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이민우.mp4
눈을 뜨니 세상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선우는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았다. 음성파일이 풀렸다고 한다. 민우가 죽었던 그날의 음성파일이.
사촌 오빠로부터, 아현으로부터, 그밖에 민우와 민우의 사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메시지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선우야. 이것 좀 들어 봐. 엄마는 모르게 하고.
언니, 이거 들어 보셨어요? 이거 민우 맞죠?
그들이 보낸 파일명은 똑같았다.
이민우.mp4
이름만 보았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눈물이 툭 떨어졌다.
선우는 눈물에 갇혀 있는 파일명을 보았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 아래로 민우의 이름이 보인다.
재생 버튼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던 선우는 닿기 직전에 주먹을 쥐며 질끈 눈을 감았다.
누를 수 없었다. 차마,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알고 싶었는데.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 이 먼 시간을 돌아왔는데, 누를 수 없었다.
민우의 마지막 목소리라서.
선우는 일단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깊게 숨을 쉬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밤, 민우의 핸드폰 하나를 들고서 그 집을 나올 때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서문도는 보란 듯이 세상을 향해 폭탄을 하나씩 던지고 있었다. 어제는 사진, 오늘은 음성파일. 당신은 이걸 다 가지고 있었구나. 기막혀서 눈물이 고였다.
우리 민우의 목소리까지 가지고 있었으면서, 나를 그 긴 시간 동안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러니 말할 수 있었겠지.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그래 놓고 왜. 이제 와서 왜. 본인의 손으로 하나씩 터트리는 걸까.
서유라를 협박하기 위해서? 경영권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서?
왜……. 내게 끝까지 그렇게 잔인했을까.
이렇게 전부 폭로할 거였으면……. 한 번쯤은 자비를 베풀어 주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으면 불쌍하게 생각 좀 해 주지. 당신에겐 아무 쓸모도 없었던 우리 민우 핸드폰 돌려줄 테니 조용히 있으라고 하지.
그랬으면 나는 눈물 흘리며 감사하다고 했을 텐데. 숨긴 것, 속인 것, 거짓말한 것, 전부 죄송하다고 했을 텐데. 엎드려 발가락을 핥으라고 해도 핥았을 텐데.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남자를 떠올리며 선우는 눈물을 흘렸다. 종잡을 수 없는 그 남자는 선우를 산산이 부수어 놓고 아무렇지 않게 진실을 밝히고 있었다.
얼마나 염원을 했던가.
민우의 죽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세상이 알아주기를, 내 동생 민우는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이 당당히 밝혀지기를 얼마나 소원했던가. 그 하나를 위해 전부를 걸었다.
나는 전부를 걸어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당신에게는 이렇게 쉬운 일이었구나.
운명이 왜 이렇게 잔인한지 알 수 없었다. 선우를 절망으로 밀어 버린 남자가 진실의 빛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그날의 시간에 하나씩 불을 켜 준다. 마치 민우의 마지막을 위로라도 하듯이, 그녀 대신 단죄라도 하듯이.
그걸 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바라보는 기분을, 당신은 알까.
울지도 웃지도 못 하겠는 이 기분을.
눈물을 닦으며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건 전부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일이었겠지.
내 정체를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것도, 회장이 죽은 뒤에서야 민우 핸드폰만 쥐여 주고 내쫓은 것도.
승계 싸움을 벌이는 지금 이 시기에 파일들을 차근차근 터트리는 것도, 당신은 필요에 의해 필요한 행동들을 하는 것뿐일 테니, 나도 그럴게.
우리 민우의 마지막 그 순간, 들을게. 온 세상이 알게 된 그날의 진실을 나도 똑똑히 들을게.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니까.
최지상의 실체가 드러나는 모습을, 나머지 진실들이 차근차근 밝혀지는 모습을, 마침내는 벌을 받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게.
선우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민우의 마지막 시간이니까. 그날의 진실이니까.
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영재야!’
친구의 이름을 외치는 민우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선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서유라의 장례가 모두 끝났다.
발인을 마치고 추모 공원으로 올라와 지금은 화장을 하는 중이었다.
서용호, 서미경 일가는 조문은 왔지만 발인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룹 전체가 추문에 휩쓸려 있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조문객도 받지 않았다.
2층의 유족 대기실에는 정신을 거의 놓은 박소영과 그녀를 돌보는 매니저, 우현희와 서중호가 전부였다.
문도는 1층 화장로 앞의 긴 벤치에 앉아 로비 홀을 바라보았다. 벽에 붙은 전광판에는 서유라의 이름이 쓰여 있고 20분, 남은 시간이 카운트되고 있었다.
화장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 했다.
대형 트레일러 트럭의 아래로 빨려 들어간 서유라는 차체와 최지상과 함께 우그러졌기에 유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서유라가 죽었다. 그가 휘두른 칼에 의해.
이걸 원했나. 박소영의 울부짖음을, 서유라의 죽음을, 최지상의 시체를 원했나.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서유라는 서유라가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최지상은 최지상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를 바랐다. 그렇게 만들려고 했다. 이런 결과가 예상되었다면 중간에서 멈추었을까.
17분. 전광판의 시간이 줄어든다.
그가 아는 마지막 서유라의 모습은 이선우를 찾으며 울던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서유라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순간이었고, 처음으로 동정심을 가졌던 날이었다.
웃긴 일이다.
핏줄이라 생각한 적 없었는데, 그래도 이 죽음이 안타까운 걸 보면.
최지상의 죽음에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데 서유라의 죽음은 그의 발목에 넝쿨처럼 감겼다.
문도는 엷게 실소하며 거칠어진 얼굴을 손으로 비볐다. 조금은 허망한 눈으로 유리 벽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최지상과 서유라의 동반 자살로 세상은 한 번 더 발칵 뒤집혔다. 음성파일이 터진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사고가 났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트럭 운전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사체도 구별할 수 없이 으깨져 버렸다.
사고 소식이 알려지며 사건은 공중에 떠 버렸다. 죄는 남았으나 벌을 받을 사람이 죽어 버렸다. 무책임하고도 완벽한 결말이었다.
11분. 시간은 조금 더 줄어들었다.
서용호는 큰소리를 떵떵 쳤던 것에 비해 하루 만에 백기를 들었다. 서유라의 사망으로 삼 남매 연합의 근간이 흔들린 데다, 지분을 담보로 비자금을 당겨 쓰던 인심 좋던 곳간이 우현희의 소유라는 것을 아는 순간 더는 방법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8분.
서용호와 서미경의 반대로 인해 서유라는 선산에 묻히지 못한다. 뼛가루는 선산에 뿌리고 위패는 조부가 다니던 절에 안치를 하기로 했다.
우리 고모님은 죽어서도 홀대를 받네.
이선우도 이 소식을 들었겠지. 울었을까. 울었겠지. 마음이 외로운 이선우는 서유라에게도 정을 주었으니까 많이 울었을 거다.
이런 순간조차 이선우가 보고 싶은 자신이 기막혀 문도는 가늘게 웃음을 흘렸다.
5분.
눈을 뜨자 서유라의 시간이 5분 남았다. 붉게 빛나는 전광판의 숫자를 바라보던 문도는 허리를 세웠다. 핸드폰을 들어 장 변호사의 번호를 눌렀다.
— 네, 전무님.
“다음 파일 준비되어 있죠?”
— ……네. 그런데 전무님, 꼭 그렇게 하셔야만 할까요. 이대로 끝을 내는 건 어떠신가요.
“계획했던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도는 전화를 끊었다.
엊그제 최초 유포자가 경찰서에 핸드폰을 가지고 갔다. 죄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사적으로 친구에게 물어보았고, 친구 역시 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물어봤을 뿐이니.
섣부르고 경솔한 행동이었지만 당사자들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사건은 종결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마도 모두들, 이게 끝이라 생각하겠지만.
문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 정도에서 멈출 거였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적당한 선에서 조절할 생각이었으면 이선우를 제일 잔인한 방식으로 버리지도 않았다.
동생 핸드폰을 쥐고서 몰래 도망가게 두었겠지. 그렇게 할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수백 번, 수천 번을 생각했었다.
아무런 소용도 없을 핸드폰을 들고 도망치게 두고, 서유라는 멋대로 살라고 내쫓고, 경영권은 방어를 하고서.
아버지는 원하는 대로 회장이 되고, 서유라는 망나니로 살아가고, 최지상은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은 어둠에 묻어 놓은 채로.
적당히 정리가 된 어느 날 문득 이선우를 찾아가 내게 미안하지도 않냐고. 나는 진심이었는데 너는 나를 이용만 했던 것이냐 따져 물으며.
이선우의 죄책감을 이용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거짓의 가면을 쓰고 다시.
이민우의 마지막 목소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어 놓은 채로 다시.
그렇게 다시 거짓으로 지은 성을 만들어 너를 가두어 놓을까. 수백 번, 수천 번을 생각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선택을 결정하게 한 건 이선우의 어여뻤던 미소였다.
세종까지 데리러 간 그를 보며 뛰어왔을 때, 그를 보고 반가워하며 활짝 웃었던 미소. 눈이 부셔서 시간을 멈추어 놓고 싶었던 그 미소가 이 길을 선택하게 했다.
너는 그렇게 웃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런 잘못이 없는 너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에 전부를 걸고서 이 멀고 먼 길을 걸어온 너는, 티끌 없이 웃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유감.
그래, 유감이다. 서유라의 죽음도, 이선우의 눈물도, 박소영의 울부짖음도 유감이었다.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 알았더라면……. 그래, 어쩌면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적정선에서 타협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했으니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서 멈춰 버리면 죽어 버린 서유라만 억울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뭐 대단하게 일을 벌이는 건 아니다. 그저, 누구 한 사람쯤은 도의적인 책임이라도 져야 하니까.
불효자가 되겠네. 문도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유라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