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사과해요
“선우야, 이건 어떠니?”
선우는 고개를 들어 미숙이 들어 보이는 차렵이불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이불 가게의 침대 위에 몇 개의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예뻐요. 따뜻할 거 같고요.”
“얘는 다 예쁘대.”
미숙이 웃으며 말했다. 선우도 미소를 지었다. 날씨가 쌀쌀해졌으니 따스한 이불로 싹 바꿔야겠다는 말에 이모를 따라 쇼핑을 나온 길이었다.
“조금 더 잔잔한 꽃무늬였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이게 나을 것 같지? 이걸로 주시고요, 베개도 같이 보여 줘요. 아래 까는 시트도 보여 주고요. 선우야, 잠깐 앉아 있어.”
본격적으로 살펴보는 미숙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선우는 가게 한쪽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았다. 상가의 유리 벽 너머로 한적하고 깨끗한 거리가 보였다.
오후라 그런 것일까. 세종은 서울에 비하면 밀도가 현저히 낮은 느낌이었다. 선우는 오후의 햇살에 손을 활짝 펴서 무릎 위에 그림자를 만들어 보았다.
“선우야 이건 어때?”
안쪽에서 미숙이 베개를 들어 보였다. 좋은 것 같다고 말하며 웃으니 미숙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때면 세종에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앉아서 가만히 있을 겨를 없이 이모와 쇼핑을 하고, 시장을 가고, 반찬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당분간 이모네 집에서 지내라는 말에 그러겠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혼자 있다 보면 빈 시간이 많아질까 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지난 시간들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한 일상을 살다 보면 정말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모와 함께 예쁜 카페에 가고, 호수 공원을 한 바퀴 산책하고 나면. 정육점에서 국거리 고기를 사고 꽃집에서 꽃을 사다 꽂다 보면.
그러다 보면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은 흐려질 테니.
집에 있는 이불 전체를 다 바꿀 생각인지 이것저것을 내려서 둘러보는 이모를 보며 피식 웃는데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선우야 이거 서유라 아니니?]
은정 선배였다. 선배는 아직 그녀가 세종으로 내려온 줄도, 서유라의 일을 그만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더 마음이 단단해진 뒤에 통화를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뤄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유라라니.
메시지창을 여니 누군가의 대화창 사진이 떠 있었다. 제일 위에 쓰여 있는 이름은 최상규였다.
선우는 순간 눈을 좁혔다. 썸네일로 보이는 사진에 언뜻 서유라의 모습이 비친 듯했다.
[선배, 이거 어디서 났어요?]
[지금 난리야. 카톡으로 퍼졌어. 기사도 났고. 최지상하고 서유라 같다는데, 맞아?]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을 했다. 하얗게 바래 버린 머리로는 이게 무슨 일이지, 하면서도 울컥 심장이 튀어 올랐다.
설마.
선우는 메시지창을 내리고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최지상의 이름을 치고 검색 버튼을 누르니 기사부터 게시글까지 다양하게 떴다.
그중 하나를 누르려는데 화면이 까맣게 바뀌며 서유라의 이름이 떴다. 진동으로 해 놓았는데도 악을 쓰는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끊어지길 두 번.
다시 진동이 울렸을 때,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숙에게 말했다.
“이모,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알겠다는 미숙의 대답을 듣고서 가게를 나와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동안 서유라의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 대는 걸 무시했지만, 그럼에도 수신 거부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 대화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예감을 하며 선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 받았어? 받은 거야?
“네.”
대답을 하자 서유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너 어디야! 어디냐고!
선우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유라가 씩씩대며 말했다.
— 너 그거 진짜야? 너 나 속이고 들어왔어? 그날 죽은 애가 니 동생 맞아? 그래 놓고 감쪽같이 아닌 척했어? 작정하고 날 속인 거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말이다. 내가 그 아이의 누나인데, 어째서 서유라 당신은 당신이 속은 것만 생각하니. 어떻게 그래.
“네. 제가 민우 누나예요. 속이고 들어간 것도 맞아요. 그러니까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 너 이제 보니까 아주 나쁜 년이구나! 그래 놓고 어떻게 말도 없이 사라져?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확인 안 하고!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서유라가 소리를 바락 질렀다. 그래도 오래 같이 지냈다고 정이라도 들었는가 보다. 민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인데 분노가 거세게 일지 않는 걸 보니.
선우가 가만히 있자 저쪽에서 서유라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잠깐 정적이 있더니 다시 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됐고! 내가 다 용서할 테니까 돌아와.
웃음이 나왔다. 선우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시리게 하는 해를 보고 허무한 웃음을 흘린 뒤 대답을 했다.
“유라 씨. 제 동생이 죽었어요. 유라 씨는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최지상이랑 둘이서 우리 민우 죽게 했잖아요. 그런데 돌아오라고요? 용서를 한다고요?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용서를 해 준다니. 누가 누굴 용서해. 기막힌 웃음이 나는데 서유라는 되레 소리를 질렀다.
— 난 그런 거 몰라! 내가 안 그랬고! 난 모르는 일이야! 날 속인 건 너야! 내 편 해 준다고 했던 것도 너야! 그러니까 돌아와! 너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마지막 목소리가 울먹거렸다. 선우는 눈을 감았다. 정말 답도 없는 사람이야 당신은. 왜 당신이 울어.
— 큰오빠 편 하면 나도 유산받을 수 있다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거 받으면, 너 매니저도 시켜 주고 쇼핑도 같이 할라구 그 거지 같은 집에서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이상한 기사가 뜨잖아! 사진도 막 돌아. 서문도 그 개새끼가 나 죽일라고 그러나 봐. 선우야, 나 어떡해?
서유라는 무섭다고 했다. 서문도는 다 터트리고도 남을 새끼라고 했다.
— 다 터지면 어떡해, 선우야. 응? 이거 다 터지면 나 어떡하지? 그러니까 빨리 좀 와 주라. 나 너무 힘들어.
서유라가 울었다. 이 정도가 힘들다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을 잃고, 동생을 잃고, 낡은 휴대폰 하나 찾겠다고 당신들을 버텨 낸 나도 있는데. 이까짓 게 뭐가 힘들어.
“유라 씨.”
— 응.
“사과해요.”
— 응?
“제 동생 그렇게 죽인 거, 사과하세요.”
이제 와 의미 없다는 것, 선우도 알았다. 그래도 듣고 싶었다. 최지상이든 서유라든 두 사람 모두였든, 민우는 죽임을 당한 게 맞았다. 그러니 모든 게 밝혀질까 두려워서 몸을 떠는 거겠지.
— 나 아니야. 나 진짜 아니야. 내가 아니라 최지상이 그랬어. 진짜야. 진짜 최지상이 그랬어. 최지상이 니 동생한테 약 찔렀어. 나 진짜 아냐.
선우는 힘겹게 눈물을 삼켰다. 삼킨다고 삼켰는데도 발등을 비추는 햇볕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사과해요.”
선우는 다시 한번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서유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훌쩍이며 말했다.
— 니 동생인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야. 진짜야.
하아. 선우는 허무하게 웃었다. 당신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니야. 유라 씨. 그게 아니잖아.
“제 동생이 아니었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당연한 걸 몰라…….”
— 응. 담부턴 안 그럴게. 진짜 안 그럴게. 그니까 좀 와 주라.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선우는 눈물을 닦았다. 너무 오래 통화를 했다. 이모가 찾기 전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끊을게요.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
— 야!
이대로 끊어야 하는데, 말하지 못한 마지막 한마디가 혀끝을 맴돌았다.
“최지상은 만나지 말아요. 마지막 부탁이에요.”
유라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선우는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까지 모질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꼭 그 말은 해 주고 싶었다.
가뜩이나 비틀린 사고방식을 가진 서유라에게 최지상은 최악의 조합일 수밖에 없었다. 깊이 엮이면 엮일수록 서유라의 삶은 망가질 거였다.
진동이 다시 울렸지만 수신 거부로 돌려놓았다. 조만간 핸드폰 번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저녁으로는 이모, 이모부와 같이 공주까지 나가서 매운 코다리찜을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코스모스가 핀 금강변 산책도 하고 강변의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이모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새로 산 시트를 깔고 새 이불을 펼쳐 놓았다. 안방 침실에도, 선우가 쓰는 작은 방에도, 사촌 오빠 내외가 주말에 올 때면 쓴다는 다른 방에도 전부 새 차렵이불을 덮어 두었다.
밤이 되자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한 뒤에 선우는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옅은 핑크색 이불을 덮었다. 딸이 있었으면 이런 걸로 도배를 했을 거라며 이모가 골랐던 이불이었다.
이불을 덮고 스탠드를 켠 뒤 망설이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포털 사이트를 열고 최지상의 이름을 썼다가 다시 지웠다.
그럴 리 없어. 그 사람이 다 터트릴 리 없어.
경영권 방어니 싸움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큰집과 연합하기로 한 서유라를 협박할 용도로 흘린 것이 아닐까. 겁먹은 서유라가 항복을 하면 다시 거두어들일 생각으로 뿌린 것일 테다.
그런데도 서유라는 이 이후가 무섭다고 했었다. 서문도는 다 터트리고도 남을 사람이라며. 정말 그럴 것이 예상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 와서 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려고 민우 핸드폰만 던져 주며 그렇게 내쫓은 거 아니었나.
생각은 자꾸만 꼬리를 물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찾아보는 게 낫겠지.
무섭다고 했었던 서유라는 곧 잘못했다 숙이고 들어갔을 테고, 서문도는 기사를 모두 거두었을 거였다. 그렇게 누군가의 악의적인 조작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것만 확인하고 자자.
선우는 다시 검색창에 최지상의 이름을 적고 돋보기 모양의 검색 버튼을 눌렀다. 주르륵 기사가 뜨며 썸네일이 떴다.
‘C모 배우, 메신저 어플을 통해 새로운 사진 대거 유출. 마약 투약, 몰카 촬영 의심돼. 국내 굴지의 S그룹 2세 S모양과 연관 있어 보여.’
기사 안에는 누가 봐도 최지상과 서유라인 사진이 모자이크되어 커다랗게 삽입되어 있었다. 연예란이 온통 최지상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선우는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