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젠 정말 혼자잖아
장 여사는 바닥으로 내려앉는 선우를 얼른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선우가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잡고 있는 몸에서 열이 펄펄 끓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장 여사는 일단 선우를 부축해 침대에 뉘었다. 열을 내려 주는 게 우선이겠지만 오한이 너무 심해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선우 씨. 약은 먹었어?”
끙끙 앓는 선우가 뭐라 말을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보니 일단 물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드는데 타이레놀이 보였다. 약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한 판을 다 먹은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아팠어? 응? 세상에 이 열 좀 봐.”
장 여사는 선우를 살짝 일으켜서 생수병의 물을 흘려 넣었다. 물이 들어가니 정신이 잠깐 드는지 선우가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 먹었어요……. 괜찮아……요. 조금 자면…….”
거기까지 말해 놓고 선우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장 여사는 선우를 다시 침대에 뉘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을 얼마나 끓였으면 저렇게 앓아누워.”
열병처럼 앓고 있는 선우가 가여워 장 여사는 혀를 찼다. 그러게 왜 주인집 남자랑 연분이 나고 그래.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데.
일단 뭐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가 장 여사는 눈을 끔뻑거렸다. 냉장고 안에는 수박 반 통만 있었다. 그것도 속만 파먹어 껍질째로 말라붙은 빈 수박이.
이선우가 숙소동을 나간 지가 언제였더라. 족히 사나흘은 지났는데 그간 무엇을 먹고살았단 말인지.
장 여사는 바로 옆의 싱크대를 보았다. 위쪽 싱크대 문을 열어 보니 라면과 햇반, 쌀 조금이 전부였다. 아래쪽 문을 여니 간장과 설탕, 소금, 참기름과 식용유 정도의 양념이 있을 뿐이다.
“아니 그간 뭘 먹고 산 거야.”
뭘 해 먹이고 싶어도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장 여사는 한숨을 쉬며 냄비를 꺼냈다. 참기름을 살짝 두른 뒤 햇반을 하나를 뜯어 넣었다. 약한 불에 볶다가 생수를 넣고 불을 키웠다.
밥알이 팔팔 끓게 둔 뒤 장 여사는 화장실로 가서 수건을 물에 적셔 꽉 짰다. 수건을 들고나오며 집을 둘러보는데 마음이 아려 왔다.
조촐한 세간살이에 텅 빈 방. 쓸쓸한 집에서 혼자 앓으며 간신히 약만 꺼내 먹었을 선우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한숨을 삼킨 장 여사는 열이 끓는 선우의 이마를 닦아 주고 얼굴과 목도 몇 번씩 닦아 준 뒤 핸드폰을 들었다.
“양 여사, 나예요. 부탁할 게 있는데, 응. 죽을 좀 보내 줘야겠어. 종류별로 끓여서 주소 보내 주는 곳으로 퀵 보내요. 나 오늘 늦을 거 같으니까 식사 준비는 알아서 하고요. 응. 그래요.”
전화를 끊고서 주방으로 나온 장 여사는 물이 졸아 죽처럼 변해 가는 밥알을 가만히 저었다.
남녀 사이에 둘이 좋아지내다 헤어질 수도 있지. 같이 있기 불편하니 그만두라 했겠지. 어차피 길게 갈 인연도 아니었고.
머리로는 서 전무를 이해했으나 선우가 짠한 마음은 거둬지지 않았다.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짐 챙길 시간도 없이 내쫓았나. 무슨 모진 말을 했기에 다 버려두고서 야밤에 혼자 나가.
일단 나가서 해열제도 더 사 와야겠고, 근처에 데리고 갈 만한 병원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고. 냉장고도 좀 채워 줘야겠고.
한숨을 깊이 내쉰 뒤 장 여사는 끓는 죽을 부지런히 저었다.
* * *
차가운 무언가가 이마에 느껴졌다.
이마에서 뺨, 목으로 차례차례 차가운 것이 닿아 선우는 몸을 오그리며 떨었다.
“선우 씨. 잠깐 일어나 봐. 선우 씨.”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와 선우는 눈을 뜨려 노력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처음엔 잘 구별되지 않았다.
“눈 뜨네. 죽 먹게 일어나요. 죽 먹고 약 먹자. 이렇게 생으로 앓으면 안 돼.”
몽롱한 상태로 눈을 뜨니 장 여사의 얼굴이 보였다.
“아, 여사님.”
반가운 얼굴이라 작게 웃다가 선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열이 나서 그런지 자꾸만 정신이 가물거렸다. 눈이 떠질 때마다 해열제를 찾아 먹었는데도 몸이 축축 처졌다.
“일어나 봐요.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내지.”
몸이 일으켜지더니 이번에는 시원한 물이 입술에 닿았다. 열로 들뜬 시야에 쟁반을 들고서 침대 옆에 걸터앉은 장 여사가 보였다.
“죽 먹어요.”
장 여사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오고 손에는 억지로 숟갈이 쥐여졌다. 네에, 선우는 한숨처럼 말한 뒤 느리게 죽을 떴다.
“이리 줘 봐.”
갑갑했는지 장 여사가 숟가락을 빼앗아 직접 떠서 선우의 입에 넣었다.
미지근한 쌀죽이 혀에 닿는데 너무 깔깔했다. 그래도 끓여 준 죽이라 억지로 삼키니 장 여사가 한 숟갈을 더 들이밀며 말했다.
“딱 세 번만 더 먹어요.”
무뚝뚝하지만 정이 깊은 목소리가 오랜만이라 선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에.”
힘이 없어서 그런지 말꼬리가 저절로 늘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장 여사가 안 되겠다는 듯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깜빡거리는 의식 사이로 장 여사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 일로 오신 걸까 여쭤봐야 하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선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
눈을 떴을 땐 밖이 어두워진 시간이었다. 천천히 정신이 든 선우는 스탠드 불빛이 켜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장 여사의 모습이 보였다.
“깼어요?”
“아……. 여사님.”
장 여사에게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팔에 불편한 느낌이 있어 시선을 내리니 수액이 꽂혀 있었다. 선우는 눈을 들어 장 여사를 보았다.
“너무 열이 나서 의사 선생님 잠깐 불렀어요. 아프면 병원엘 가야지. 미련하게 앓고 있으면 어째.”
무뚝뚝한 말투로 장 여사가 말했다. 그제야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는 따뜻한 온기가 돌았고, 협탁 위에는 처방된 약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데 갑작스럽게 목이 메었다. 선우는 괜히 한 번 마른침을 넘긴 뒤 애써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인사도 못 드리고 나왔어요.”
사정을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 생각을 할 때 장 여사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남은 짐이 있길래 챙겨서 가져왔어요. 다른 짐은 다 가져왔고, 전무님이 준 선물은 일단 빼놨어. 가져갈 거였으면 진작 가져갔겠다 싶어서.”
알게 되셨구나. 누군가 방을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는 건 짐작했었다. 그래도 직접 들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두 사람 만난 건 다른 이들은 몰라요. 대표님하고 나만 알지.”
“네.”
“다른 사람들에겐 집안 어른 아프셔서 급하게 내려갔다 했고.”
“네.”
여사님이 빠르게 수습을 하셨구나. 내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시겠지.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죄송해요. 심려 끼쳐 드려서.”
이제는 다 끝난 일이에요. 그 말을 이어서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웃기만 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장 여사의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 심경 속에 걱정이 들어 있는 것이 보여서 선우는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라 아가씨가 많이 찾던데. 따로 연락 안 할 거예요?”
“안 받으려고요. 다시 일을 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선우를 물끄러미 보던 장 여사가 먼 곳으로 시선을 두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타박하듯 선우를 보며 한마디를 했다.
“그러게 왜 전무님이랑 연애를 해. 뭐 좋은 꼴을 보겠다고.”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훑고 내려가 선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직도 뱉어 내지 못한 열이 남았을까. 며칠을 내리 앓았는데도 남아 있는 게 있구나.
“죄송해요.”
선우의 말에 장 여사가 깊게 한숨을 쉬며 다시 먼 곳을 보았다. 그러다 이내 일어나더니 선우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액 다 됐네. 내가 이거까지만 해 주고 가려고 기다렸어요.”
장 여사가 투박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바늘을 뽑았다. 팔은 왜 이렇게 가늘어, 한숨을 쉬면서 밴드를 붙여 주는데 선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을 새도 없이 고장 난 눈물샘에서 주륵 눈물이 흘렀다. 선우는 다른 손을 들어 급하게 눈물을 닦았다.
괜찮아요. 여사님 저 괜찮아요.
그 말이 뻐근한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니 장 여사가 잠시 선우를 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냉장고에 죽 있으니까 찾아서 먹어요. 약은 식후에 먹고.”
주섬주섬 가방과 외투를 챙겨 든 장 여사가 마지막이라는 듯 선우를 보았다.
“아프면 서러워. 잘 챙겨 먹고, 재깍재깍 병원도 가고.”
“네.”
눈물을 닦으며 대답하는 선우에게 한마디 말을 더하였다.
“아프지 말아요. 이제 정말 혼자잖아.”
스치는 인연에도 이렇게 위로를 받는다. 그러고 보면 별채에서의 시간들이 아프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동에서의 따뜻했던 아침밥. 빼놓지 않고 자신을 챙겨 주셨던 아주머니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서유라와도 나쁘지 않게 지냈었다.
반짝이는 기억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충분히 있었다. 선우는 남자와의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장 여사에게 웃어 보였다.
혼자니까, 그러니까 힘을 내. 밥도 잘 챙겨서 먹고, 아프지도 말고, 이제는 힘내서 다시 살아 봐요.
무뚝뚝하지만 깊은 장 여사의 마음이 느껴져 선우는 힘을 내어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전부 끝났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였다. 앓을 만큼 앓고 나면, 더는 아프지 않을 때까지 아프고 나면 털고 일어나야지. 나빴던 기억은 잊고 좋았던 기억만 남겨야지.
“나오지 말아요.”
“와 주셔서 감사했어요.”
“잊기 전에 약부터 먹고.”
마지막까지 약을 먹으라 잔소리를 하며 장 여사가 방을 나갔다. 신발을 신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장 여사가 떠난 뒤 선우는 천천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직도 열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팠던 날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장 여사가 물과 함께 놓아둔 약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주방으로 나가 보니 식탁 위에는 금방이라도 먹을 수 있게 그릇과 함께 놓아둔 죽이 보였다.
냉장고를 여니 칸칸이 정리된 냉장고에 장 여사가 채워 넣은 것들이 보였다.
일회용기에 들어 있는 각종 죽, 과일, 김치와 밑반찬. 주르륵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선우는 다짐했다.
다시 힘을 내어 살아야겠다고.
나쁜 그 사람은 다 잊고 정말로 잘, 살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