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87화 (87/168)

87. 옐로우 스타

주차장의 문이 열렸다. 차를 몰아 안으로 들어가는 문도의 눈에 익숙한 차들이 보였다.

들어오는 문도의 차를 본 서미경 부부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고모도 잘 지내셨어요?”

문도는 뒤에 선 구장현 교수에게까지 묵례로 인사를 했다.

“갑자기 무슨 저녁을 먹자고. 우리가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당일 통보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버지 왜 또 저러시는지 아니?”

오전에 갑작스런 공지가 있었다. 서 회장의 비서실장인 강 실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서 회장의 청으로 본가에서 금일 저녁 가족 모임이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아니요. 저도 모르죠.”

문도는 서미경 부부에게 답하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갑작스런 가족 모임의 이유로 짐작되는 바가 있지만 그걸 고모인 서미경에게 알리면 눈이 뒤집힐 터였다.

“건강 좀 나아졌다고 그 버릇 또 시작이신 건지.”

서미경이 한숨을 쉬었다. 건강이 악화되기 전에도 서 회장은 가끔씩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족들을 호출하곤 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서. 다 같이 밥 먹은 지가 오래되어서. 기분이 좋아서.

재깍재깍 도착하는 놈이 어떤 놈인지 느긋하게 살폈다가 살가운 웃음을 한 번 더 주고, 뭐 하나 던져 줄 것처럼 은근한 뉘앙스를 풍기곤 했었다.

“큰오빠는 벌써 왔나 보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봐.”

서미경이 비아냥거렸다. 서 회장의 게릴라성 가족 모임에 가장 열성적으로 임하는 사람은 당연히 둘째 서중호였다.

늘 똥 씹은 얼굴을 하고도 빠짐없이 참여하는 건 서용호였고, 서미경은 다소 시니컬한 태도로 참석을 했다.

그래 봤자 결론은 삼 남매 모두가 제시간에 반듯하게 앉아 있다는 것.

“아버지, 저희 왔어요.”

다이닝룸으로 들어가며 서미경이 서 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박소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인사를 한 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우현희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 제자리에 착석을 하자 서 회장이 흐뭇한 얼굴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박소영이 따라 준 따뜻한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서명구 회장이 입을 열었다.

“에……. 오랜만에 모두, 모오힌 것을 보니 내가, 참 기분이, 쏘 굿. 베리 굿. 아주 좋아. 이렇게 다 같이 모오여서 바, 밥을 한 끼 같이 먹는 거시…….”

숨이 차는지 서 회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혀로 얇은 입술을 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행, 행복이지. 인생은 도, 돈. 머니가 아니라 햅삐. 햅삐니스. 안 그러냐, 무, 문도야.”

회장의 시선이 손자들 중에 유일하게 참석한 문도에게 닿았다. 문도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럼요. 행복이 제일이죠.”

문도의 대답에 흡족하다는 듯이 서명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은 서용호에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니 저도 참으로 해피합니다.”

서중호가 맞장구를 칠 때였다. 바깥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었던 강 실장이 잠시 안으로 들어와 서 회장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이고 다시 나갔다.

“그, 그런 의미에서……. 오늘. 써프, 써프라이즈 이벤트가 있어.”

서 회장이 박소영의 손을 꼭 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박소영에게 쏠렸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의 박소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 강 실장.”

회장의 부름에 강 실장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오픈, 잇.”

서 회장이 박소영에게 말했다. 서미경과 서용호의 표정이 굳었다. 박소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빨간색 박스를 열었다.

“이게 뭐예요, 회장님?”

열린 박스 안에는 샛노란색 페라리 모형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 장난감으로 나오는 모형 자동차를 보며 박소영이 서 회장에게 물었다.

“소영이 차. 드, 들어 봐.”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소영이 노란색 페라리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 특유의 문장이 들어간 자동차 키가 들어 있었다.

“회장님, 나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이게 뭐예요? 나 이 차 사 줄 거라고?”

박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으응. 주, 주차장에 모두, 내려가서. 우리 소, 소영이 차 구경해.”

“어머, 나 어떡해.”

박소영이 두 손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 울지 말고. 소영이, 차 보러 가야지.”

서용호와 서미경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는 줄도 모르고 서 회장이 다정하게 박소영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이구 우리 회장님, 이럴 때 보면 참 사랑꾼이셔. 작은어머니, 고만 우시고 내려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시네. 유라야, 어머니 모셔라.”

흑흑 우는 박소영을 서유라가 일으켜 세웠다. 줄줄이 다이닝룸을 나서서 지하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 회장의 걸음이 느려 모두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걸었다. 주차장에 커버를 씌워 놓은 차 앞에는 본가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문도의 시선이 그중의 한 명에게 꽂혔다.

직원들은 느리게 움직이는 회장과 박소영에게 꽃잎을 뿌리며 축하를 했고, 박소영은 흐느껴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 걷어.”

회장의 말에 명 실장이 커버를 걷었다. 샛노란색 페라리가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서 회장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치는 것을 시작으로 서중호와 직원들도 축하의 박수를 쳤다.

“예, 옐로 스타. 어때, 우리 소영이 차 이름, 마, 마음에 들어?”

“어흐흐흐흑. 나 어떡해. 어흐흑.”

첩 생활 30여 년 만에 페라리 한 대를 가지게 된 박소영이 통곡을 했다. 회장이 반들반들 빛나는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일그러진 표정의 서용호, 통 큰 회장님 칭찬에 여념이 없는 서중호, 기막힌 표정의 서미경과 나머지 들러리들.

그 들러리 중의 하나로 서서 문도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한 편의 통속극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이선우는 눈이 아리게 예뻤다.

꽃잎이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있던 선우가 눈을 들 때마다 한 번씩 시선이 스쳤다.

희미하게 붉어지는 선우의 뺨을 보면서, 문도는 들러리 노릇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 * *

한 편의 희극 같았던 저녁 식사가 끝났다.

별채로 돌아온 문도는 서재로 향했다. 산업통상부 주관의 배터리팩 리스 업무 협약식을 앞두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였다.

문도는 늦게까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밖은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뻐근한 목을 뒤로 젖혔다가 바로 하고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11시 38분.

퇴근을 한 이선우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이만큼 시간이 흐를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선우가 내내 깜빡였지만 전화는 하지 않았다.

자료를 정리하니 12시. 담배 한 대를 태운 뒤 샤워를 하니 12시 반.

문도는 거실의 소파에 앉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선우가 전화를 받았다.

— 네, 전무님.

“일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요. 자고 있었어요?”

문도의 말에 선우가 답했다.

— 아니에요.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왜, 잠이 안 와서?”

— 전무님 전화 기다리느라고요.

문도는 소리 내서 웃었다. 아직도 하루 한 번 보고하는 것이 제 일이라 믿고 있는 이선우는 문도가 왜 웃는지 모를 터였다.

이선우는 모르겠지만 문도는 그녀가 피곤이 어린 목소리로 한숨 쉬듯 말을 할 때가 좋았다.

꾹 참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볼 때가 좋았고, 반달이 되도록 눈을 접으면서 웃을 때가 좋았다.

“먼저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 일하시는 것 같아서요.

“전화 늦어지면 먼저 자겠다고 메시지 남겨요.”

— 그럼 서유라 씨 일과 보고는…….

“관심 없어진 지 오래인 거 알잖아.”

문도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선우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건너와요. 얼굴이나 보게.”

선우가 네, 하고 대답을 하더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문도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있었다.

— 같이……. 자고 싶어요.

이선우가 말했다.

— 오늘은 전무님이랑 같이 자고 싶어요.

이선우는 말 한마디로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는 말에도 물색없이 단단해진다.

실소를 머금은 문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재워 줄게요. 건너와요.”

* * *

건너온 이선우와 욕조에서 몸을 섞었다.

거품을 풀어 놓은 욕조에 선우를 앉히고 문도가 그 뒤에 앉았다.

선우의 손에 단단해진 자신의 몸을 쥐여 주고 봉긋한 가슴에 거품을 묻혔다. 거품을 묻히는 장난은 문도가 선우의 몸을 들어 자신의 위에 앉히면서 끝이 났다.

선우의 가슴을 가득 쥔 문도가 한 번씩 느리게 움직였고, 그때마다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처럼 밀려오던 남자는 선우의 어깨 곳곳을 물었고, 마지막에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선우를 세게 안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던 이선우는 문도의 품에서 금세 잠이 들었다. 깜빡, 깜빡, 느리게 눈꺼풀을 열고 닫더니 어느 순간 고요히 눈을 감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선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감은 문도를 오래 올려다보더니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문도는 마스터룸을 나가는 선우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살짝 열어 놓은 문틈 사이로 작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서랍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조용히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소리.

문도는 어둠 속에서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박소영과 샛노란 페라리를 생각했다.

차라리 이선우도 페라리 한 대에 펑펑 우는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동생의 휴대폰을 찾으려 제 모든 것을 던지는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가려진 진실 한 조각, 그걸 구하려고 끈질기게 파고드는 미련한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너를 놓는 게 조금은 쉬웠을까.

한참 그렇게 자리를 비웠던 여자는 다시 소리 없이 문도의 침대로 돌아왔다. 나비처럼 가벼운 몸으로 문도의 옆자리에 가만히 눕는다.

먼바다의 불빛처럼 깜빡이고 있을 여자의 눈꺼풀이 보이는 듯했다. 문도는 잠결인 양 팔을 뻗어 선우를 당겨 안았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문도는 작게 숨을 쉬는 이선우를 안고서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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