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05화 (105/168)

105. 미안해

운전석에 앉은 지상은 초조한 얼굴로 빌라 입구를 바라보았다. 내려온다더니 왜 안 내려와. 욕을 뱉으며 서유라를 기다렸다.

오 대표에게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보란 듯이 저녁에 사진이 유포되었다. 배우 최지상과 소속사 플레이 엔터는 악의적인 모함에 참지 않고 강경한 대응을 하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한 직후였다.

메시지창은 터질 듯 알람이 울려 댔고, 디엠은 난리도 아니었다.

씨발, 씨발, 씨발.

서문도는 농락이라도 하듯 순차적으로 그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타깃은 명확했다. 서유라와 최지상.

그 폰 안에는 다른 사람의 사진도, 영상도 많았는데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오직 최지상과 서유라의 사진만 내보냈다. 이쯤 되면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회장이 죽은 뒤, 경영권이 어쩌고 하는 내부 싸움에 총알로 쓰이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서유라 하나만 족치면 될 일 아닌가.

터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서유라보다 최지상을 노린 듯 보였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게 다 서유라 그 미친년 때문이야.

그러게 왜 그 새끼랑 척을 지고 지랄이야. 지상은 욕을 뱉으며 핸들을 쿵, 내리쳤다.

후……. 그래도 잘해 줘야지.

지상은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빌라 입구를 바라보았다. 동이 트는 새벽, 몰래 호텔을 빠져나와 서유라를 기다리는 중이다. 서유라만이 그에게 남은 기회였으니까.

지상은 다시 천천히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약간의 희망이 남아 있다. 마약이 문제이지 젊은 남자가 연애했던 것 정도는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세상이다.

여자친구였던 서유라의 꼬임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채 약을 맞게 되었다고 하면 된다.

그 뒤로도 호기심에 한두 번 더 그런 일이 있었지만 곧 나쁜 일임을 자각하고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서유라가 저 사진과 영상들을 빌미로 협박을 해서 헤어지지는 못했다고. 그러다 더는 견딜 수 없어 헤어지자고 했더니 앙심을 품은 서유라가 사진을 풀고 있는 거라고.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다 하고, 모든 위약금 달게 물겠다 하고, 자숙하겠다 하고.

1년 정도 쉬었다가 적당한 소속사를 찾아서 위험한 매력을 가진 나쁜 남자 역할로 돌아오면 된다.

아슬아슬한 매력의 깡패 새끼도 좋겠고,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조직폭력배 역할도 좋겠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한민국 연예계이다. 사내새끼야 무슨 잘못을 하든 연기력만 좋으면 대충 눈감고 넘어가 주는 곳 아니던가.

그래. 그렇게 하면 다시 재기할 수 있어.

지상이 핸들을 꽉 쥐었을 때였다.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화면 위에 쓰여 있는 서유라의 이름에 고개를 들어 보니 빌라 입구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유라가 보였다.

자. 이제 다시 연기를 펼쳐 봐야지.

지상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차에서 내렸다. 그를 발견한 유라가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 * *

지상은 출퇴근으로 밀릴 것 같은 길을 피해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는 건데!”

서유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차에 탔을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서유라는 내내 신경질을 부렸다. 지상은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

“누나랑 오랜만에 나왔잖아. 드라이브나 할까 하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어딜 가겠어요. 차에서 얘기해야죠.”

“너는 지금 웃음이 나와?”

썅, 내가 웃고 싶어서 웃겠냐. 지상은 속으로 욕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누나한테 화를 내서 뭐 하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김영재 걔 첨에 쓰러졌을 때 내가 119 부르자고 했지! 그때 구급차만 불렀어도!”

“누나 그땐. 내가 말했잖아. 나 이제 뜨고 있는데 이미지 다 망가진다고. 누나도 동의했었고.”

“다른 애 대가리는 왜 갈겨! 왜 니 맘대로 약을 찔러 넣어서 죽여!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다!”

하아. 지상은 욕을 씹어 삼켰다. 좋게 좋게 말하려는데 이년이 왜 이러지?

“애들 끼고서 놀고 싶다 그런 게 누군데. 약 실컷 빨게 클럽 잡으라 한 게 누군데? 누나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그러는 누나는 그때 뭘 했어? 결국 걔들 죽을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잖아.”

이를 악물고 이야기하는데 서유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럼 이게 다 나 때문이라고?”

“아니. 내 말은…….”

후우. 지상은 심호흡을 했다. 지금 마음 같아선 서유라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우리가 같이 저지른 일이니까 해결도 같이해 보자는 거지.”

“사진 풀린 거 보고도 몰라? 이게 해결이 되겠니?”

“나한테 방법이 있거든. 잘 들어 봐.”

지상은 코너를 돌며 말했다. 쭉 뻗은 외곽 도로를 보며 일단 입에 발린 말을 했다.

“내가 누나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흥, 하고 서유라가 콧소리를 냈다.

“나는 누나 없으면 못 살아. 진짜로. 내가 왜 더럽고 치사한 배우 일을 열심히 하는데. 할리우드 진출하면 누나랑 미국에서 재밌게 살고 싶었거든. 내가 누나랑 어울릴 만한 남자 되고 싶어서 노력 중이었던 거, 알지?”

흘깃 서유라를 보았더니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감정은 풀린 것 같다. 지상은 슬슬 본론을 꺼냈다.

“지난번에도 누나가 나 구해 줬잖아. 이번에도 누나가 나 좀 구해 줘. 응? 나 구해 줄 사람 누나밖에 없어.”

“무슨 소리야?”

“사진 퍼트린 거 누나라고 그러자. 우리 사귀는 중이었는데 내가 연기에만 집중하겠다고, 헤어지자고 하니까 누나가 화나서 그런 거라고. 응? 누나 제발.”

“뭐?”

서유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상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 방법밖에 없어. 그렇게 먼저 우리 쪽에서 해결을 해야 해. 그치만 알지? 내가 진짜 헤어지자는 거 아니고 그런 척만 하자고.”

지상은 잠깐 시선을 돌려 서유라를 본 뒤에 절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누나랑 어떻게 헤어져. 그러고 나 이 위기만 넘기면 그때 우리 결혼을 하든, 미국을 가든. 응? 아직까진 괜찮아. 지금 터진 건 변명할 수 있다고. 더 큰 거 터지면 그땐 우리 둘 다 방법 없어.”

간절한 목소리로 말한 지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에는 눈물도 고여 있었다. 그런 지상을 물끄러미 보던 서유라가 코웃음을 쳤다.

“이 새끼 이거 가만 보니까 아주 웃기네? 한마디로 내가 다 뒤집어써라, 이거잖아?”

“누나가 뒤집어쓰라는 게 아니라. 그냥 연인 간의 다툼 정도로 정리를 하자는 거야. 그 사건 터지면 우리 둘 다 감방 간다고.”

지상이 한 번 더 설득을 하려 하자 서유라가 비웃음을 웃었다.

“야. 감방은 너나 가지. 내가 왜 가니? 신고하지 말랬던 것도 너고, 걔네들 죽인 것도 너잖아. 인생 망한 건 넌데 왜 날 끌어들여?”

“누나라고 무사하지 않을 건데?”

“야. 나 서유라야. 서도 그룹 막내딸 서유라라고. 최고급 변호사 쓰면 내가 왜 감방에 가니? 그런 데는 돈 없고 빽 없는 너 같은 새끼들이나 가는 거거든?”

하. 지상은 화를 참으려 핸들을 꽉 쥐었다.

“최지상 너 진짜 웃긴다. 좀 어울려 줬더니 이게 진짜 사람을 호구로 보고 지랄이야. 야, 나랑 너는 급이 달라. 그때도 나 아니면 너 골로 갔었어. 불쌍해서 살려 줬더니, 뭐? 내가 그런 걸로 하자고?”

지상이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는 줄도 모르고 서유라가 말했다.

“기다려 봐. 울 엄마가 이따 점심에 작은오빠 만나러 간댔거든? 작은오빠 편 한다고 하면 돼. 그럼 울 오빠가 서문도한테 그만하라고 할 거니까. 그 새끼가 암만 지랄맞아도 지 아빠 말은 듣겠지. 그러고 나면 너는 너, 나는 나 알아서 갈 길 가자. 알았지?”

지상은 잠깐 고민을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서유라를 살살 잘 달래 볼 건지, 성질 뻗치는 대로 확 엎어 버릴지.

그래, 일단은 어디 으슥한 구석으로 데려가서 수틀리면 두드려 패는 거야. 얻어터지다 보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액셀을 힘주어 밟는데 잠잠했던 휴대폰이 마구 울렸다. 오 대표였다. 지상이 통화 거부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서유라의 핸드폰이 울렸다.

“뭐야. 엄마잖아. 어, 엄마 왜? 뭐? 뭐가 떴다고? 음성파일? 그게 뭔데?”

지상은 휙 고개를 돌려 서유라를 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잠깐 끊어 봐. 아 끊으라고!”

서유라가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지상은 흘깃흘깃 서유라가 검색하는 모습을 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아닐 거다. 분명 서유라의 엄마가 딜을 하러 갔다질 않나. 그래도 서유라가 연관되어 있는데 대기업 오너가에서 그렇게 무모하게.

“이게 뭐야. 너…… 녹음했니?”

서유라가 말하며 핸드폰 화면을 눌렀다. 스피커 속에서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친구 얼굴 한 번만 볼게요. 김영재, 아시죠? 영재 걔가 이거 시켰는데, 저한테 팁 진짜 많이 준다고 그랬거든요.’

서유라의 눈이 크게 떠지는 순간 최지상은 씨발, 욕을 터트리며 손을 뻗었다. 서유라의 머리채를 잡고 대시보드에 쿵, 하고 처박았다. 신음하는 서유라의 소리 위로 녹음된 이민우의 목소리가 흘렀다.

‘너 뭐야! 문 닫고 꺼져, 이 새끼야!’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그래, 그랬었지. 저 새끼가 기어이 들어온다고 그랬다. 그때 죽자고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죽이지 않았을 텐데! 과거를 회상하는 지상의 눈이 번뜩였다.

“썅. 이게 다 니들 때문이야! 내가 좋게 말했는데 왜 말들을 안 들어 처먹어! 다들 내 말만 잘 들었어도! 어?”

최지상이 서유라의 머리를 대시보드에 내리찍을 때마다 도로를 달리는 차가 휘청거렸다. 서유라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야, 정신 차려! 얘 왜 이래요? 김영재! 야! 너 왜 이래! 119 불러…….’

지상은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탄 기분이었다. 녹음된 목소리와 서유라의 비명이 하나로 뒤섞여 지상의 귀를 울렸다. 뜨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지상은 크게 외쳤다.

“내가 씨발, 이렇게 무너지라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급이 다른 서유라, 그래 너 죽인다 하면 니네 집에서 어떻게 하나 한번 볼까? 그래 같이 죽는 거야!”

그래. 그래야겠다. 처음부터 너무 착한 방법을 찾았다. 이대로 서유라를 납치해서 목숨을 담보로 딜을 할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서유라를 실컷 두드려 패서 빌빌 기게 만들어 해결을 봐야겠다.

최지상이 악마 같은 웃음을 흘리며 서유라의 머리채를 다시 한번 휘어 감으려 할 때였다.

“너나 죽어 미친 새끼야!”

눈이 돌아간 서유라가 운전석을 덮치며 핸들을 꺾었다. 곡예를 하듯 차선을 넘나들며 서유라와 몸싸움을 하는데 지상의 시야에 커다란 덤프트럭이 보였다.

빠아아아아앙—

긴 경적음이 울리는 순간 최지상은 미친 듯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날카로운 파열음이 도로를 찢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콰앙, 거대한 굉음이 울리는 순간 유라의 시간이 멈추었다.

커다란 트럭의 아래로 승용차의 보닛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주위의 공기는 멈추었고, 모든 것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민우의 목소리. 최지상의 욕설. 자신의 비명 소리조차 일시에 소거가 되었을 때, 유라는 직감을 했다.

씨발, 끝이네.

마지막으로 공허한 웃음을 웃었다. 거대한 충격에 몸이 으스러지는 순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미안해.

엄마 미안. 선우야 너한테도 미안.

그 말을 전하지 못한 채 유라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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