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86화 (86/168)

86. 능소화

잠결에 몸을 돌리던 선우는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눈을 떴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자요.’

꿈인가 싶은 순간들이 기억났다. 몇 번인가 깨어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당겨 안으며 남자가 속삭였던 말.

그 말을 듣고 다시 눈을 감으면 잘했다는 듯 등을 토닥이던 손길. 체온이 주는 온기에 몸을 기대고 다시 잠으로 끌려 들어갔던 순간들.

갔구나.

선우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며 생각했다.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들어 눈을 다시 감으려 할 때였다.

“깼어요?”

거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돌리니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있는 서문도가 보였다.

반쯤 걷은 커튼 사이로 동이 터 오는 새벽하늘이 보였다. 어슴푸레한 여명의 빛 속에서 서문도는 소매의 단추를 잠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 문도가 미소 지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왜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침대에 걸터앉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피곤했을 텐데 더 자요. 일어나면 라운지에서 아침도 먹고, 좀 더 쉬었다가 천천히 와요.”

남자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들었다. 네, 그럴게요. 그런 대답만 하면 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러지. 선우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걸까. 여긴 여전히 꿈속인가.

“왜, 가지 말까?”

대답이 없는 선우를 보며 서문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인 걸 안다. 나란히 돌아갈 수는 없으니 먼저 들어가려는 남자를 붙잡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실 거예요?”

잠긴 목소리가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선우는 말을 뱉고서 알았다. 남겨지기 싫었다는 것을.

낯선 방에 혼자 남겨져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현실을 마주 봐야 하는 게 싫었다. 호텔에 홀로 남겨지는 건 너무 쓸쓸할 것 같아서.

“응. 안 가.”

문도는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말했다. 웃으며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목 언저리가 뜨끈했다.

원래는 카드 한 장만 남겨 놓고 나올 생각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여자가 비참할 수 있도록. 남은 시간 편히 쉬고, 사고 싶은 것을 사라는 간단한 메모를 남겨 둘 생각이었다.

여자가 눈을 떴으니 바로 카드를 내밀어 어제의 시간을 단숨에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면 될 텐데,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여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먼저 들어가세요.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농담이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문도의 눈을 피했다. 여기서 해야 할 말은 하나였다. 그래요, 그럼.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와요.

이번에도 입은 엉뚱한 소리를 뱉었다. 제멋대로 혀가 움직여 그가 아닌 누군가가 말을 뱉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문도는 이선우의 턱을 잡았다. 제게로 시선을 맞추어 놓고 물었다.

“갈까, 가지 말까.”

어슴푸레한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서로의 눈을 보았다. 여자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문도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지 말아요.”

선우는 말했다. 조금만 더 머물러 줘. 나를 혼자 남겨 두지 말아요. 아직은 이 꿈에서 깨어나게 하지 마.

문도의 눈빛이 짙어졌다. 선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술을 포갰다. 가볍게 물었다가 고개를 비틀어 조금 더 깊게 물면서 말했다.

“응. 안 갈게.”

선우가 문도의 목에 팔을 감았다. 키스가 깊어지며 두 사람의 몸이 침대로 기울었다. 선우는 눈을 감았다. 아직은 조금 더 꿈을 꿀 시간이었다.

* * *

체크아웃은 정오를 넘겨서 했다. 6시도 안 된 시간에 룸을 나오려고 옷을 차려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시간이었다.

“조금 더 먹어요.”

체크아웃을 하고 라운지로 선우를 이끈 사람도 문도였다. 가벼운 브런치용으로 차려진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서 테이블에 놓았다.

“자느라고 아침도 못 먹었는데.”

그 말에 선우가 민망한 미소를 보였다. 말 그대로 새벽에 몸을 섞고 나서 이선우는 다시 잠이 들었다. 깨워서 아침을 먹일까 하다가 너무 혼곤히 잠을 자서 그대로 두었다.

“전무님도 드세요.”

“먹고 있어요.”

문도는 밤에 베이컨을 말아 구운 것을 먹으며 선우를 보았다.

이선우는 잠이 들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곤 했다. 깨어나 눈을 흐리게 깜빡이는 걸 안아서 다독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잠이 들었다.

뒤척이며 몸을 붙여 오지도, 품을 찾아서 파고들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확인하고는 안심이 된다는 듯이 눈을 천천히 감고서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이선우 씨, 잘 때 엄청 안기던데. 알고 있어요?”

따뜻하게 데워 온 초코 크루아상을 선우의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더니,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제가요?”

문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선우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몰랐어요. 불편하셨겠어요.”

“조금.”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는 말 대신, 조금 불편했다고 하니 이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문도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서 앞에 놓인 청포도만 입에 넣는다.

“원래 잠을 그렇게 끊어서 자요?”

문도도 잠이 옅은 편이었지만 이선우는 더해 보였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어김없이 다시 눈을 떴다. 여러 번 다독여 다시 재워야 했을 정도였다.

“불면증이 조금 있어서요.”

문도는 처음 이선우에게 시선을 뺏겼던 순간을 생각했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 이선우는 홀로 테라스에 서서 허공을 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았던 이선우를 머리에서 지우고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카모마일을 그렇게 들고 왔었나.”

선우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잠이 잘 온다고 하더라고요.”

“어제는 카모마일 없이도 잘 자던데요.”

민망하다는 듯 선우가 입술을 맞다물었다. 앞에 있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무님이 옆에 있어 주셔서 그랬나 봐요.”

노림수가 있는 말인 것을 안다. 아는데도 뜨끈한 덩어리가 목을 훑으며 내려갔다. 문도는 웃으며 말했다.

“잠 안 오면 건너와요. 재워 줄 테니까.”

선우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아는데도 뜨끈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단전 아래로 고였다.

“대답은 잘해.”

웃으며 말한 문도는 청포도를 입에 넣었다. 툭 터지는 달콤한 즙이 이선우 같았다.

* * *

문도는 회사에 들러 간단한 업무 몇 가지를 처리했다. 점심에 택시를 태워 들여보낸 이선우와 시간차를 두기 위해서였다.

오후 2시를 넘겨 막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도는 주차한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 집에 들어왔니?

들켰네. 문도는 고개를 젖히며 한숨 쉬듯 웃었다.

“네. 주차장이에요.”

— 올라와서 얘기 좀 하자.

“네.”

어디서 들켰나.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 못 차리고 곳곳에 흘리고 다녔으니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본관으로 올라간 문도는 2층의 우현희의 서재로 직행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장 여사가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었다. 자신을 쓱 보는 장 여사의 눈빛에 전과 다른 무엇이 섞여 있었다.

“여사님이시네.”

문도는 문에 비스듬히 기대며 말했다. 장 여사가 움찔하며 우현희를 보았다.

“들킨 놈이 잘못이죠. 탓하는 거 아니니까 내려가세요.”

매끄러운 문도의 목소리에 우현희는 한숨을 쉬었다. 오랜 시간 돌봐 왔던 장 여사에게도 싸늘해지는 걸 보니 가벼운 마음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장 여사가 내려가고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우현희는 문도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였니?”

“몇 달 됐어요.”

문도는 솔직하게 말했다. 썩은 고름 주머니를 언제까지 차고앉을 수는 없으니, 언젠가는 서유라의 일을 어머니에게도 알려야 했다. 다만 아직 때가 아닐 뿐이다.

“그래서 막내 아가씨 붙잡고 있는 거야?”

“네.”

“아가씨 내보내고 이선우 씨는 밖에서 만나. 직원들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문도는 그 말에 커피잔을 쥐었다. 갈색의 크레마를 바라보다가 우현희에게 담담히 말했다.

“길게 갈 사이는 아니에요. 곧 정리할 겁니다.”

그 말에 우현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길게 만날 사이도 아닌 여자를 굳이 한 집에 두고 건드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문제가 조금 복잡해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우현희는 그게 언제냐는 질문을 삼켰다. 그녀가 아는 아들이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진 않을 테니.

“어머니하고 여사님 아는 거, 이선우는 모르게 하세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문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현희가 뭐라 말을 더하려다 입을 다물고 알았다고 말을 했다.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한 뒤 문도는 본관을 나왔다. 오후의 농도 짙은 햇살이 눈을 파고들었다.

‘햇볕이 달라진 것 같아요.’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와 문도는 피식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내 물었다. 정원을 걸어 나와 능소화가 늘어지게 피어 있는 담벼락 아래에서 불을 붙였다.

정리를 해야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선우를 놓아야 했다. 그것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놓아야 하는 걸 알면서 놓지 못하고 있을 뿐.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한 번 더 깊이 빨았다. 연기를 뱉으며 문도는 늘어진 능소화를 움켜쥐었다. 타오르는 노을빛의 꽃을 움켜쥐고 피식 웃었다.

미련덩어리.

뜨거웠던 여름 내내 피었으면 이제 그만 저물 때도 되었는데, 볕이 달라진 가을의 초입까지 징그럽도록 피어서.

문도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줄기가 뜯기며 꽃이 뭉개어졌다. 손안의 꽃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가락을 비벼 짓이겼다. 연한 꽃잎이 으깨지며 손가락을 더럽혔다.

언젠가 이렇게 제 손으로 비틀어 목을 따야 하는 것을 알면서.

미련하기도 하지.

문도는 으깨진 능소화를 바닥에 툭 버렸다. 잔디 사이로 떨어진 초라한 꽃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깊게 빨았다.

눈을 들었더니 수십, 수백의 능소화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징그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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