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금방 다녀올게요
호텔 입구에 도착한 선우는 비상 깜빡이를 켜고 차를 세웠다.
“다녀올게.”
서유라가 뒷좌석 문을 열며 말했다.
“나오실 때 전화 주세요.”
운전석에 앉은 선우는 문을 열고 나가는 유라에게 말한 뒤 비상 깜빡이를 껐다. 핸들을 돌려서 아래로 내려와 호텔 주차동에 차를 댔다.
서유라는 매일 오후 두 시간씩 호텔 피트니스에서 개인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녀가 외출도, 약물도 없이 바디 프로필을 찍는 것에 열중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인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는 최지상 때문이었다.
바람소리는 크게 히트를 치지 못했지만, 정원 선배역의 최지상은 나날이 주가를 올려 각종 예능과 광고에서 활약을 하는 중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난리가 나는 서유라와 하루 몇 번씩 통화는 이어 가고 있지만, 빡빡해진 스케줄 때문에 호텔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날 수는 없는 듯했다.
질투와 불안에 휩싸인 서유라는 자신의 몸을 가꾸는 데 온 열정을 쏟았다. 선우가 부추긴 것도 없지 않았다.
담배를 줄이니 피부가 좋아졌다고, 운동을 열심히 하니 라인이 탄탄하게 잡혀 간다고 칭찬을 해 주며 서유라를 독려하는 중이었다.
선우는 라디오를 작게 틀어 놓고 시트를 살짝 뒤로 젖혔다. 출발할 때 가지고 나온 텀블러를 열어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운동과 식단 조절로 서유라는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되었고, 선우는 밤마다 2층으로 올라가 서문도와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 생각에 선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문도 전무와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 일은, 달콤한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망망대해에서 발견한 작은 방. 문을 닫고 들어가 누우면 바깥의 비바람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긴긴 시간도 잠시 잊게 되는 곳.
‘더 자.’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올 때. 아득한 망망대해를 다시 헤매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할 때. 서문도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선우를 당겨 안았다.
그 품은…….
선우는 버겁게 숨을 쉬었다. 깊이 숨을 마셔도 가슴이 뻐근했다.
단단한 팔이 선우를 안을 때면, 다정히 등을 쓰다듬으며 더 자라고 말을 할 때면.
얼어붙은 마음에 따뜻한 불이 지펴지는 기분이었다. 비로소 쉴 곳을 찾은 기분이었다.
익숙해지면 안 돼. 그 온기에, 다정함에 익숙해져선 안 돼.
별채를 나간 뒤에는 다시 긴 어둠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과 불이 꺼진 방이 선우를 기다릴 거였다.
그러니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되뇌며 선우는 매일 눈을 감았다. 중간에 깨어났을 때는 일어나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메인 드레스룸을 뒤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남자의 옆으로 돌아가 다시 몸을 눕힐 때면 기운 빠진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싶어서.
사치스런 생각이지.
선우는 맞은편에 주차된 차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유라도 잘 지내고 있다. 쫓겨날 염려도 덜었고, 서문도와는 다시 없을 화양연화를 누리고 있었다. 염원하던 2층에서 매일 밤을 보내잖아. 원하던 대로 다 되었는데 더 바랄 게 뭐가 있다고.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조수석에 둔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 있었다.
“오빠.”
— 어, 그래. 선우야. 잘 지냈어?
이종사촌인 도현이었다.
“응. 잘 지내. 오빠도 잘 지내지?”
— 어. 나야 뭐, 잘 지내지.
“이모랑 이모부도 잘 지내시고?”
— 음. 하하. 그렇다고 말을 못 하겠다. 실은 선우야, 엄마가 얼마 전에 수술을 하셨어.
심장이 툭 떨어지는 말이었다. 이모는 선우에게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었다.
“많이 안 좋으셔? 무슨, 무슨 수술 하셨는데?”
— 아니야. 괜찮으셔. 갑상선 암이었는데, 걱정할 크기는 아니었고 수술도 무사히 잘하셨고. 회복도 무사히 잘하시는 중이신데.
“왜 말을 안 했어. 나한테도 연락을 해 주지.”
다 지난 뒤에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미안했다. 한 번쯤 안부 전화를 드렸어야 했는데, 후회도 되었다.
— 엄마 성격 알잖아. 너 알면 걱정만 한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도 다 몰라. 내가 잘 챙기고 있기도 하고. 아버지가 간호도 열심히 하셔.
도현은 대학병원에서 수련 중인 의사였다.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선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엄마가 네가 보고 싶은가 봐.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할까 싶다가도 괜히 걱정만 시킬 것 같아서 못 하겠다고 하는데, 자식 된 마음에 그게 맘이 쓰이더라고.
“내가 갈게. 이모 지금 어디 계셔? 오빠 있는 병원에 계셔?”
— 아니야. 그럴 것까진 없고 그냥 안부 전화 한번 드려.
“아니야. 내가 갈게. 나도 이모 보고 싶어서 그래. 평일은 힘들어도 주말에는 시간 되거든.”
오늘이 금요일이니 내일 근무만 끝나면 세종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전화를 끊은 선우는 도현에게 이모인 미숙이 입원해 있는 병원의 주소를 메시지로 받았다.
선우는 핸드폰을 들어 이모의 번호를 찾았다. 이모, 두 글자가 떠 있는 액정을 보며 아, 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신호음 끝에 미숙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선우는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모, 선우예요. 잘 지내셨죠?”
— 이게 누구야, 우리 선우 잘 지냈어?
수화기 너머에서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시큰거리는 코끝을 괜히 문지르며 통화를 이어 갔다.
* * *
“그래서 세종에 다녀오려고요.”
문도는 자신의 타이 매듭을 내리며 말하는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선우가 타이를 풀어서 진열대 위에 내려놓았다.
“단추도 풀어 줘야죠.”
또 내가? 묻는 것 같은 선우의 눈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재킷을 벗겨 주고 타이도 풀어 준 선우가 문도의 셔츠에 손을 댔다.
톡, 톡 단추 따는 소리를 들으며 문도는 선우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끝이 금방 붉어지는 하얀 귀는 귓바퀴가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거렸다.
“이모님이 세종에 계세요?”
문도의 질문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부가 공무원이셨어요. 지금은 퇴직하셨고요.”
단추 세 개를 따고서 선우가 머뭇거렸다. 문도는 선우의 손을 잡아 그다음 단추로 이끌면서 물었다.
“수술은 잘 되셨고?”
“네. 수술은 잘 되셨고 지금은 한방병원에 요양차 입원하셨대요.”
마지막 단추를 푸는 선우에게로 문도는 고개를 숙였다. 비스듬한 각도에서 입술을 물고서 제 안으로 빨아당겼다.
작게 터지는 숨소리에 등줄기가 저릿거렸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선우의 손을 이끌어 제 몸에 두르게 했다. 문도의 등에 선우의 손이 가만히 닿았다.
“만져 줘요.”
키스 중에 말했더니 선우의 눈꺼풀이 깜빡거렸다. 문도는 선우의 손을 등에서 배로 이끌었다. 아래로 이끌어 주니 선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문도는 다시 선우의 입술을 물면서 말했다. 말캉거리는 입술에서 단맛이 났다.
어설프게 벨트 위에 걸쳐진 선우의 손이 웃기고 귀여워서 문도는 한숨을 쉬며 선우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뿌리째로 빨면서 선우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더운 숨을 터트리는 선우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선우가 문도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내일 가겠다고요?”
진열장 위에 선우를 앉힌 뒤 문도가 물었다. 눈높이가 같아진 선우가 대답을 했다.
“네.”
“언제 오는데?”
“하루 자고 일요일에 오려고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문도는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요즘 매일이 이런 식이었다. 퇴근하며 이선우를 부르고, 건너온 이선우를 옷도 벗지 않고 물고 빠는 일상이 이어진다.
같이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시며, 목욕을 하며,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이선우를 만지작거렸다. 입술에, 가슴에, 허벅지와 발등에 수시로 입을 맞추었다.
“나는?”
문도는 입술을 떼면서 물었다. 선우의 눈동자가 문도의 눈동자와 만났다.
짓궂게 물어보는 문도의 눈을 물기 머금은 선우의 눈동자가 보고 있다. 단지 그것뿐인데 목덜미가 찡하고 울렸다.
“나는 어쩌고 세종에 가.”
문도는 선우가 입은 원피스의 단추를 따면서 말했다. 셔츠형 원피스가 한 뼘씩 벌어졌다.
“가지 말까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선우를 보며 문도는 피식 웃었다.
“응. 가지 마. 나랑 있어.”
흰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 일요일 아침에 갔다가 오후에 올게요.”
“그것도 싫다고 하면.”
이선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문도는 선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날이 왔을 때, 가지 말라고 한다면 너는 안 갈까. 전부 놓고 나를 선택해 달라고 하면.
“농담이에요. 다녀와. 토요일도 하루 휴가 줄 테니까 편히 다녀와요.”
문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제야 선우가 불안한 표정을 지웠다.
문도는 벌어진 선우의 옷깃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나는 살냄새가 좋아서 코를 비비다가 브래지어 위로 솟은 정점을 이로 질근 물었다.
흣.
선우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만큼 물고 빨았으면 질릴 법도 한데, 갈증은 날마다 더해지기만 했다.
몇 번을 삼키고 몇 번을 마셔도 부족해서 어떤 날엔 이선우를 통째로 씹어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전부 묻어 버릴까.
문도는 브래지어를 젖혀 톡 튀어나온 살점을 빨며 생각했다. 아,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가 귀를 적셨다.
서유라의, 최지상의, 이민우와 김영재의 휴대폰을 부숴 버리면 어떨까. 무엇도 찾을 수 없게 산산조각을 낸다면.
영원히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한다면. 그렇게 주저앉히면,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전무님.”
선우가 문도를 불렀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래요.”
문도는 다시 선우의 가슴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달콤한 살냄새를 전부 삼켜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