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타닥타닥 @AW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미숙은 선우의 손을 꼭 잡았다.
“추석에 올 수 있으면 오고.”
“네. 이모. 전화드릴게요.”
눈물이 고여 있는 미숙의 눈을 보면서 선우는 애써 밝게 웃었다.
“정말 연애할 생각은 없어?”
“네. 아직 없어요.”
“진짜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 이모부랑 같이 일했던 사무관인데 볼 때마다 내가 네 생각이 났거든. 우리 선우 소개시켜 주면 참 좋겠다, 맨날 생각했어. 그이가 삼 형제 중에 둘짼데, 형 동생 전부 잘 되었고, 부모님 되는 분들도 너무 인품이 좋으시고 그래서.”
이모의 마음을 알았다. 아무도 없이 홀로 남은 조카에게 가족도 만들어 주고 싶고, 텅 비어 있을 마음도 메꿔 주고 싶었을 거였다. 그 마음을 알기에 선우는 그냥 미소만 지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그래. 생각 바뀌면 꼭 연락하고. 세종 내려와서 이모 옆에서 사는 것도 생각해 봐. 서울에서 혼자 지내기 힘들잖아. 알았지?”
“네. 이모.”
선우는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민우의 핸드폰을 찾게 되면. 진범을 밝히는 날이 오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서울을 떠나야 할 때가 오면.
그때는 세종에 내려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가 몇 시랬지?”
“11시요. 이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모부 금방 오신댔죠?”
“응. 터미널까지 데려다주라고 하려 했는데, 하필 오늘 아파트 소독을 할 게 뭐니. 걱정 말고 먼저 가. 꼭 택시 타고. 이건 차비 하고.”
미숙이 선우의 손에 봉투를 쥐여 주었다.
“이건 어제 제가 드린 거잖아요.”
선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손을 뺐다. 미숙이 다시 쥐여 주면서 그건 아니라고 우겼다.
“그건 빼고 새로 넣었어. 넣어 둬. 응? 그래야 내 맘이 편하지.”
선우는 미숙이 쥐여 주는 봉투를 마지못해 받았다. 버스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나가야 하는데,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나서는 순간까지도 미숙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이모, 건강 잘 챙기시고요. 아프지 마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얼른 가. 늦겠다.”
몇 번을 뒤돌아보다 선우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손을 흔들어 주는 미숙에게 마주 손을 흔들다가 문이 닫힌 뒤에야 팔을 내렸다.
한 블록 아래의 큰 도로로 내려가 택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출입문으로 향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서문도였다.
“네, 전무님.”
— 어디에요?
“이제 막 병원 나가고 있어요.”
선우는 회전 출입문을 나가며 대답했다. 밖으로 나오니 밝은 햇살이 쏟아지듯 내려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인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문도가 말했다.
— 그대로 쭉 내려와요. 큰 길가에 있는 커피 스테이션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선우는 걸음을 멈췄다. 설마 한 블록 아래에 있는 카페를 말하는 건가 싶어서였다.
“전무님, 혹시 지금 세종…….”
뒷말을 더 이을 필요도 없었다. 야트막한 언덕길 아래의 커피 체인점 앞에 서문도가 서 있었다.
놀란 선우가 걸음을 멈춰 서자 멀리 보이는 서문도가 인사를 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저기 길가에 서 있는 남자가 정말 서문도 전무가 맞나.
— 맞으니까 내려와요.
선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말했다. 선우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걸음을 빨리했다.
타닥타닥.
가을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인도 위로 이선우의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라지는 걸음걸이를 따라서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폭이 좁은 도로 앞에서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 차가 지나는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전무님.”
길 건너에 있는 선우가 문도를 보고 활짝 웃었다.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는 이선우의 눈동자가 햇살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멀 것 같았다.
정말이지 잔인한 장면이라고 문도는 생각했다. 이토록 찬란한 햇빛과 이토록 눈부신 너라니. 이 순간은 심장에 문신처럼 새겨져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터였다.
그늘 아래에 선 문도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햇볕 아래의 이선우가 화답을 하듯이 한 번 더 미소를 짓는다. 심장을 묶어 놓는 것 같은 미소였다.
도로 위로 차가 한 대 지나가고, 그 뒤를 이어 다시 한 대가 지나가는 동안 심장이 묶인 문도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사이 이쪽저쪽을 살핀 선우가 길을 건너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바쁘셨을 텐데.”
문도의 앞으로 다가온 선우가 말했다. 아직도 숨은 조금 거친 상태였다. 환한 선우의 미소가 문도의 마음을 뻐근하게 내리눌렀다.
“걸어왔어요.”
문도의 말에 네? 하고 이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잠도 안 오고, 시간은 남아돌고. 그래서 어젯밤부터 걸어왔어요.”
웃음기 어린 문도의 눈동자에 선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진짠데. 왜 웃지.”
“그럼 저 차는 뭐예요.”
선우가 길가에 세워져 있는 문도의 차를 보고 물었다. 문도는 태연히 대답했다.
“저거? 알아서 따라오던데?”
실없는 농담에 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밝은 가을 햇살 같은 미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감동했어요?”
대수롭지 않게 한 말에 선우가 고개를 들어 문도를 보았다. 맑고 반듯한 시선이 문도를 오래 보았다.
언제나처럼 마음에 파도를 일으키는 시선이었다. 뭐라도 움켜쥐고 버틸 것이 필요해 문도는 키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네. 그런가 봐요.”
선우가 한숨처럼 가는 미소를 지으며 작게 말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금빛으로 부서지는 가을 햇볕과 새파란 하늘.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이선우.
문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선우의 뺨을 감쌌다. 동그랗게 눈을 뜬 선우가 입술을 맞다물더니 시선을 내렸다.
“나 보고 싶었어요?”
농담처럼 가볍게 물어보며 문도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리뜬 눈동자를 붙잡고 물어보니 선우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대답을 했다.
“네. 보고 싶었어요.”
문도는 선우의 뺨을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선우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게 거짓일 수 있나. 어떻게 이게 거짓일 수 있어. 너의 떨림이 이렇게 다 느껴지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구차한 질문에 선우가 가만히 그를 보다가 대답을 했다.
“……많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래. 이거면 됐지.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이렇게 진짜 같은 얼굴로 이선우가 영원히 거짓을 말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영원히 속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도 이선우 많이 보고 싶었어.”
문도는 선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길거리인 것을 의식한 선우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상관없다는 듯 문도의 입술을 마주 물어 왔다.
햇빛은 찬란하고 하늘은 새파랬다. 뜨겁게 달군 돌들이 심장 위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 같아 문도는 질끈 눈을 감았다.
* * *
“뭐 할까요.”
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 서문도가 물었다. 차창 밖 하늘이 맑고 높았다. 선우는 언젠가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해 보고 싶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나무가 무성한 숲길을 걷고도 싶었고, 한강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해 보고 싶었다.
정신없이 빠져서 볼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같이 보고 싶었고, 장을 보아다가 나란히 서서 요리도 하고 싶었다.
멀리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는 것도 해 보고 싶었고, 좋아하는 외국 발레단의 내한 공연도 보고 싶었다.
풍경이 좋은 커피숍에 가서 얼굴을 마주 대고 사진을 찍고 싶었고, 놀이공원에 가서 무서운 놀이기구도 같이 타고 싶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런 소소한 일들을 같이하고 싶었는데, 그런 꿈을 꿀 새도 없이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거짓말처럼 민우마저 세상을 떴다.
“우선 점심을 먹고요.”
선우의 말에 운전을 하던 문도가 잠깐 선우를 보았다. 피식 가볍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 심장이 두근 뛰었다.
“점심을 먹고. 그다음엔?”
문도의 말에 선우는 흘러가는 구름에 시선을 주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지금은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 평범한 이선우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나인 것도 잊고, 당신이 당신인 것도 잊고, 서유라도, 핸드폰도, 민우도 잊고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냥…….”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같이 있고 싶어요.”
당신과 둘이서.
선우가 말을 마친 뒤, 침묵이 차 안을 채웠다.
앞을 뚫어져라 보던 서문도가 헛웃음을 웃었다. 느리게 감았다 뜨는 눈꺼풀 안의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거고. 이선우가 하고 싶은 거 말하라고.”
비스듬히 웃는 남자는 위험해 보였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홀린 것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선우는 천천히 깨달았다.
아아.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결국은 이렇게 되었구나.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 와 버리고 말았다. 바보 같은 이선우는 사랑에 빠진 척을 하다가 정말로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문득 맥없는 웃음이 나왔다. 오래전에 이런 순간을 예감했었던 것이 기억났기에.
언젠가 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었지.
진심과 거짓이 뒤섞여 무엇이 진짜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날이 오면 어쩌나 걱정했던 날이 있었어.
남자가 두려웠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빼앗으려 다가갔다가 도리어 전부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진짜를 내어 주지 않고는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스스로를 제물 삼아 한 발 한 발 다가가다 보니 어느새 팔이 삼켜지고, 다리가 삼켜지고, 이제는 심장까지 삼켜지고 있었다.
이러다 민우의 핸드폰을 찾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땐 정말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은, 오늘만큼은.
“전무님이랑 둘이서만 있고 싶어요.”
생에 단 하루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가을의 오후에, 이선우는 서문도를 욕심껏 가져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