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너, 내 편이지?
장례가 끝나고 3일이 지났다.
삼우제를 지내는 날이라 아침부터 숙소동은 제사 음식을 마련하느라 바빴다. 아침을 일찍 먹은 선우도 주방 아주머니를 도와 제기를 닦았다.
“보자, 과일은 이쪽에 있고. 곶감, 한과, 밤, 대추……. 떡이랑 포도도 넣었고.”
조리사 아주머니가 다시 한번 더 체크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건너갈게요.”
막내 아가씨도 얼른 깨워야 할 테니 어서 건너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선우는 숙소동을 나왔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었다. 여름 기운이 완전히 걷혀 버린 아침은 제법 쌀쌀했다.
정원을 건너며 선우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녀를 품에 안고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남자는 고요히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장례 후 3일이 지나는 동안 선우는 서문도를 스치며 보는 일도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새벽에나 들어오는 남자는, 당분간 바쁘니 올라오지 말라는 메시지 하나만을 남겨 놓았다.
서유라의 말에 의하면 아마 정신없을 거라고 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후계 싸움의 서막이 오른 건 아니지만, 서로가 물밑에서 많은 일들을 준비하는 듯했다.
서유라만 보아도 자주 서용호의 변호사와 통화를 했고, 한 번씩 박소영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늘도 없을까.
선우는 그 생각을 하며 별채의 문을 열었다. 서문도 전무가 없는 아침이면 2층으로 올라가 잠깐씩 드레스룸을 뒤졌다.
서랍과 박스, 보관용 파우치와 수납함. 매일 조금씩 진도를 나가다 보니 이제는 살펴볼 곳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전부 찾아본 뒤에는…….
아직은 생각하지 말자.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민우의 핸드폰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건 선우도 잘 알았다. 서문도 전무가 핸드폰을 보관할 곳은 차고 넘쳤으니까.
회사가 될 수도, 은행의 금고가 될 수도, 보관이 용이한 다른 사람에게 넘겼을 수도 있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언제나 아주 작은 가능성에 매달려 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는 것. 아무리 바보 같고 아무리 미련해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는 것. 그때까지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그게 선우의 최선이었다.
그러니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전부 찾아본 뒤에, 정말로 더는 찾아볼 곳이 남아 있지 않을 때 포기해도 늦지 않으니.
“유라 씨.”
선우는 현관으로 들어가며 유라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서문도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올라갔는데 거실 쪽으로 신경이 훅 쏠렸다.
여기 있구나.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느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문도가 물컵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는다. 누적되었던 피로 따윈 말끔하게 털어 버린 강건하고 매끄러운 모습으로.
“잘 지냈어요?”
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남자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는 걸 알아챈 순간 한발 늦은 대답이 나왔다.
“네, 잘 지냈어요. 전무님도 그간 잘 지내셨어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어서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뭐에 당황을 했는지 선우도 알 수 없었다.
너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서인지, 새삼스럽게 남자의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아서인지.
“바빠서 연락도 못 했는데, 이렇게 보네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셔츠에 검은색 팬츠를 입은 남자가 선우를 향해 걸어왔다. 길고 탄탄한 몸이 햇빛을 가르며 걸었다.
“오늘이 삼우제라고 들었어요.”
문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이렇게 얼굴도 보고. 좋네요.”
남자는 매끄럽게 미소를 짓는데 선우는 남자가 낯설었다. 아니, 사실 낯선 건 아니다. 늘 보았던 예전 그 모습이었다.
멀고 어렵게 느껴져, 말 한마디를 붙이기가 힘들었던 그 모습.
“힘들진 않으세요?”
“아직은 할 만해요.”
그리 힘들지 않다는 듯 남자가 웃었다.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휘몰아치듯 자신을 안았던 남자의 모습은 환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 저는, 유라 씨 깨우러 가 볼게요. 오늘 성묘 가야 한다고 일찍 깨우라고 하셔서요.”
“그래요. 나도 이제 본관에 건너가야 할 시간이라.”
서문도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선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서유라가 있는 게스트룸으로 막 걸음을 옮기는데 서문도가 선우를 불렀다.
“이선우 씨.”
“네.”
선우는 고개를 돌려 문도를 보았다. 남자가 선우를 본다. 짧은 시간 오래도록,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선우에게 머물렀다.
“오늘은.”
말을 하고서 다시 그녀를 보았다. 담담한 목소리였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올라와요. 연락할 테니까.”
“아……. 네.”
그 말을 끝으로 문도가 몸을 돌렸다.
“전무님.”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선우는 충동적으로 뒷문으로 향하는 남자를 불렀다. 뒤를 돌아본 남자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선우를 보았다.
서문도를 향한 시야의 옆으로 거실로 들이치는 햇살이 보였다. 환한 아침이었다. 언제든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시간.
“성묘 잘 다녀오세요.”
이 정도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좋아해서는 안 되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좋아하길 바란다는 것 역시 그랬다.
“그럴게요.”
서문도가 말했다. 더 할 말이 없는 선우는 머뭇거리다가 이만 뒤를 돌았다. 몇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 *
삼우제를 마치고 돌아와 한숨 자고 일어난 서유라는 다시 예전 모습을 찾았다. SNS에 묘지 사진을 올리고 흰 국화꽃 사진도 올리며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댓글 짱 많이 달리는 거 봐. 한 번씩 쉬었다가 하는 것도 괜찮네? 근데 왤케 안 와. 배고파 디지겠는데.”
거실 소파에 누운 서유라가 말했다. 오랜만에 야식으로 닭발에 소주를 먹고 싶다는 말을 해서 주문을 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금방 올 거예요.”
선우는 다이닝룸 식탁에 수저와 그릇을 세팅하며 말했다. 밖은 깜깜한 밤이었다.
“사모님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사모님? 엄마?”
“네.”
“괜찮아. 아까 변호사랑 통화하더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운다고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그렇게 대답한 서유라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재생했다.
‘안녕하세요, 최지상입니다.’
최지상의 목소리가 핸드폰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로 거실을 울렸다.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지목되었다며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더 잘나가네. 짜증 나.”
서유라가 삐죽거렸다. 유라의 말대로 최지상은 요새 연일 주가를 올리는 중이었다.
유명한 드라마 작가의 차기작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는가 하면, 영화 계약 소식도 속속들이 들려왔다.
“아직도 연락이 잘 안 되세요?”
“됐다 안 됐다 그래. 그게 더 짜증 나지 않냐? 아예 생까면 찾아가서 지랄할라 그랬거든? 그럼 전화가 온다? 아빠 죽고 계속 연락 없길래 다 뒤집어 버릴까 생각했는데 아까 전화 와선 괜찮냐고 묻더라? 근데 썅, 만나긴 어렵대.”
서유라는 스케줄이 너무 꽉 차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한 것도 짜증 난다고 했다. 선우는 몇 주 전에 받았던 최지상의 메시지를 생각했다.
‘뭐 좀 찾아낸 거 없어요?’
없다는 답 문자를 보냈더니 전화를 걸어왔다. 방송에서 칭송받는 예의 그 상냥한 목소리로 선우의 안부를 물었고, 핸드폰에 관해 새 소식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했었다.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할게요. 이선우 씨만 믿고 있어요.’
선우는 검은색 바둑알 같았던 최지상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기분 나쁘고 섬뜩했던 눈동자를.
물증은 없지만 선우는 그가 민우를 죽인 범인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서유라를 관리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을 주시하는 것도, 혹시라도 사건에 대해 알려지면 어떡하나 불안감이 가중되었기 때문인 듯 보였기에.
그런 사람의 인기가 고공 행진을 하는 걸 보면 인과응보라는 게 있는 걸까 싶기도 했다.
“어? 왔다.”
주방 뒷문이 열리고 조리사 아주머니가 닭발과 소주를 들고 왔다.
선우가 받아서 상을 차리는 동안 서유라는 소주부터 따서 커다란 유리컵에 넣었다. 그 위로 맥주를 부어 소맥을 만든 뒤 한 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캬. 이거지.”
“내일부터 운동 스케줄 다시 잡힌 거 잊지 않으셨죠?”
“알아. 알아. 오늘만 마실 거야. 아빠 죽었는데 술 한잔은 해야지. 아, 엄마도 부를까. 그래야겠다.”
서유라가 박소영과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는 여분의 그릇과 술잔, 수저를 챙겼다.
“저는 이만 퇴근할게요.”
통화를 마친 서유라에게 말하자 유라가 닭발 하나를 뜯다가 고개를 들고 선우를 보았다.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알써. 가 보고.”
“네.”
“야.”
거실에 둔 가방을 챙기러 가는데 서유라가 선우를 불렀다.
“네.”
서유라가 물끄러미 선우를 보더니 툭 던지듯이 물었다.
“너 내 편이지?”
몇 번이나 그렇다고 대답을 했던 질문이었는데 오늘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생각하며 입을 떼는데 서유라가 먼저 말했다.
“조만간 이 집 나간다. 그때 같이 가. 엄마랑 이것보다 훨 크고 좋은 집에서 진짜 기깔 나게 살 거야. 그럼 너는 내 매니저 시켜 줄게.”
주스를 쏟아붓고 욕설을 퍼붓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서유라와도 멀리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유라가 이 집에 없으면, 선우 역시 이 집에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선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유라가 들고 있던 닭발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알았어. 가 봐.”
선우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주방의 뒷문을 열었다. 정원을 건너며 불이 꺼진 2층을 올려다보았다. 서문도를 만나기로 한 자정까지는 두 시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