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희연
북악산 녹음에 가을빛이 돌기 시작했다.
끝이 노랗게 물든 나뭇잎과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 송이가 벌어진 밤과 익어 가는 감. 희연으로 가는 길은 사계절이 모두 달랐다.
서중호는 기사가 모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스쳐 가는 풍경을 보았다.
평소라면 힘차게 뻗어 있는 북악산 정기를 느긋하게 바라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신과 이야기를 하겠다고 약속 장소로 잡아 놓은 곳이 세컨드가 운영하는 희연이라니. 하여간 우현희는 여장부였다.
하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우현희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았었다.
명동 큰손이었던 우장선 회장과 사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서명구 회장 때문에 집안끼리 혼담이 오갔을 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현희는 서중호를 택했다.
공식적인 후계자였던 서용호를 퇴짜 놓고 서중호를 택한 우현희는 맞선 자리에서 말했었다. 당신을 후계자로 만들어 줄 테니 서도의 절반을 넘기라고.
그날부터 이때까지 우현희의 행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철저한 사업가였고, 사업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무슨 대단한 말을 하시려고 여기까지 나를 불렀나.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미끄러지듯 희연의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두 대의 차가 먼저 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내연녀의 식당에 주차된 부인과 아들의 차를 흘깃 보며 서중호는 차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걸어 출입구로 다가가니 울상을 짓고 서 있는 송주연의 모습이 보였다.
“부회장님, 대표님 왜 저러시는 거예요? 다른 식당 두고 왜 여기서 만나는 건데? 숨 막혀 미치겠어.”
서중호는 쯧쯧 혀를 찼다. 심약하긴. 납작 엎드려 비위를 잘 맞추기에 오래 데리고 있었더니 징징대는 것이 늘었다.
“네가 받은 게 얼만데 이 정도도 못 해? 표정 간수 똑바로 해.”
“부회장님.”
“웃어. 저기 앉은 여자가 내 안사람이야. 웃는 얼굴로 네 손으로 직접 모셔. 정성을 다해서 섬기라, 이 말이야.”
살짝 충격을 받은 송주연이 멍하니 그를 보았지만 중호는 개의치 않고 안으로 성큼 발을 디뎠다. 뻔뻔히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의식을 갖는 순간 기세에서 밀리게 된다. 살아오는 동안 뻔뻔한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았나.
“두 사람 먼저 와 있었네. 메뉴는 골라들 두셨나?”
텅 빈 식당, 안쪽으로 마련된 자리에 앉으며 서중호가 말했다.
“늘 먹던 대로 런치 스페셜 시켜 두었어요.”
우현희가 담담히 대답했다. 서중호는 우현희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런치 좋지. 자아. 일단 물을 한 잔 마시고.”
서중호는 텁텁한 목을 물로 적셨다. 물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는데 문도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서유라 사건 기억하시죠? 관련 기사 내보낼 생각입니다.”
“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미간을 모으는 서중호에게 문도는 이어 말했다.
“박소영이 명 실장한테 살 만한 집을 구해 달라 했다네요. 입주하기로 한 날이 모레 오후이니 그 이후엔 나가겠죠. 나가고 나면 바로 터트릴 겁니다.”
“무슨 사건? 아아, 그때 그 사망사건 말이냐?”
서중호가 의식적으로 웃음을 만들며 문도를 보았다. 오리발을 내밀 때 자주 뒤집어쓰는 가면을 보며 문도는 가벼운 실소를 했다.
“알고 계셨잖아요. 사망사건 아닌 거.”
알고 있다마다. 알면서 일부러 덮은 일인데. 서중호의 생각은 우현희에게도, 문도에게도 읽혔다.
“알지. 알았지. 그래서 지금 그게 아주 유리한 패가 되지 않았더냐. 서유라 걱정은 말아. 이 서중호가 탁 틀어쥐고 있으니. 어쩔 거야. 내가 터트리면 인생이 골로 가는데. 박소영이랑 유라는 꼼짝도 못 해. 서용호 그 새끼 꿈은 물거품 되는 거지.”
“그 이후는 어쩔 셈인가요.”
우현희가 차분한 목소리로 서중호에게 물었다. 둘이 무언가 작당을 하고 있구나. 감으로 느낀 서중호는 얼굴을 굳혔다.
“살인사건은 덮어 두고 서유라는 끌어안고 갈 건가요? 다시 사고를 치면 그때는요? 또 덮고서 약점으로 가지고 있을 건가요?”
“그야 당연히.”
“여기서 멈춰요.”
우현희가 서중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순간 울끈 화가 치민 서중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보, 당신 말이 조금.”
“서도가 당신 거 같아요?”
내 것이 아니면 그럼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서중호의 눈동자에 비친 욕심을 읽은 우현희는 말했다.
“결혼 전에도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절반은 내 것이라고.”
담담하게 부딪쳐 오는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었다. 저 말이 허풍이 아니기에 서중호는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서도 금융 그룹의 지지가 없는 케미컬은 그 힘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아니죠. 나도, 당신도 주인일 수 없어. 주주들이 있고, 직원들이 있고, 직원들의 가족들이 있어요. 하청 업체가 있고, 협력 업체들이 있죠.”
오너 일가가 주인이라니. 오만한 생각이지 않은가. 우현희는 서중호를 비웃었다.
아들인 문도와 함께 서용호의 발을 묶어 둘 자금줄을 쥐고 있는 것은 서중호를 회장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십 만의 생계가 달린 기업을 책임감 있게 이끌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이, 그저 장남 대접, 사장 대접, 나아가 회장 대접만 바랄 게 뻔한 서용호에게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중공업과 건설을 살리기 위해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여전히 방치한 채로 제 살길만 도모하는 꼴을 보면서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행동에 나선 것이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걸 아니까 내가 지금 회장이 되겠다고 하는 거잖아? 저 약해 빠진 서용호가 회장이 되면, 이거 갈가리 찢어지는 거 시간문제야. 내가 어떻게 일궈 놓은 그룹인데. 이 서중호가 어떻게!”
“혼자 한 것처럼 굴지 말아요.”
우현희는 딱 잘라 말했다. 멀리서 송주연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부회장님, 지금 상을 올려도…….”
“시끄러! 지금 얘기 하는 거 안 보여!”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서중호를 한심하게 보던 우현희가 송주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송 사장님.”
“네, 네. 대표님.”
“음식 내오세요.”
송주연은 빠르게 눈치를 보았다. 서중호가 안 된다고 하면 내오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씩씩거리기만 할 뿐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바로 내오겠습니다.”
송주연이 물러갔다. 우현희는 담담히 물잔을 들었다. 욕이라도 한바탕 쏟아 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서중호가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도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서유라 사건은 밝히고 갑니다.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할 거고요.”
“이 새끼 너까지!”
서중호의 붉은 눈이 문도를 향했다.
“그게 무서우면 애초에 덮지를 말았어야죠. 출혈이 있어도 썩은 살은 도려내는 게 맞지 않겠어요.”
서중호가 문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문도에게 말했다.
“너는, 문도야. 그게 터지면 너는 무사할 줄 아느냐? 그거 덮은 거 다 너 아니었더냐. 장 변이랑 현장에 간 것도 너고, 증거 조작을 하라고 시킨 것도 너고, 그 증거들을 가져간 것도 너인데.”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하는 서중호를 보며 문도는 비식 웃었다. 기어이 우리 아버지가 아들을 파시네. 이렇게 또 살길을 셀프로 차단을 하셔.
“여보 우 대표, 우리 문도가 감방 가도, 그래도 괜찮으신가? 응? 어디 한번 말을 해 봐요.”
우현희가 한심한 눈으로 서중호를 보았다.
“아이고 이거 큰일이 났네. 큰일이 났어. 현장엘 우리 아들이 가 버렸으니, 어? 장 변호사가 다 증언을 해 줄 텐데. 우리 문도가 감옥에 가게 생겼어.”
“제가 왜요.”
문도는 웃으며 서중호에게 말했다.
“제가 왜 감옥엘 갑니까. 아버지. 아버지가 시켜서 한 일인데요.”
장 변호사, 핸드폰, 현장 출두. 여차하면 떠넘기려고 파 놓았던 함정들이 다시 아버지의 목을 조일 것이다.
“마음의 준비는 하셔야 할 거예요.”
마음이 약한 아들이라 차마 아버지를 감옥까지 보낼 순 없겠지만, 그래도 도의적 책임은 지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빙그레 웃는 문도를 보는 서중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때마침 도착한 송주연이 고운 미소를 지으며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 * *
딩동.
장 여사는 벨을 눌렀다. 여러 번 눌러도 답이 없어 핸드폰을 꺼내 다시 한번 주소를 확인했다. 304동 402호. 맞는데.
“명 실장 이 사람 주소 잘못 적어 보낸 거 아니야?”
크지는 않았지만 짐 가방을 들고 4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오느라 땀이 삐질 났다. 장 여사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꾹꾹 눌러 닦고 다시 벨을 눌렀다.
딩동.
벨 소리가 울리는데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밖에 나갔나. 아직 오전 9시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나갔을까. 잠이 깊게 든 건가.
장 여사는 핸드폰을 들고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제저녁에 했던 우현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선우 씨 나갔다면서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쓰던 물건이며 다 두고 몸만 나간 수준이에요. 정리하다 보니 전무님한테 받은 걸로 보이는 물건도 보이고요.’
그 말을 들은 우현희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해 보더니 장 여사에게 말했다.
‘그건 빼더라도 남은 물건들 잘 챙겨서 가져다주세요. 다른 사람 시키지 마시고 여사님이 직접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서 전무가 이렇게 집에서 일하는 여자랑 놀아나다가 훌렁 내팽개칠 줄 알았나.
이선우가 쓰던 서랍에서 시계며 목걸이가 보이는데 어찌나 기가 차던지.
“전화는 왜 안 받아.”
하기야 서유라가 그렇게 전화를 해 대는데도 한 통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쪽에서 거는 전화가 달가울 리 없지.
“선우 씨. 집에 없어? 나 장영순이에요.”
한 번만 더 불러 보고 대답이 없으면 짐만 두고 갈 생각이었다. 딩동, 마지막으로 벨을 눌렀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짐 가방은 문 앞에 두었으니 가지고 들어가라는 메시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장 여사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쓰고 있을 때였다.
덜컹.
현관문이 열리더니 창백하게 질려 있는 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선우 씨.”
“아……. 여사님. 제가……. 조금…….”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로 더듬거리며 말을 하던 선우의 몸이 서서히 쓰러지는 것을 보며 장 여사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선우 씨! 정신을 차려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