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2)
비가 그쳤다. 발인을 하는 날은 무더운 여름날 같았다. 회장이 다니던 절의 큰스님인 정운 스님이 운구 행렬의 제일 앞에 섰다.
그 뒤를 영정 사진을 든 서창도가 따랐다. 서용호와 서중호를 포함한 직계 가족들이 그 뒤를 따라 나오고 이어서 커다란 관이 들려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찍었다.
서용호 일가를 태운 차가 먼저 장지로 향하고, 그 뒤는 관을 실은 운구 차량이 따랐다. 운구 차량의 뒤를 따르는 검은 세단들이 길게 줄을 잇는다.
하남에 있는 장지에 서 회장을 묻고 돌아오는 길, 산을 내려온 서도 일가는 제각기 다른 차량을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당신 고생했어요. 문도 너도 수고 많았다. 쉬어라.”
오후가 되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서중호가 말했다.
“아버지도 고생 많으셨어요. 쉬세요.”
문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중호는 회장이 머물던 방을 바라보다 2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에는 우현희와 문도만 남았다.
“며칠째 못 잤을 텐데 너도 건너가서 쉬렴.”
“드릴 말씀 있습니다.”
문도는 피곤한 걸음을 옮기는 우현희에게 말했다. 우현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이선우 문제예요. 서유라 문제이기도 하고.”
우현희가 물끄러미 문도를 보다가 대답했다.
“그래. 올라가자꾸나.”
우현희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문도는 서재로 들어가 길쭉한 소파에 앉았다.
“말해 보렴.”
마주 앉은 우현희의 얼굴에는 옅은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문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서유라가 사고 쳤던 날, 남자애 둘이 죽었어요. 한 명은 김영재, 다른 한 명은 이민우. 사인은 약물 과다였고요.”
여기까지는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우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우 뒤를 캐다가 사망사건인 줄 알았던 그 사건이 실제는 살인사건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잠시 뜸을 들인 뒤 문도는 이어서 말했다.
“진범은 서유라 애인 최지상. 서유라는 공범 내지는 방조. 아버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장 변호사는 서유라의 증언에 맞춰서 증거를 조작했고요. 이선우는.”
문도는 우현희를 보며 말했다.
“죽은 이민우 누나였습니다.”
우현희는 눈을 크게 떴다. 문도는 핸드폰을 꺼냈다. 폴더 하나를 열어 우현희 앞으로 밀어 주었다. 그간 모아 두었던 증거들이 우현희 앞에 펼쳐졌다.
꼼꼼히 자료를 읽은 우현희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문도는 차분히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사실 선택은 단순했다. 터트리느냐 덮고 가느냐.
“네 생각은?”
우현희가 눈을 뜨며 물었다.
굳이 답한다면 안고 갈 이유가 없다, 정도가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출혈은 분명 예정되어 있었다.
사건을 조작한 배후로 지목되면 타격은 불가피하다.
빠져나갈 구멍은 있겠지만 한동안 추문에 휩싸여야 할 것이고, 지분 승계가 마무리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서용호 일가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는 꼴이 된다.
“고모랑 큰아버지가 연합하겠죠. 서유라도 거기 낄 수 있고요.”
나머지 형제들이 서용호를 주축으로 연합해서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대응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저쪽도 눈 뒤집고 덤벼들 테니 이쪽도 총력을 다해야 했다.
“서유라가 저쪽으로 움직이면 그때 터트릴까 해요.”
우현희가 다시 눈을 감는다.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눈을 뜬 우현희가 문도를 보면서 말했다.
“이선우 씨는.”
문도는 망설임 없이 이어서 답했다.
“정리합니다.”
그 말에 우현희가 문도를 응시했다. 문도는 고요히 어머니를 마주 보았다.
이선우는 이 판에서 제거해야 하는 변수였다. 여러 면으로 방해가 되는 존재이니.
그토록 찾아 헤맨 이민우의 핸드폰을 쥐여 주고서 내쫓을 생각이다.
진실은 알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살인의 증거가 되기엔 무쓸모한 이민우의 핸드폰. 그게 그가 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사안이 너무 크구나. 썩은 종기는 하루빨리 도려내는 게 맞아. 경영권 방어 준비는 되어 있으니 이게 터진다고 해서 판세가 뒤집힐 일은 없고.”
어머니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서용호의 비자금은 이쪽에서 나온 것이니 판이 뒤집힐 일은 없다. 썩은 살은 다소 출혈이 있어도 일찌감치 도려내는 게 깔끔하고.
“기다릴 필요 없이 우리가 먼저 터트려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시기에 대해선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꾸나. 조만간 큰집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테니.”
문도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쉬세요.”
“문도야.”
일어나는 문도를 우현희가 불렀다.
“네.”
“괜찮겠니?”
문도는 무심히 말했다.
“뭐가요.”
우현희가 그를 말없이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피곤했을 텐데 건너가서 쉬렴.”
피식 웃은 문도는 조용히 서재의 문을 닫고 나왔다.
* * *
본관을 나서자 뜨거운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여름처럼 더운 날이어서인지, 피곤이 오래되어서인지 유난히 눈이 부셨다. 가늘게 눈을 뜬 문도는 별채로 향하며 명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전무님.
“핸드폰 사진 하나 보낼 테니 같은 기종으로 준비해 주세요. 겉모습도 최대한 똑같이 만들어 주시고요.”
— 네. 알겠습니다.
문도는 사진첩을 열어 이민우의 핸드폰 사진을 명 실장에게 전송했다. 별채로 걸어가다가 문득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여름내 질겼던 꽃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몇 송이만이 남아 줄기의 끝에 매달려 있었다.
문도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채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귀찮았다. 불면과 피로가 누적된 몸은 생각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누군가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어깨가 무지근했다.
어깨를 주무르면서 고개를 젖히는데 딩동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눈을 뜨니 엘리베이터 안에 서유라가 있었다. 옆에는 서유라의 짐을 들고 있는 이선우의 모습도 보였다. 문도는 서유라를 보며 말했다.
“이제 도착했나 보네요.”
뒤늦게 장지에 도착한 박소영을 보고 출발하느라 늦게 도착한 듯했다.
“고모님도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서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스쳐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선우가 걸음을 늦추면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전무님 오셨어요?”
문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유라가 빨리 오라고 선우를 독촉했다. 이선우가 그를 한 번 돌아보더니 서유라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의 금빛 문에 검은 슈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문도는 무감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씻고 나온 서유라가 담배 한 대를 피더니 침대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길게 누운 뒤 선우를 불러 다리 마사지를 해 달라고 했다.
“절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 손님은 왤케 많이 와.”
“고생하셨겠어요.”
“죽기 전에 엄마한테 뭐라도 좀 챙겨 주고 죽든가. 꼴랑 페라리 한 대가 뭐냐.”
투덜거린 서유라는 선우가 다리를 꾹꾹 누르며 지압을 해 주자 시원하다는 듯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다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안대를 벗으며 말했다.
“나 여기 나가면 너도 나 따라갈래?”
“네?”
“큰오빠가 그러는데 나도 내 몫 찾을 수 있대. 셋이 힘을 합치면 둘째 오빠 밀어 버릴 수 있다더라? 그럼 나도 내 몫 뗘 준댔거든.”
방송에서 언론에서 서도 그룹의 경영권 이야기를 다룬 것을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돈 생기면 이런 거지 같은 생활도 끝이야. 하암. 나 나가면 너도 같이 나가아자…….”
마지막 말이 길게 늘어졌다. 서유라는 이마에 올렸던 안대를 툭 내리더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선우는 에어컨 온도를 적당히 맞추고 게스트룸을 나왔다. 거실에 나오니 집 안은 괴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퇴근 시간은 10시. 지금은 오후 5시. 서유라는 깊게 잠들었고 시간은 한참 남았다.
올라가도 될까. 선우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망설였다.
피곤해서 그랬는지 무감했던 남자의 모습이 생각났다. 올라오라는 말도, 메시지도 없었지만 올라가 보고 싶었다. 잘 다녀왔냐는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
계단을 올라가니 중문이 닫혀 있었다. 어쩌면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내려갈까 생각하다가 충동적으로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으면 그냥 내려가고, 깨어 있으면 잠깐만 보고 갈 생각이었다.
“네.”
“이선우예요.”
“……들어와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문도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위스키가 반쯤 차 있는 잔을 쥐고서 선우를 물끄러미 본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이에요. 대답을 하고 싶은데 목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서유라는 어쩌고 올라왔어요.”
“유라 씨는 조금 전에 잠들었어요.”
선우의 대답에 문도가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들었다. 맑은 갈색과 투명한 금색이 섞인 것 같은 액체가 기울어지며 남자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발인은 잘 마치셨어요?”
이리 오라는 말도, 보고 싶었다는 말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선우가 물어볼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먼저 다가가 다정히 안아 주면서 장례식은 잘 마쳤냐고, 많이 걱정했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우의 핸드폰만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걸 알았다. 연기를 빌어서 진심을 말해 보고도 싶었다.
그 마음을 참는 건, 서문도의 마음이 깊어질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미 늦어 버린 자신은 이 미련한 마음에 삼켜진다 해도, 남자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기에.
핸드폰을 찾으면 선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집을 떠날 거였다. 이런 여자를 너무 좋아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플 정도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모든 게 끝이 났을 때 아픈 건 이선우 하나였으면 한다.
“피곤해 보이세요.”
선우의 말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다시 독한 술을 한 모금 기울이는 남자에게 선우는 말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러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문도가 술을 마저 비웠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에게 말한다.
“이선우 씨도 이만 건너가서 쉬어요.”
선우는 느린 걸음으로 침실을 향해 걷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잠에서 깰 때마다 남자가 옆을 지켜 주었던 게 생각이 났다. 혼자서는 뒤척였던 밤이었는데, 사람의 온기가 있을 때는 그래도 조금 더 잘 수 있었다.
“저…….”
선우는 망설이다가 문도를 불렀다. 문도가 마스터룸의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같이 있어 드릴까요? 잠이 드실 때까지만.”
문도가 한참 선우를 보았다. 그러다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