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선우
무슨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선우는 알지 못했다. 눈앞은 흐리고 숨은 뜨거웠다.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명제만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
핸드폰을 꽉 쥐고 숙소동으로 올라온 선우는 옷장을 열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작은 트렁크를 꺼내 민우의 핸드폰을 제일 먼저 던져 넣고 자신의 물건을 쓸어 담았다.
지갑. 핸드폰. 태블릿 패드와 속옷. 걸려 있는 옷 몇 벌. 대충 되는 대로 쑤셔 넣다가 맥이 풀려 웃었다. 뜨거운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처음부터였다고. 처음부터.
길었던 시간들이, 망망대해를 떠돌았던 그 시간들이 해일처럼 덮쳐 왔다.
들어온 지 며칠 만에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남자의 방으로 차를 들고 올라갔을 때. 처음 남자를 받아들이며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고통을 느꼈을 때. 그래도 또다시 올라가야만 했을 때.
나는 무엇을 한 거지.
뜨겁고도 허무한 웃음이 자꾸만 나와서 선우는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웃고 있는데 끄윽끄윽 목이 졸린 소리가 나왔다.
바보 같았겠지.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나를 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매번, 당신에게 매달려서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나를 속으로 비웃고 있었을까.
그 다정했던 순간들이 전부…….
전부.
마음에 깊은 통증이 일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머리가 아프고 숨이 뜨거웠다. 눈앞이 수증기로 꽉 찬 것 같아서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가자.”
선우는 소리 내어 한마디를 힘겹게 뱉었다.
나가자. 이 집에서, 이 지옥 같았던 곳에서 나가자. 길게 꾸었던 악몽이라 생각하자. 민우 핸드폰을 다시 빼앗길 순 없어.
그 남자가 돌아오기 전에 어서 이 집에서 나가야 해.
선우는 허리를 세웠다. 가방을 들고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흐린 시야 속에서 남겨진 것들이 보인다.
열린 옷장 문, 남아 있는 레오타드와 스커트. 화장품, 머그잔, 그리고…… 서랍.
선우는 서문도에게 받은 시계와 목걸이가 들어 있는 서랍을 열었다. 걸고 있는 목걸이를 풀어서 넣고 팔찌도 풀어서 넣었다.
이걸 차고 있는 내가 얼마나 웃겼을까.
피식 웃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러니까 서문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아파하며 민우 핸드폰만 가지고 나오자고 생각했을 때, 남겨진 사람들은 어떡하나 걱정했었다.
서유라는 어떡하지. 아주머니들에겐 인사도 못 드릴 텐데. 남자가 주었던 선물들은 가져가야 할까, 두고 가야 할까. 차고 있는 목걸이 하나 정도는 가져가도 되지 않을까.
바보같이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도 모르고서.
선우는 엉망인 방을 두고 그대로 나왔다. 작은 트렁크 하나만 들고서 조용히 숙소동을 빠져나왔다. 눈물은 이제 소리 없이 한 번씩 흘러내릴 뿐이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밀어내며 선우는 깜깜한 숙소동 정원을 가로질렀다. 밤마다 숱하게 오갔던 길이 뿌옇게 보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민우 핸드폰을 찾으러 왔었고, 결국 이렇게 찾아서 나가잖아. 그거면 된 거야.
그렇게 되뇌며 돌아보지 않고 숙소동 뒤쪽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주차장 옆의 작은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깊고 푸른 새벽이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동이 트는 아침, 장 여사가 테이블 위로 맑은 콩나물국을 올려놓았다.
샛노란 조가 콕콕 박힌 조밥에 콩나물국, 장조림과 무생채, 한입거리로 부쳐 낸 버섯전과 샐러드가 문도의 앞에 놓였다.
문도는 숟가락을 들었다. 콩나물국을 한입 먹고 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천천히 전부 다 비웠다.
“여사님.”
아무렇지 않게 반찬통을 정리하고 있는 장 여사를 불렀다.
“네, 전무님.”
“이선우 해고했습니다.”
“네?”
장 여사가 뒤를 휙 돌았다.
“질려서 잘랐어요. 밤에 나갔을 겁니다.”
담담히 말했다. 장 여사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입술이 벌어졌다. 아니, 왜……. 멍하니 흘러나오는 말을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줄 아시고, 숙소동에 남은 짐 있으면 정리해 주세요.”
“전무님.”
둘이 만나던 거 아니었냐,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그렇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람을 잘랐냐. 장 여사의 얼굴에 하고 싶은 말들이 쓰여 있었다.
“이선우가 오래 만날 사람은 아니잖아요.”
구질구질한 설명 따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여사도 이선우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만, 그 전에 미리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실망스런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장 여사를 보며 문도는 피식 웃었다.
“뭘 또 그렇게 봐요.”
이선우는 내보냈고 식사도 마쳤다. 숙소동 정리는 장 여사가 알아서 해 줄 테고.
칼을 쥔 손으로 제일 먼저 이선우를 베었으니, 이제는 남은 사람들을 상대할 시간이었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겨 들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 안 나오게 정리나 잘 해 주세요.”
네, 마지못해 대답하는 장 여사에게 웃어 준 뒤 문도는 다이닝룸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목을 한 손으로 꾹 쥐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아,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뜰 뿐이다.
* * *
“야, 너! 너 잘 만났다!”
자정이 넘어 별채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형형한 눈빛의 서유라였다. 문도는 몰골이 엉망인 서유라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니가 이선우 잘랐다며? 아, 씨바 진짜 누구 맘대로 자르래?”
쾅, 하고 서유라가 발을 굴렀다. 씩씩대는 얼굴이 무척 흥분한 것 같았다.
“갑자기 어? 말도 없이 사람을 잘라? 그것도 내 시중들던 애를? 니가 뭔데! 니가 무슨 권리로 걜 잘라? 돌려내! 다시 찾아오라고!”
웃음이 조금 나왔다. 언제부터 서유라가 이렇게나 이선우를 절절히 여겼나 싶어서.
“너 그거 갑질인 거 알지? 하루아침에 애를 쫓아내? 그것도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너는 인성이 글러 먹었어! 알아, 이 새끼야?”
귀찮아서 상대하지 않으려는데 서유라가 그를 쫓아오며 귀를 따갑게 했다.
“왜 자른 건데? 이유가 대체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었잖아!”
이유를 안다고 달라질 것이 있나. 굳이 듣기를 원한다면 대답은 해 줄 수 있지.
“그야 쓸모가 다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렇게 한순간에 잘라? 이 나쁜 새끼야! 너는 진짜 피도 눈물도 없지!”
서유라의 입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라는 욕을 들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여섯 명의 트레이너를 갈아 치운 일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단순한 뇌가 부럽기도 했다.
“돌려내! 이선우 돌려내라고!”
서유라가 다시 발을 구르며 악다구니를 썼다. 이선우가 누군지 알면 이런 말이 나올까. 패악을 부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간절하면 직접 찾아보시던가.”
“선우가 전화를 안 받잖아!”
갑자기 튀어나온 선우, 라는 단어가 목을 뎅강 치는 기분이었다. 숨을 삼킨 문도는 유라를 지나쳐 걸었다.
“애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선우가 내 전화까지 안 받는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선우.
서유라가 쫓아오며 또 그 이름을 말했다. 무딘 칼날이 다시 목을 슥 긋는다. 문도는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았다.
“나가라고 고사를 지낼 땐 언제고, 이제 와 찾으시면.”
한 번 숨을 쉰 뒤, 문도는 웃으며 말했다.
“이선우가 돌아올까?”
그를 쏘아보는 서유라의 눈이 빨개졌다. 분한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보며 문도는 다시 말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요.”
아아악! 서유라가 제 머리를 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박소영의 성질머리를 닮은 서유라는 제 뜻대로 안 되면 발작을 하곤 했다. 쾅쾅 발을 구르고 머리를 쥐어뜯는 유라를 보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도 정을 주었나. 마음을 빼앗겼나. 그래서 이렇게 울며 찾는가.
“고모님.”
문도는 자신보다 세 살이 어린 고모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에 처음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이선우가 대단한 일 하네.
“정신 차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깟 이선우가 중요한 게 아니야. 본인 살길이나 찾아 놓으세요.”
서유라는 알까.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 주는 진심 어린 충고라는 걸.
이선우를 떠나보냈다. 이름만 떠올려도 목이 베이는 것 같은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절벽에서 밀었다. 떨어지는 여자의 눈동자가 부서져 내리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 파편을 딛고 섰으니, 문도는 아무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서유라도 최지상도, 서용호도 아버지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던 문도는 걸음을 멈추며 소리를 냈다.
“아.”
뒤를 돌아 서유라를 보면서 말했다.
“하나 더. 다시는 그 여자 이름 내 앞에서 말하지 마세요.”
그땐 정말 네 목을 졸라 버릴지도 모르니까.
문도는 빙그레 웃었다. 서유라가 미친놈 보듯 자신을 보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정상은 아니었으니.
2층으로 올라온 문도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장 변호사의 번호를 찾았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건조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불이 꺼진 숙소동 마지막 방에 시선을 두고서 조용히 웃었다.
네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눈을 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 지그시 눈을 감는다.
— 네, 장현성입니다.
“서문도입니다.”
— 네, 전무님.
“얼마나 준비되었습니까?”
— 사람은 섭외되었습니다. 몇 가지 세팅만 더 하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틀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선우를 찾아내라고 악을 쓰던 서유라를 떠올렸다. 서용호 측과 얘기가 거의 끝났다지. 며칠 안에 딜을 하러 찾아올 박소영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조만간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