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97화 (97/168)

97. 여기 있었어

자정을 10분 남겨 놓고 전화가 왔다. 선우는 핸드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서문도의 목소리가 울린다.

“네, 전무님.”

— 엘리베이터 탔어요. 건너와요.

“네. 금방 갈게요.”

선우는 핸드폰을 책상에 두고 방을 나서려다가 뒤를 돌았다. 서랍을 열어서 서문도가 선물했던 목걸이를 꺼냈다.

반짝이는 메달을 바라보던 선우는 망설이다가 목에 걸려 있던 가는 목걸이를 풀었다.

팔을 뒤로 돌려 새로 받은 목걸이를 찼다. 빛을 받은 다이아몬드 조각들이 거울 안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여전히 부담스럽고 화려했지만, 남자가 목걸이를 보고 잠깐이라도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 일에, 승계 문제에, 삼우제까지 치르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혹시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날까 싶어 카디건 안으로 목걸이를 집어넣고 선우는 숙소동을 나섰다.

주방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유라는 방으로 들어갔는지 다이닝룸은 비어 있었고, 테이블 위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선우는 조용히 계단을 밟아 별채의 2층으로 올라갔다. 중문은 언제나처럼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선우도 평소와 다름없이 열린 문을 두드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들어감을 알렸다.

“전무님, 이선우입니다.”

“들어와요.”

선우는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셔츠 차림의 서문도는 진열장 앞에서 시계를 풀고 있다가 선우를 보고 흘깃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 생각하며 선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물었다.

“삼우제는 잘 치르셨어요?”

선우의 말에 문도가 말없이 웃는다. 진열장 서랍을 열어 시계를 집어넣고 옅은 한숨과 함께 타이를 풀어 진열장 위로 툭 던지며 말했다.

“서유라가 별말 안 해요?”

별말이 무엇일지 선우는 잠시 생각했다. 서유라는 삼우제를 다녀온 뒤 이 집을 나가겠다고 했었다.

그것도 거의 확정적으로 이야기하며 같이 나가자는 말을 했다. 삼우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뭐가 있는데, 말을 안 하네.”

서문도가 말하며 피식 웃었다. 감았다 뜨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날카롭고 단단한 빛을 뿜는다.

“제사 지내다 형제간에 개싸움 했다는 말, 안 해요?”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문도가 주머니 안쪽에서 자그마한 USB를 꺼내 진열장 위로 올려놓으며 말했다.

“큰집 라인 타겠다는 말도 안 하고?”

남자는 궁금해하는 게 아니었다. 확인을 하고 있는 거였다. 서유라가 얘기한 게 있을 텐데 왜 자신에게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인지를.

선우는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조만간 나갈 것처럼 말씀하시긴 했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같이 나가자고도 하셨고요.”

그 말에 문도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조소를 날린 남자가 가볍게 묻는다.

“그래서, 같이 나가게요?”

선우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서문도를 바라보았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유라가 이 집에서 나가게 되어, 선우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된다면 서유라를 따라가는 것이 맞았다.

민우의 핸드폰을 찾을 수 없다면, 서문도와의 연애는 그 의미를 잃는다. 이 관계는 민우의 핸드폰을 찾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더는 쓸모 없어진 연애놀음은 그만두고서 서유라라도 붙들어야 하는 것을 안다.

대답을 기다리던 남자가 피식, 친근하게도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가볍게 스치는 손끝에도 마음에는 물결이 일었다.

아직은.

아직은 이런 순간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멀지 않은 훗날에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아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유라 씨가 나가면 저도 나가야겠지만, 트레이너 일을 더 할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선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흠,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남자가 선우를 보았다. 그러다 담담히 말한다.

“뭘 더 해. 그냥 나랑 연애나 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선우는 그 말을 삼키며 조용히 웃었다. 민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지 못한 자신은 영원한 반쪽짜리일 뿐이다.

“생각해 볼게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선우는 조만간 결정의 순간이 올 거라는 것도, 서유라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는 이 관계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끝이 올 때까지는 아직 끝이 아닌 걸로.

선택은 마지막에, 정말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그때 하는 것으로.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진열장 위에 놓인 USB를 집은 남자가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시계며 타이 등이 놓여 있는 서랍형 진열대 아래의 수납장 문을 연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드르륵.

남자의 손이 움직이며 문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선우의 시선이 아래로 쏠렸다. 이미 한 번 살펴보았던 곳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간 선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안쪽의 막힌 벽이라 생각했던 부분이 옆으로 밀려나며 번호가 달린 금고가 나왔다.

놀란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아 선우는 주먹에 힘을 주며 입술을 세게 다물었다.

삐삐삐삐, 삐.

선우는 서문도의 손가락이 누르는 버튼을 숨도 쉬지 않고 바라보았다. 금고 문이 열렸다. 남자의 뒷모습에 반쯤 가려진 윗칸에 무언가가 보였다.

“서유라한테 말해야 하나. 이선우 내 꺼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안쪽으로 툭 USB를 넣으며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머리 옆으로 비닐 지퍼 백에 들어 있는 핸드폰 무더기가 보인 순간 선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내면 안 돼.

선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와중에도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침착해.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해.

오직 그 생각 하나로 선우는 손을 내리고 눈을 떴다. 속이 덜덜 떨려와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삐리릭, 금고의 문이 잠겼다. 문도가 사라진 벽을 다시 당겼다. 합판으로 된 미닫이문이 닫히며 공간은 다시 비어 있는 수납장이 되었다.

“말할까요?”

문도가 몸을 돌리며 선우에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선우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선우 내 꺼라고 서유라한테 말해?”

이선우, 뭐 하는 거야. 입을 열어. 대답을 해야 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하고 방으로 가자고 해. 남자를 재우고 그리고…….

“아……니요. 그건……. 나중에. 나중에, 제가 말, 할게요.”

“나중에 언제요.”

한 발 다가오는 서문도를 보는데 어지러웠다. 비스듬히 미소를 지으며 문도가 한 손으로 선우의 뺨을 쥐었다.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목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들키면 안 돼. 떨면 안 돼.

선우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걸며 남자의 셔츠를 쥐었다.

“오늘, 자고 가도 될까요?”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애써 웃고 있는 입꼬리가 떨려 왔다. 서문도가 다정히 웃으면서 선우에게 답했다.

“잘됐네. 나 좀 재워 줘요. 거의 못 잤거든.”

* * *

문도가 씻으러 들어가 있는 동안 선우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심장은 둥둥 울렸고, 귀는 물을 먹은 것처럼 먹먹했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여기 있어. 여기에 있었어.

지그시 눈을 감은 선우는 아프게 침을 넘겼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으로 망망대해를 건너온 지 몇 개월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 집에 갇힌 채 계절이 바뀌었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매일 마음이 쓸리고 다치는 게 일이었는데.

마음에도 지문이 있었다면 벌써 닳아 없어졌을 거였다. 거지 취급도, 창녀 취급도, 고아 취급도 받아 가며 버텼던 날들이었다.

엄마와 아빠 생각이, 차가운 시체로 보았던 민우의 모습이 생각이 나는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목 끝까지 뻐근하게 차올랐다. 선우는 눈을 힘껏 감았다.

울면 안 돼. 아직은, 안 돼.

“씻어요.”

드레스룸으로 가는 문이 열리며 문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남자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아, 저는 씻고 왔어요.”

마지막까지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을 주문처럼 외었다. 마지막 밤이었다. 선우는 입고 있던 카디건의 단추에 손을 댔다. 제일 윗단추를 푸는데 문도가 침대 옆에 앉는다.

“하고 싶어요?”

선우의 눈빛이 문도의 얼굴 위를 헤매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선우는 알 수 없었다.

이 밤을 보내야만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단추를 풀긴 했지만 이렇게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잠자리를 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힘껏 안기고도 싶었다. 동시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자를 이용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잘 모르겠어.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을 때, 문도가 선우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피곤해서 못 안아 줄 것 같은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가 그대로 몸을 침대에 누이며 말했다.

“이리 와요.”

선우는 팔을 내어 주는 남자의 옆에 누웠다. 문도가 선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마주 보고 누워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동안 선우를 보던 문도가 조금 쓸쓸히 웃더니 선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이구나.

실감이 나는 순간 선우는 눈을 꾹 감았다. 마음에 거센 파도가 일었다. 우르르 부서지는 기분은 무엇일까. 원했던 민우의 핸드폰은 바로 저기에 있는데.

이 남자와 지냈던 시간은 전부 다 허상이었는데. 힘들었던 내 마음이 지어낸 신기루 같은 것이었는데. 무엇이 부서지고 있는 걸까.

“바빠지면 또 못 보니까. 자고 새벽에 가.”

문도가 선우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남자의 품에 안긴 채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으며 나머지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핸드폰을 찾게 되면.

숙소로 돌아가야겠지. 꼭 필요한 것만 챙겨서 신속하고 조용하게 나와야 할 거였다.

남자가 주소를 알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고, 되짚어 추적할 수 있는 곳으로도 가면 안 되었다.

남자의 숨소리가 고르게 퍼져 나갔다. 피곤하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선우의 허리를 감고 있었던 팔도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마음이 까맣게 가라앉는다. 이렇게 마지막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누군가 예고 없이 마음을 툭 잘라 버린 기분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당신은 나에 대해 알게 되겠지. 배신감에 몸을 떨까. 차갑게 경멸할까. 싸늘히 조소하다 잊어버릴까.

그 무엇이 된다 해도 괜찮으니, 당신이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

나를 잊어도, 미워해도, 부정해도 좋으니까 당신만은 아프지 않기를. 나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기를.

조금 더 시간을 죽인 선우는 천천히 문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잠든 남자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밤이 깊어간다. 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는 소리 없이 마스터룸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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