 사이좋게 지내야 하니까요.”
“그렇구나. 여친은 한 명만 할 수 있는 거야?”
“네. 바비 보면은요, 남친 나오거든요? 제일 친한 남자친구가 남친이니까 젤 친한 여자친구가 여친.”
선우는 말간 아이의 손을 잡고 주차장까지 걸었다. 노란색 승합차에 수아를 앉히고 벨트를 꼭꼭 매어 주는데 아이가 킁킁 선우의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선생님은 냄새도 예뻐요.”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서, 선우는 잠시 숨을 골랐다.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스치는 웃음이 희미하게 잔상처럼 떠오를 때가 있었다.
선우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수아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수아가 더더더더 예쁜데?”
수아가 까르르 웃었다. 마음은 금방 따뜻해지고 남자의 잔상은 멀리 물러났다.
작고 따뜻한 손, 통통한 볼,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달콤한 냄새. 이런 것들에 위로를 받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기대어 사는 날들이기도 했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러 가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아득히 먼일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바로 어제의 일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까마득해지기를 반복한다.
“다 왔네.”
선우는 노란 은행잎이 한가득 깔린 길을 지나 주택가에 위치한 발레학원 앞에 차를 세웠다.
“원장님, 수아 들어왔어요.”
“네. 수아 안녕?”
원장인 수진이 밝게 인사를 했다.
상가 주택의 2층에 위치한 ‘백조 발레학원’의 원장은 선우보다 열 살 정도 많았는데, 대전의 큰 학원에서 오래 일하다가 세종에 학원을 차렸다고 했다.
원래 개나리반을 맡았던 교사가 교통사고가 나서 발에 깁스를 하는 바람에 급히 사람을 구하게 되었고, 선우는 잠시 그 자리를 대신 하는 중이었다.
먼저 온 아이들이 모여 있다가 선우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수아에게 발레복을 입혀 주고 선우도 외투를 벗었다. 나란히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 앞에 서서 허리를 곧게 펴며 말했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할게요.”
네에, 꽃 같은 아이들이 밝게 대답을 했다. 기운을 북돋아 주는 영롱한 목소리에 선우는 미소를 지었다.
저녁은 조금 이르게 이모와 칼국수를 먹기로 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따뜻한 국물이 당긴다는 미숙을 태우고 ‘초당 칼국수’로 향했다.
“보쌈 소자 하나랑 칼국수 1인분이요.”
미숙이 자리에 앉으며 바로 주문을 했다. 가운데 있는 화구에 육수가 올라가고 주변에는 보쌈과 김치, 살짝 절인 배춧잎이 놓였다.
“이모, 수요일엔 어디 좀 다녀올게요.”
선우는 미숙의 앞으로 보쌈을 가까이 놓아주며 말했다.
“어디?”
“친구한테요. 오래 못 봐서 잠깐 보고 오려고요.”
오는 토요일이 서유라의 49재였다. 그날은 식구들이 올 테니 한적한 평일에 미리 다녀올 생각이다.
“친한 친구야?”
친했었나. 선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정이라기엔 애증에 가까운 관계였지만, 서유라에겐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친구가 되어 주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막내 아가씨 이천 운주사에 있어요.’
납골당에라도 가 보고 싶어 망설이다가 장 여사에게 물어보았다. 그다음 날 운주사 입구까지 갔었는데 박소영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여 그대로 뒤돌아 왔었다.
“고기가 맛있게 삶아졌네. 선우야, 아~ 해. 단백질 먹어야지.”
미숙이 고기 위에 무채를 얹어 선우의 입에 밀어 주었다. 단백질을 챙겨 먹어야 힘이 난다는 이모의 레퍼토리를 들으며 입을 벌려 받아먹는데 순간 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모. 괜찮으세요?”
선우는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미숙에게 물었다. 미숙이 왜 그러냐는 듯 선우를 보았다.
“아, 돼지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그래? 내가 먹은 건 안 났는데.”
미숙이 다시 하나를 먹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기름진 부위라 그랬나 보다,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냄비를 열었다.
팔팔 끓는 육수에 칼국수 면을 넣는데 미숙이 선우에게 말했다.
“대학원 생각은 해 봤어?”
“해 보긴 했는데 아직 결정은 못 했어요.”
세종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모부가 공연 기획이나 센터 근무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운을 띄워 왔었다. 대학원에 가는 건 어떻겠냐며.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도 들긴 했지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라 일단은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중이다.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요. 학원을 할까, 대학원을 갈까, 마음을 아직 못 정하겠어요.”
“뭐든지 너 좋은 대로 해. 이모부야 네가 너무 아깝다고 하지만, 아까운 게 대수니. 사람은 그저 행복하게 살아야지.”
“네. 아르바이트 끝날 때까지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그나저나 강물은 왜 이렇게 예쁘니. 갈대밭 좀 봐.”
금강의 물살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선우도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 있을 서유라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계절이었다.
* * *
이른 아침, 문도는 본관의 현관문을 열었다. 다이닝룸에 불이 밝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장 여사가 고개를 내밀더니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전무님 오시네요.”
얼마 전부터 아침은 본관으로 건너와서 먹었다. 둘인데 따로 차리게 하기도 뭐하고 부회장에 취임한 어머니와 나누어야 하는 이야기들도 늘었기 때문이었다.
“왔니?”
“네.”
대답하며 의자를 빼서 앉았다. 장 여사가 맑게 끓인 뭇국과 새로 담근 김치를 문도의 앞에 내려놓았다.
“토요일이 아가씨 49재인 거 알고 있지?”
“네.”
우현희는 간단히 답하는 문도를 조금 오래 바라보았다. 태연한 표정으로 뭇국을 뜨고 있는 아들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인다.
“마지막이 될 텐데, 같이 갈래?”
박소영은 49재를 끝으로 여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우현희는 그녀가 그토록 소원하던 커피 프랜차이즈를 낼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박소영에게 건네주었다.
“번거롭게 뭐 하러요. 따로 한적할 때 다녀올게요.”
문도가 몇 술 뜨는 시늉을 하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장 여사가 달인 한약을 들고 와 문도의 앞에 내려놓았다.
“큰일도 여러 번 있었고, 몸도 허해질 계절이 되어서 한 재 내렸어.”
“잘하셨어요.”
문도가 데워진 한약을 군말 없이 마셨다. 꿀꺽꿀꺽 마실 때마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 현희는 커피맛 사탕을 문도에게 밀어 주었다. 그마저 기계적으로 입에 넣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이만 출근할게요.”
사탕을 입에 물고 문도가 말했다. 현희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들은 살이 내렸고, 선이 날카로워졌다. 얼마 전에는 수면제 처방을 받았다고 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눈빛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눈을 볼 때면 현희조차 공허해지는 느낌이었다. 껍데기만 남아 서문도의 흉내를 내는 아들은 아주 가끔씩 멈춰 서곤 했는데, 그럴 때면 눈을 지그시 감곤 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누구를 삼켜 내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힘들지는 않아?”
확인차 물어보는 말에 문도는 늘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힘들 게 뭐가 있어요.”
평소라면 그래 알았다, 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얼마 전 장 여사에게 이선우의 소식을 들었다. 서유라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고 했다.
이모가 있는 세종에서 지내며 학원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고. 마지막까지 챙겨 주어서 고맙고 죄송하다고 했단다.
“나는 괜찮았었어.”
뜬금없는 말에 문도가 눈썹을 들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현희를 보고 있었다.
“이선우 씨 말이야. 언젠가 네가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 같았거든. 그러면 왠지 그럴 것 같더라, 그렇게 말해 주려 했었지.”
그 말에 문도가 피식 웃었다. 뭐 그런 때 지난 이야기를 하냐는 듯 웃더니 농담처럼 말한다.
“진작 말해 주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현희가 묻자 문도가 먼 곳을 보았다. 그러다 담담히 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요.”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이 얼핏 단단해 보였다. 견고하게 뒤집어쓴 가면은 쉽사리 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너도 버틸 만하니까 버티는 거겠지.
현희는 돌아서는 아들의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여사님, 커피 한 잔만 더 내려 주세요.”
인연이 그저 거기까지였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현희는 낙엽이 지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