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세종
두 시간을 달려온 버스가 터미널 하차장에 멈추어 섰다. 기사가 레버를 당기자 쉬익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선우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파란 하늘에 깃털 같은 흰 구름이 떠 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받은 기분이었다. 마음 졸이지 않고 여행을 오듯 멀리까지 온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근무가 끝나고 저녁에 가도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서문도는 그럴 필요 없다며 휴가를 주었다.
마침 서유라도 박소영과 쇼핑 스케줄이 있다며 별말 없이 선우를 보내 주었다.
덕분에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늘 먼저 먹었던 아침 식사도 다른 직원들과 같이할 수 있었고, 버스를 타기 전에 시간을 내서 백화점도 들를 수 있었다.
이모와 이모부에게 줄 선물을 사고, 사촌 오빠 도현의 첫 아이인 서윤의 내복과 조끼도 한 벌씩 골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타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새 세종이었다.
쇼핑백을 양손에 움켜쥔 선우는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도현이 알려 준 한방병원의 이름을 말하고 뒷좌석에 등을 기댔다.
서울보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느낌의 풍경이 펼쳐졌다. 시원하게 뻗은 길을 따라 달리던 택시는 대교 하나를 건너서 아파트촌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더니 금방 멈추어 섰다.
“도착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데 병원 앞에 서성이고 있는 이모부의 모습이 보였다. 선우가 내리기도 전에 알아보고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이모부, 왜 나와 계세요.”
“버스 시간 알려 주면 데리러 갔을 텐데, 왜 답을 안 했어.”
“택시가 편해서요. 터미널에서 가까워서 엄청 금방 왔어요.”
데리러 나올까 봐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세종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택시 타고 금방 가겠다고 했는데 기어이 병원 앞까지 내려오신 건 아마도 이모의 성화가 있었지 싶었다.
“짐은 이리 주고. 뭘 이렇게 샀어.”
선우의 양손에 들린 쇼핑백을 이모부인 진철이 빼앗아 들었다. 선우는 진철을 따라 걸으며 미숙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이모는 좀 어떠세요? 수술은 잘 됐고요?”
“으응. 쌩쌩해. 식단이 문제라 입원했지. 그 사람 성격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자기가 음식 해서 먹겠다고 설쳐 댈 게 뻔해서, 도현이가 입원시켰어. 돈 아깝게 무슨 입원이냐고 한소리 하긴 했는데, 그래도 아들 말은 듣더만.”
진철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엘리베이터에 타니, 한쪽 벽에 층별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암 환자들이 요양을 겸해 입원을 할 수 있는 한방병원이라 그런지 3층부터는 전부 입원실이었다.
“오빠가 큰 병원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수술할 때도 알아서 해 주는 덕분에 편하게 지냈지.”
“간병인은 안 두고 이모부가 계속 계시는 거예요?”
“퇴직하고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뭐.”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병실 앞이었다. 들어가기 전, 선우는 숨을 들이마셨다.
“여보, 선우 왔네.”
이모부가 문을 열자 병실이라기엔 원룸 같은 느낌의 방이 눈에 먼저 보였다.
“응? 벌써 왔다고?”
“네. 이모, 저 왔어요.”
서둘러 침대를 내려오는 미숙의 얼굴에서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선우는 환하게 웃으려 애를 썼다.
“참말이네. 우리 선우가 왔네. 우리 선우가 왔어. 잘 지냈어? 얼굴은 왜 이렇게 말랐어. 점심은 먹었고?”
미숙이 울 것처럼 웃으며 선우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 선우의 손을 감쌌다. 애틋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미숙에게 선우는 간신히 웃어 주며 대답을 했다.
“먹고 왔어요.”
“오느라 힘들었지? 이리 앉아. 여보, 내려가서 커피랑 빵이랑, 뭐라도 좀 사 와요. 아, 냉장고에 귤이랑 사과부터 꺼내 봐.”
“아이고, 이 사람아 천천히 해. 앉아서 밀린 얘기부터 나누고 있어. 내가 알아서 접대 잘할 테니까.”
진철이 웃으며 미숙을 말렸다. 선우는 미숙을 따라 침대 옆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았다.
마주 앉고 보니 미숙의 목 아래쪽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선우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왜 말씀 안 해 주셨어요.”
“아니야.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팠어. 눈 감았다 뜨니까 다 끝났더라구. 이모 건강하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너 이럴까 봐 연락하지 말라 그랬는데.”
미숙이 일부러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럴 때의 이모는 엄마와 꼭 닮아 있었다.
“너는 잘 지냈어? 학원 일이 많이 바쁘다며. 안 그래도 마른 애가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반찬은 있어? 이모가 좀 보내 줄까?”
“학원 일이 바빠서 그렇지 잘 지내고 있어요. 반찬도 많구요.”
선우는 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쓱쓱 밀어내면서 미소를 지었다. 민우가 죽은 뒤로 미숙은 선우마저 어떻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걱정을 했다.
이렇게 두었다가는 하염없이 걱정하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몰랐다. 선우는 한쪽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을 집어 미숙에게 내밀었다.
“아, 맞다. 이거. 이건 이모부 홍삼즙이고, 이거는 이모 스카프. 이쪽 거는 서윤이 내복이랑 조끼인데, 사이즈 넉넉하게 샀어요. 세종에 있는 매장에서 교환도 된대요.”
“얘 좀 봐. 왜 이런 걸 사 오고 그래.”
“서윤이 많이 컸죠? 지금 몇 개월이에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조카인 서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핸드폰 동영상 속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웃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선우의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잘 도착했어요?]
서문도였다. 선우는 답 메시지를 쓰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네. 잘 도착했어요. 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민우가 선물해 주었던 토끼 이모티콘을 하나 붙였다. 감사하다며 꾸벅꾸벅 인사를 하는 귀여운 토끼의 모습이 화면에 떴다.
이모티콘을 본 서문도는 웃고 있을까.
피식 웃는 얼굴이 생각나 선우는 고개를 들어 병실에 난 커다란 창문을 보았다. 깃털 같은 구름이 마음을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 * *
“이모부, 오늘은 제가 있을게요. 이모, 그래도 괜찮죠?”
밤이 늦은 시간, 선우는 사과를 깎고 있는 이모부 진철에게 말했다.
이모 옆에서 하루 자고 싶기도 했고, 간병을 하느라 힘들었을 이모부도 쉬게 해 드리고 싶었다.
“나야 좋지. 매일 보는 지겨운 얼굴 오늘은 안 봐도 되겠네.”
미숙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지겹다니. 몇 시간만 떨어져도 보고 싶다고 해 놓고?”
“그거야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 그걸 믿었대? 사람 순진하긴.”
선우는 웃는 입매가 엄마와 꼭 닮은 이모를 보며 같이 웃었다.
“오랜만에 조카 왔다고 이 사람 얼굴이 아주 활짝 폈네, 폈어. 정말 나 없어도 괜찮겠어?”
“괜찮지, 그럼. 추석에도 못 내려온다는데 이렇게라도 같이 시간 보내게 들어가요. 방해 좀 그만하구.”
“그럼 이것만 정리하고 갈게. 빨래랑 반찬통 챙겨가야겠네.”
진철이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사과를 깎은 과도와 쟁반을 드는 진철에게 선우가 말했다.
“제가 치울게요.”
쟁반과 과도를 치우는데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선우야, 전화 오네.”
미숙의 말에 선우는 손을 닦고 테이블 한쪽에 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이모,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선우는 미숙에게 말한 뒤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옥상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전화를 받았다.
“네, 전무님.”
— 저녁은 먹었어요?
수화기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우는 숨을 삼켰다. 분명 오늘 새벽까지 같이 있었는데, 장소가 달라져서 그런지 서문도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네. 먹었어요.”
옥상 문을 열면서 선우는 대답했다.
— 뭐 먹었는데요.
“이모가 저요오드 식단으로 드셔야 해서 도시락 시켜서 병실에서 같이 먹었어요.”
— 맛있었어요?
“네. 맛있었어요.”
선우는 긴 벤치에 앉으며 대답했다.
— 자고 올 거라면서요.
저녁을 먹고 나서 메시지를 보냈었다. 하루 자고서 내일 올라가겠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 두긴 했어도 한 번 더 말을 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였다.
— 지금이라도 올라올 생각은 없고?
“오늘은 이모랑 같이 자려고요.”
선우는 멀리 시선을 주며 말했다. 사방으로 퍼져 있는 아파트 불빛들이 보였고, 불어오는 밤바람에서는 이른 가을 냄새가 났다.
— 보고 싶은데.
서늘한 밤바람을 타고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선우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마음이 스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나만 보고 싶은가 보네.
남자의 목소리가 몸을 울렸다. 선우는 가만히 숨을 내쉰 뒤에 천천히 대답을 했다.
“저도 보고 싶어요.”
낮은 웃음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남자의 마음 같은 거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죄책감은 깊어만 갔다.
이래도 되는 걸까.
가짜 이선우에게 진심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도 될까. 당신의 마음이 깊어지는 걸 알면서 이쪽으로 좀 더 깊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해도 되는 걸까.
— 내가 갈까요?
문도의 말에 선우는 아프게 웃었다. 오세요, 하면 이 남자는 정말로 올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하든 전부 들어줄 것만 같았다.
네. 와 주세요. 보고 싶어요.
선우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켰다. 이제는 자신도 정상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지금처럼 남자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들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었다.
조금 더 꼭 안아 달라고 하고 싶었고, 옆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나를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고,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아니요. 내일 제가 갈게요.”
밝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선우는 이게 정말 거짓일까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좋아하는 척을 하고 있는 게 맞을까.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는 것이 맞나. 연기를 빌어 욕심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
— 언제쯤 출발해요?
“이모부 아침에 오시면 점심 전에 출발할 거 같아요.”
— 버스 예매하면 연락해요. 터미널로 데리러 갈 테니까.
진짜 이선우는 이럴 때 그러지 말라고 할 거였다. 번거롭게 그러지 마시라고.
가짜 이선우는, 서문도에게 뻔뻔히 요구를 해도 괜찮은 그 여자는 이런 순간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네. 그럴게요.”
— 그래요. 들어가요.
서문도가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자신이 가짜 이선우인지 진짜 이선우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우도 천천히 핸드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