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07화 (107/168)

107. 당신이 왜

“자, 이모부 특선 버섯전골이 나갑니다. 몸에 좋은 버섯을 골고루 듬뿍 먹어 보아요.”

진철이 식탁 가운데에 보글보글 끓는 버섯전골을 올려놓았다. 앉아 있는 미숙과 선우에게 한 그릇씩 담아 주며 물었다.

“선우 집 보러 갔던 건 어떻게 됐어?”

“응. 선우가 맘에 든다 그래서 계약하려고. 낼모레 집주인이랑 만나서 계약서 쓰기로 했어.”

“이거 참. 선우 나가고 나면 이모랑 둘이 심심해서 어쩌나.”

진철이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중심 상가 지나서 10단지예요. 걸어서 20분도 안 걸려요. 자주 놀러 올게요.”

선우도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미숙과 진철은 뭐 하러 나가 사느냐고, 그냥 같이 살자고 했지만 선우는 거절을 했다.

주말이면 사촌 오빠네 부부가 와서 머물기도 하고, 퇴직한 이모부도 주로 집에 지내셔서 선우가 있으면 불편할 거였다.

“10단지 좋지. 당신 보기에도 괜찮았어?”

“응. 주인 양반 딸이 살았다는데, 아기 키우면서도 깨끗하게 잘 썼더라고. 손 볼 거 하나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되겠더라. 그치, 선우야? 커튼 정도 하면 될까?”

“네. 거실이랑 침실에 커튼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이틀 동안 예닐곱 군데를 돌아보았는데 그중에 제일 마음에 든 집이었다.

나무가 많은 널찍한 단지, 이모네와 걸어서 다닐 만한 위치, 햇빛이 잘 드는 창.

전부 다 마음에 들었지만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따뜻한 그 집의 분위기였다.

동그랗게 배가 부푼 엄마와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벽에 걸린 가족사진과 발이 폭신한 매트. 아기용품이 곳곳에 놓인 거실.

그 집이라면 왠지 혼자서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약을 하기로 했다.

“에어컨도 시스템으로 되어 있고, 가전이랑 가구도 필요한 것만 사면 되겠어. 원래 들어오기로 했던 집이 청약 당첨돼서 못 들어오는 거래. 집주인 딸도 둘째 가져서 더 큰 평수로 이사 가는 거고. 터가 좋은 거 같아.”

미숙이 말하며 전골을 한술 떴다. 이제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며 밥을 먹지만, 지난 며칠은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희미했다.

민우의 음성파일이 풀렸던 날, 사촌 오빠와 애를 써서 막았는데도 이모는 음성파일을 듣게 되었다. 눈물을 많이 흘린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서유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학원 파트타임 강사 자리에 면접을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차 안에 틀어 놓았던 라디오에서 그 소식을 듣는데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멈추어 있기만 했다.

빵, 하는 가벼운 경적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한적한 길가에 차를 댔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열었더니 검색할 필요도 없이 포털 메인에 떠 있었다.

‘최지상, 연인 서유라와 동반 자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전부 거짓말인 것 같았다. 누군가 아주 질 낮은 농담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서유라가 어떤 사람인데. 자기 몸 하나는 끔찍하게 아꼈던 사람인데. 자살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닐 거라고 애써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었다.

눈물이 터졌던 건 그날 새벽이었다.

멍하니 밤을 지새운 뒤, 문득 생각이 나서 서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겠지. 그렇게 죽어 버릴 사람이 아니니까 받아 봐. 그런 마음으로 전화를 거는데 아무리 걸어도 서유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우야. 빨리 좀 와 주라. 나 너무 힘들어.’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는 사람은 없는데, 마지막 목소리는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눈물은 그제야 흘러나왔다. 이모가 자고 있는 안방에 소리가 들릴까, 선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래도 이제는 정리가 되어 간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며 최지상과 서유라로 들끓었던 인터넷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선우도 일상을 살았다.

이모와 함께 부동산을 다니며 살 집을 알아보고 침대와 식탁을 구경하면서, 학원에 출근할 날도 정했다.

적은 양이어도 미루지 않고 꼬박꼬박 식사를 하고 밤이 되면 처방받은 수면유도제를 먹고서 눈을 감았다.

재미있는 프로를 보면서 웃기도 했고, 이모와 멀리까지 드라이브를 다녀오기도 하며 텅 빈 속을 자꾸 채워 보려 했다.

“학원은 언제부터 나간댔지?”

밥을 다 먹고 사과를 들고 와 거실에 앉을 때 미숙이 물었다.

“내일모레부터 나가요.”

“그래도 우리 민우 일이 이렇게 해결이 되네. 영영 억울할 줄 알았는데 이런 거 보면 인과응보가 있긴 있어. 그치? 오늘은 뉴스나 좀 볼까.”

이모가 TV를 틀며 말했다. 선우는 사과를 깎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안쪽에서 설거지를 하던 진철이 묻는다.

“당신은 생강차 마실 거지? 선우는?”

“저는 괜찮아요.”

대답을 하며 붉은 사과 껍질을 깎다가 선우는 우뚝 멈추었다. 화면에…….

남자가 있었다.

“어머. 저게 뭐야. 그래, 어쩐지 내가 서도 그룹이 힘쓴 것 같다 했었지!”

미숙이 외쳤다.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차에서 내리고 있는 남자는 서문도였다. 믿을 수 없어서 그저 바라보고 있는데 붉은 바탕에 쓰여 있는 흰 글씨가 보였다.

‘서도 케미컬 서문도 전무, 최지상 사건과 관련된 정황 드러나’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 정면으로 비추어지는데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귀가 먹먹해지며 주위가 흐려진다.

당신이 왜…….

잠시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다. 어째서 서문도가 조사를 받나. 이걸 다 터트린 사람이 저 사람인데.

기자들을 향해 까딱 인사를 건넨 서문도가 검찰청 정문으로 걸어 들어간다. 다른 사람이라 믿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일 수 없었다.

거침없는 걸음걸이가 같았다. 태양을 가두어 놓은 것 같은 눈동자도 여전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웃지 않는 오만한 얼굴이 그녀가 아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이민우 씨 사망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한 말씀만 해 주시죠.’

성큼성큼 걷고 있는 서문도를 기자들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침착한 얼굴로 기자들 사이를 걷는 서문도의 걸음걸이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니다. 흐트러짐 없어 보였지만 남자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우는 알 수 있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날카로워진 얼굴. 피곤이 붉게 드리운 눈매.

회장의 장례를 끝냈을 때도 저것보다는 얼굴이 나았었다. 피곤하다며 그녀의 목덜미에 말없이 얼굴을 묻고 희미하게 웃었을 때도 저보다는 나았었다.

욱신 가슴이 아파 와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유라의 장례를 치렀으니 피곤하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하는데 화면에 흑백의 사진이 떴다.

선우도 보았던 사진이었다. 로얄 크라운 호텔 주차장에서 찍힌 서문도의 사진이다. 익명으로 누군가가 보내온 사진이라고 앵커가 설명을 한다.

다시 서문도가 화면에 비쳤다. 기자들 여럿이 여전히 뒤를 쫓으며 묻는다.

‘서중호 부회장과도 관련이 있나요?’

‘사건 조작을 지시한 게 서도 그룹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유가족분들께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마지막 질문에 서문도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하였다.

화면 속 남자가 선우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가만히 떴다가 감는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만 같을 때, 서문도가 말했다.

‘고인과 유가족분들께 깊은 사죄의 말씀드리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성큼 걸어 검찰청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는 선우의 귀에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유, 내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볼 거야. 아주 나쁜 새끼들이야, 저 새끼들은!”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힘껏 쥐고 있던 과도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서문도는 이 사건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사람이긴 했다. 서유라를 병원으로 보낸 사람이고 핸드폰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니까.

그러니 잘된 일이다. 서유라의 죽음과는 별개로 마지막까지 전부 밝혀지는 게 맞는 거니까.

잘된 일인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 * *

조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도는 대부분을 솔직히 답했다. 새벽 4시 14분, 서중호 부회장과의 통화를 마친 시간부터 시작해서 변호사를 대동하고 클럽에 입장한 것. 사망을 확인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한 것.

서중호 부회장의 고문 변호사인 장현성 변호사에게 남은 일들을 맡기고 현장을 나온 것. 그때까지 최지상은 현장에 있었던 것.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서유라를 바로 사설 응급차에 태워 재활병원으로 보낸 것까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부분은 핸드폰에 관한 것 하나였다. 분실된 핸드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진술했다.

조사를 마치고 나와 검찰청을 나서기 전, 문도는 복도에 서서 핸드폰을 들고 부회장의 번호를 눌렀다.

“어떻게, 마음은 정하셨어요?”

유리문 너머에서 그가 내려오길 바라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문도는 서중호에게 물었다.

—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그 정도는 하시라는 거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문도의 검찰 출두가 결정되는 순간, 우현희가 전면에 나서며 서중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서유라와 최지상의 사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문도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그룹의 명운을 걸고 자신과 전면전을 해야 할 거라고 말이다.

그때 우현희가 서중호에게 요구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것. 둘째, 대국민 사과를 할 것. 셋째, 부회장 자리에서 사퇴를 할 것.

문도는 서중호가 우현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6:4 정도라고 생각했다.

바로 코앞에 회장 자리를 두고 앉지 못하는 비극을 선택할 것인지, 끝내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해 아들과 부인을 상대로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할 것인지.

— 지독한 새끼. 애비한테 꼭 이래야 해!

그 말에 문도는 쓰게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들에게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는지.

“말씀 없으시면 거절하신 것으로 알아듣겠습니다.”

— 해! 한다고! 대국민 사과인지 뭔지 하면 될 거 아니냐! 너희 모자가 누운 자리엔 풀도 안 날 거다!

거칠게 전화가 끊겼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아버지가 제일 두려워하는 건 어머니와 서용호가 연합하는 일일 테니.

일평생 혼신의 힘을 다해 견제를 해 왔던 형에게 서도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정떨어진 와이프와 아들이라도 제 편으로 붙잡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였다.

이제 다 되었나.

문도는 로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쉬어도 될까. 잠시 눈을 붙여도 괜찮은가.

그래. 그런 것 같다. 문도는 뚜벅뚜벅 앞을 향해 걸었다. 플래시 불빛이 쏟아지는 길을 지나,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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