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00화 (100/168)

100. 호랑이 죽은 굴 @AW

회장이 죽은 뒤 며칠간 상심에 빠져 식음을 전폐했던 박소영은 얼마 전 다시 거동을 시작했다. 서용호의 연락을 받은 이후였다.

“부회장님, 나 할 얘기가 있어.”

다이닝룸에 들어온 박소영이 당연한 듯 회장이 앉았던 상석에 앉아 식사 중인 서중호에게 말했다.

들깨미역국을 먹던 서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냅킨으로 입을 쓱 닦고 박소영을 서늘히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요.”

말씀하세요, 가 아닌 말해요.

말투부터 달라진 서중호를 보며 박소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회장의 빈자리에 당당히 앉은 서중호가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회장님 모시며 어떻게 살았는데. 유라 낳고서 어떻게 버텨 왔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얼마 전에 서 사장한테 연락이 왔어. 회장님 돌아가시고선 말이야.”

서중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라는 얼굴로 박소영을 본다.

“우리 유라 몫 받을 수 있다며? 유산은 형제가 똑같이 나누는 거라면서? 회장님 지분 정리 안 된 거 아직 남았다고 서 사장이…….”

“그래서요?”

끈질긴 설득이 있었다. 준비는 되었다고 했다. 서미경과 서유라, 서용호 연합으로 맞서고 주주들을 설득하면 된다고.

서중호가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자신들의 뒤를 봐주었던 걸 생각하면 미안하긴 했지만, 회장 없는 하늘 아래 유라를 지킬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거기다 딸랑 페라리 한 대만을 받고서 물러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각서를 쓰고 공증을 받아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지만, 엄밀히 말해 사실혼 관계였다. 30년 동안 회장의 수발을 들었던 공은 인정을 해 주어야 하는 거지.

박소영은 턱을 치켜들고 서중호에게 말했다.

“내가 그래도 부회장이 우리 챙겨 준 거 생각해서 먼저 말해 보는 거야. 유라 지분만큼 챙겨 주면 그쪽으로 가지 않을게. 서 사장이 준다고 했던 그만큼은 챙겨 줘야 우리도.”

“문도야.”

서중호가 문도를 불렀다. 박소영은 눈을 돌려 맞은편에 앉은 문도를 바라보았다. 숟가락을 내려놓는 서문도의 표정은 잘 읽히지 않았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들이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은혜도 모르고 뒤통수를 후려갈기려 하잖아? 이봐요. 박소영 씨.”

중호가 웃으며 박소영을 보았다.

“얌전히 있으면 내가 프랜차이즈 하나 정도는 해 드릴게. 유라, 내 동생 유라도 죽는 날까지 먹고 살 걱정 없는 정도는 해 드리고. 우리 일본에서 좋았잖아요?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난 박소영이한테 집도 주고, 차도 주고, 회장님 소식도 간간이 전해 드리고. 그랬는데 사람이 이러면 쓰나.”

박소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런 수모를 겪을 줄은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 아프고 비참했다. 아무것도 준비해 주지 않고 세상을 뜬 회장이 야속했다.

“그래서 우리 유라 몫, 안 챙겨 주겠다는 거야?”

박소영의 물음에 서중호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크게 떴다. 새로 담근 알타리김치를 한입 베어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으며 박소영에게 말했다.

“못 주지. 첩년 때문에 속 끓이던 울 어머니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데, 그걸 어떻게 주나.”

“하!”

박소영이 기가 찬 소리를 내자 서중호가 후르륵 미역국을 들어서 마시더니 그릇을 탁 내려놓았다.

“계산 잘 하셔야 할 거야. 생각을 잘 해요. 이 서중호가 허수아비 같은 장남한테 밀릴 것 같아?”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딱 부회장이 그 짝이네.”

분에 찬 박소영의 말에 서중호가 웃으며 답했다.

“말은 바로 합시다. 호랑이 죽은 굴이겠지.”

박소영이 부들부들 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숟가락을 드는 서중호를 힘껏 노려보고 다이닝룸을 나갔다.

“쯧쯧. 어차피 나가지도 못할 거, 뭘 저리 재고 따지나. 유라 목숨줄 쥐고 있는 게 누군데.”

문도는 혀를 차는 서중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일전의 사망사건으로 서유라 모녀를 협박하여 붙잡아 둘 생각일 것이다. 그러기에 느긋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문도야,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지?”

서중호는 식사를 마친 문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머니가 점심 같이하자고 하세요.”

“아, 그렇지. 그 얘기 중이었지.”

서중호가 싱긋 웃으며 물컵을 들었다. 우물우물 입을 헹구는 중호에게 문도는 말했다.

“어머니께서 내일 12시, 희연에서 보시잡니다.”

쿨럭. 서중호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 * *

삐리리리—

신호등 불빛이 바뀌었다는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길 건너에 있는 카페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간신히 걸어서 빨간불로 바뀌려는 순간 인도에 닿은 선우는 멈춰 서서 깊게 숨을 쉬었다. 툭, 하고 사람이 치고 지나가는데 몸이 휘청이며 하늘이 핑 도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쓰러지면 안 돼. 아현이가 기다리고 있어. 그 생각을 하며 선우는 힘주어 다시 발을 디뎠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웅웅거리는 것 같고, 사람들에게 치일 때마다 물살에 휘말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카페의 간판을 지표 삼아 계속 걸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와 있던 아현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선우는 푸스스 힘없이 웃었다. 울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소용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니. 괜찮으세요?”

놀란 아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선우는 마른 입술을 떼며 말했다.

“응. 괜찮아. 아현아, 앉자.”

마지막 기운을 끌어모아서 나온 자리였다. 집에서 핸드폰을 열어 민우의 메시지 속 대화들을 읽은 뒤 가슴을 움켜쥐고 몇 시간을 울었다.

그 안의 진실들, 자신이 익히 알았던 민우의 진짜 모습들, 맑게 웃고 있는 사진첩의 사진들. 그걸 보는 동안 마음은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치. 이게 내가 아는 우리 민우였지. 민우야, 누나는 틀리지 않았어.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에는 정신이 멍했다.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현이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누구보다 이 소식을 기다릴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현이에게 말을 해 주고 나서, 딱 거기까지만 하고 나서 쉬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을 감고 오래오래 잠을 자는 거야.

도무지 멀리까지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선우가 있는 동네로 아현을 불렀다. 자리에 앉은 선우는 아현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쉬었다.

“아현아. 내가…….”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눈물이 다시 뜨겁게 길을 그리며 내려왔다. 아현의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한 것이 보여서 선우는 겸연쩍게 웃으며 눈물을 밀어냈다.

“내가 뭐를 찾았거든. 그게, 우리 민우 핸드폰인데…….”

다시 눈물이 흘렀다. 크게 뜬 아현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순식간에 고였다.

“언니…….”

“응……. 내가 그걸 찾았어. 아현아, 내가…….”

담담히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흘렸는데 눈물이 어디서 또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선우는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현에게 간신히 웃어 보였다.

“민우가 그럴 애가 아니었잖아. 그치? 우리가 아는 민우가……. 그런 애 아니었잖아. 우리는 알았잖아.”

“네, 언니. 네……. 우린 알았죠. 민우는 그런 애 아니었어요.”

아현이 울먹이며 말했다.

길고양이가 마실 물을 챙기던 아이였다. 누구보다 친구들이랑 잘 지냈던 아이였고, 다섯 살이나 많은 선우를 챙기며 잔소리를 했던 아이였다.

“아마도…….”

선우는 가방에서 민우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현이 입을 틀어막으며 울었다.

“아마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이것만으론 아무것도 못 한대.”

잔인했던 남자의 말이 떠올라서 선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서문도에게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한지 몰라도, 선우에게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현아. 우리가 이제 알잖아. 우리가 맞았다는 게, 이게 정말로 맞는 거잖아. 그치?”

선우는 웃으면서 울었다. 울면서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손에 쥐여진 건 이것 하나뿐이지만 더는 욕심내지 않기로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막막하기만 했던 예전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제 아현은 아현의 삶을,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선우는 눈물을 닦아 내고 기운을 내서 말했다.

“사진첩이랑 다른 대화방은 봤는데 너랑 했던 카톡방은 안 열어 봤어.”

“보셨어도 전 괜찮은데요.”

아현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볼게. 보고 싶은 만큼 보고, 옮길 수 있는 건 옮겨서 가져가.”

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현이 테더링을 걸어 통신망을 잡은 뒤 메시지창을 띄웠다. 파일을 하나씩 보내는 동안 선우는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잠시 감았다.

“언니.”

10분이나 흘렀을까. 아현이 부르는 소리에 선우는 눈을 떴다.

“피곤하시죠.”

“아니야. 괜찮아. 울어서 그래.”

퉁퉁 부은 얼굴이 아현이나 자신이나 비슷해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다 했어요.”

“응. 그래.”

대답하고 핸드폰을 받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테이블 위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아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응. 울어서 기운이 빠졌나 봐.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아현아, 언니가 오늘 저녁도 사 주고 그래야 하는데…….”

“전 괜찮아요. 들어가서 쉬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럴게. 맛있는 건 다음에 먹자. 언니가 연락할게.”

아현과 차마 저녁까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아현과 헤어진 뒤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이 흐렸다. 본능적으로 집까지는 쓰러지지 말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을 뿐이다.

달칵.

현관문을 닫고 들어온 선우는 벽에 기대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신발을 벗고 민우의 핸드폰이 들어 있는 가방을 책상 위에 올린 뒤 침대에 천천히 몸을 눕혔다.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눈을 감아도 괜찮아.

눈을 감는 순간 까맣게 의식이 날아가며 뜨거운 열이 치솟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