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아직 아니야. 그러니까
“그래요. 그럼 어느 호텔로 갈까요.”
서문도가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선우 혼자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상황인가 보다. 선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와 갔던 호텔은 두 곳이었다.
“전무님은 어디가 더 편하셨어요?”
선우의 질문에 문도는 웃었다. 어디가 더 편하냐니. 침대가 있었다는 것 외에는 어떻게 생겨 먹은 룸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디든 상관없었다는 걸 이선우는 모르나 보다.
“이선우 씨는 어디가 더 편했어요?”
질문을 거꾸로 되돌리자 선우가 멀리 풍경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을 하더니 답을 했다.
“저는 두 번째로 갔던 곳이 더 좋았어요. 짜장면도 맛있었고요.”
우스운 말이지만 여자의 이런 모습들이 좋았다. 이런 모습들도 좋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선우는 한 번씩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좋았다.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에 더해진 차분함이 좋았다.
그럼 거기로 가자는 말을 하려는데, 선우가 음,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골라야 한다면 톨게이트에서 더 가까운 곳이 좋을 것 같아요.”
문도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웃고 있지만 피가 몰렸다.
차에서 덮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중인데, 이선우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불을 지펴 댄다.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다른 호텔로 갈까요?”
“좋아요.”
두 번 생각도 않고 말하는 선우 때문에 문도는 열 오른 웃음을 삼켰다.
“어딘 줄 알고 좋대.”
“사실은 아무 데나 상관없어요. 둘이서 있을 수 있으면……. 다 좋아요.”
말해 놓고 조금 창피한지 선우의 뺨이 옅은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문도는 기막혀서 웃었다. 이렇게 달콤한 거짓말이라니. 터지겠네.
“그때처럼 내가 심하게 하면 어쩌려고 이래. 겁도 없이.”
그 말에 선우는 무릎 위에 올려 둔 핸드백의 어깨끈을 꾹 쥐었다.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흘러가는 풍경을 한참 동안 보더니 작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정말로 괜찮아. 환청처럼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다 괜찮아. 네가 내게 무엇을 원하든, 무엇을 구하든. 나도 다 괜찮아.
문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력을 높였다.
* * *
톨게이트에서 가깝다던 호텔은 선우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백화점과 호텔이 연결되어 있어서 서유라가 쇼핑을 하고 최지상을 만날 때 자주 드나들던 그 호텔이었다.
“점심은 여기서 먹고 올라가죠.”
8층의 라운지에서 체크인을 하고 온 문도가 말했다. 선우가 왜요? 라고 묻듯이 바라보자 웃으면서 답했다.
“올라가면 밥 못 챙겨 먹일 거 같아서.”
가볍게 웃고 있지만 남자의 눈동자에는 욕망이 일렁이며 타고 있었다. 선우는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직원이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아서 봉골레 파스타와 햄과 치즈가 들어 있는 파니니를 먹었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한 번씩 더 리필을 해서 마시며 천천히 식사를 끝냈다.
“다 먹었어요?”
문도의 물음에 선우는 네, 하고 대답했다. 서문도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데 선우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문도가 데스크 앞에 섰다.
“계산할게요.”
카드와 빌지를 내미는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선우는 빌지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손을 보는데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밤을 보냈지만 손을 잡은 기억은 없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면 우리도 평범한 연인들처럼 보일까.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내 충동으로 변했다.
먼저 잡아 볼까. 그래도 되려나.
선우는 오늘만큼은 내키는 대로 하기로 결심했던 것을 떠올렸다.
망설이던 선우는 비어 있는 문도의 손에 자신의 손을 끼워 넣었다. 움찔 놀란 서문도가 고개를 휙 돌려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뜬 눈이 선우를 본다. 긴장한 선우가 자신도 모르게 속입술을 깨무는데 커다란 손이 선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선우는 아, 하는 탄식을 삼켰다. 손만 잡았는데 몸 전체가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찌릿찌릿 전기가 이는 것 같았다.
팔을 타고 올라온 전류는 가슴을 거쳐 아랫배를 조여들게 했다. 마른침을 넘기는 순간에도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엘리베이터를 무슨 정신으로 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문도가 이끄는 대로 따라만 갔다.
서문도는 선우를 보지 않았다. 묵묵히 엘리베이터의 출입문에 시선을 둔 채, 다만 힘주어 선우의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서 복도 끝에 위치한 객실 앞에 섰을 때, 문도가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다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돌겠네.”
작게 중얼거린 그 말이 뜨거워서 목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한숨을 쉰 문도는 팬츠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센서에 댔다.
철컥,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남자가 뒤를 돌아 선우를 보았다.
정말 이걸 원해? 후회하지 않겠어? 물어보듯이 눈을 좁히며 그녀를 보았다.
남자의 뒤로 넓은 방이 보였다. 둘만의 세상이 될 공간이었고, 오늘 하루 그녀를 삼킬 공간이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내가 나인 것을, 민우의 누나인 것을 전부 잊어도 되는 걸까.
문득 두려워지는 순간, 자신을 손을 단단히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이 보였다.
커다랗고 강인한 손이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선우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래.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선우는 기꺼이 발을 내디뎠다.
* * *
문이 닫히는 동시에 입술이 겹쳐졌다. 잡힌 한 손이 그대로 벽으로 붙여지면서 선우의 몸이 문도에게 갇혔다.
“아…….”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문도의 혀가 선우의 안을 휘저었다. 츱, 하는 소리가 나도록 빨렸다가 놓아지는가 싶은 순간 다시 질척하게 얽혔다. 절묘하게 비벼지는 느낌에 목덜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전무님…….”
선우는 남은 한 손으로 문도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가 비틀리며 다른 각도로 입술이 겹쳐졌다. 입술이 남자의 잇새 사이에서 으깨지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랫입술이 물려 있어서 다리가 녹을 것 같았지만 선우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더 많이 닿고 싶고 더 짙게 얽히고 싶었다.
그런 바람으로 선우는 조금 더 고개를 비틀어 문도의 윗입술을 물었다. 안쪽으로 빨아들이자 남자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말캉이는 입술이 달았다. 남자가 왜 가끔씩 자신의 살을 빨며 달다고 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런 맛이었구나. 선우는 아이가 엄마 젖을 빨듯이 남자의 윗입술을 잘근잘근 빨았다. 웃음소리 비슷한 신음 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게 좋았다.
“어쩌려고 이래.”
맞물린 입술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이러다 또 눈깔 돌면 어쩌려고.”
억눌린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선우의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바람은 작게 날리던 불씨를 키웠다. 속이 뜨거워지며 너울너울 불꽃들이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스쳤다. 길게 내려온 문도의 속눈썹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우는 말했다.
“전무님 눈에 저만 보였으면 좋겠어요.”
하아. 문도가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선우를 보는 눈이 비릿해졌다. 터질 것 같은 욕망으로 꽉 찬 눈동자가 좋았다. 선우는 그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남자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미치겠네.
남자가 뜨겁게 웃으며 선우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입고 있는 원피스 자락 아래로 문도의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원피스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손이 선우의 허벅지를 쥐었다.
조금 더.
선우는 허리를 틀어서 문도의 아래에 맞대었다. 더 깊이 들어와 줘. 아랫배가 끓어오른 지 오래였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서슴없이 문도의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왔다.
젖은 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선우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더. 조금만 더. 선우는 갈증이 난 사람처럼 문도의 입술을 찾았다. 나를 만져 줘요. 나를 제발.
“만져 줘요.”
선우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문도의 눈이 뒤집혔다. 툭, 하고 이성이 끊기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젖은 살을 거칠게 문지르고 힘주어 눌렀다. 고통과 쾌감이 얼룩진 소리를 내며 선우가 문도에게 매달려 왔다.
“아읏.”
문도는 파르르 신음하는 선우를 돌려세웠다. 원피스를 허리까지 걷어 단번에 속옷을 내렸다.
“약, 먹고 있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선우가 채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문도는 단번에 몸을 밀어 넣었다. 뜨겁고 좁아 눈앞이 아득해진다.
씨발, 문도는 고개를 젖히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눈이 새빨갛게 물들며 머릿속 어딘가의 퓨즈가 깜빡였다.
문도는 한 번 더 몸을 깊게 밀어 넣었다. 선우가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이 하나로 맞물리는 느낌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이물감 없는 맨살의 느낌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저, 전무님. 아, 흡, 전무, 님.”
몸을 밀어붙일 때마다 선우가 문도를 불렀다. 조각조각 끊어진 소리들이 문도의 귀를 달구었다. 속력을 높이자 선우가 허우적거렸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벽을 움켰다가 주먹을 쥐어서 파르르 떨기도 했다.
“제발. 하아.”
“뭘.”
“얼굴……. 보여 줘요. 입…… 읏, 맞추고…… 싶어.”
이선우의 말 한마디에 눈앞이 뜨거워진다. 그 와중에도 여자는 사랑스러웠다.
고개를 비틀어 그를 보려 하는 이선우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워 문도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다 나라도 팔아먹겠네.
문도는 선우의 허리를 들어 안았다. 몸을 돌려 다시 그대로 들어가면서 입술을 깊게 베어 물었다. 한 덩어리로 엉겨 붙은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달콤한 숨이 넘나들면서 하나로 섞였다.
“이제 됐어?”
문도가 물었다.
“네.”
선우가 대답했다.
“내가 좋아?”
문도가 다시 물었고,
“네. 좋아요.”
선우가 다시 대답을 했다.
그거면 됐다는 듯 문도가 입술을 겹치려 할 때, 선우가 물었다.
“전무님도……. 제가 좋아요?”
문도가 선우를 보았다. 눈으로 선우의 얼굴을 덧그리듯이 바라본 뒤에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니.”
아직 아니야. 그러니까.
“좀 더 매달려 봐요.”
무슨 마음으로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는 비틀린 웃음을 삼키며 선우의 입술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