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백일몽(2)
짜장면과 탕수육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맛있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꼭 이렇게 먹어야 할까.
칸막이로 막혀 있는 작은 룸의 동그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선우는 문도가 집어 주는 탕수육을 난처한 얼굴로 받아먹었다.
“저……. 이런 건 좀.”
“청연 탕수육이 왜 맛있는 줄 알아요?”
문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한 점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아니요, 몰라요.”
호텔이니까 맛있겠지. 비싸니까 맛있겠지. 그런 대답들은 넣어 두고서 선우는 그냥 웃었다.
“항정살로 만들어서 부드럽대요.”
“아……. 네.”
“그래서 몇 점 먹으면 느끼해져.”
“아……. 네.”
가능한 똑같은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서문도가 피식 웃으면서 선우를 보았다.
“또 뭐 할래요.”
식사도 거의 끝물이었다. 여기서 더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여긴 호텔이고, 생각나는 건 남산이 보이는 룸밖에 없었다.
“술 마셔도 되고. 수영장도 있고. 커피도 괜찮겠네.”
말을 하는 서문도의 표정이 담담했다. 이 남자는 이런 식으로 데이트를 했겠구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나는 여자가 무엇을 해 달라고 하든 담담한 표정으로 그래, 그러자고. 너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같이해 주겠다고.
늘 이렇게 연애를 했을까.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왜 마음이 욱신 아팠는지 모를 일이었다.
“산책 괜찮으세요? 배불러서 산책하고 싶어요.”
“산책해요, 그럼.”
문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커피를 한 잔씩을 테이크아웃으로 샀다.
따뜻한 커피를 든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선우를 커다란 정원이 있는 산책로로 이끌었다.
“자주 오셨나 봐요?”
물어볼 생각이 없었던 말이 왜 튀어나왔는지. 익숙해 보여서 그런 거야. 그냥 그런 거야.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맞다물었다.
“가끔. 왜, 신경 쓰여요?”
서문도가 웃으며 물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좀 써요.”
질투도 하고. 서문도가 스치듯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선우도 애꿎은 커피만 넘겼다.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인지 뜨겁고 쓴 커피가 개운하게 느껴졌다.
“오늘 뭐 했어요?”
낮에는 더웠는데, 저녁에는 찬 기운이 묻은 바람이 불었다.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다가오는 계절의 이음새에서 서문도가 묻는다.
“서유라 씨 바디 프로필 찍으셨어요. 정확하게는 비교 전 사진이요. 사진 찍고 나서 운동한 다음에 다시 찍으시겠다고요.”
“서유라 말고 이선우.”
선우는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이선우 뭐 했냐고.”
픽 웃으면서 말하는 서문도를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얼마 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 저는…….”
하루의 일과는 서유라의 일과와 비슷했다. 여기서 이렇게 데이트를 하는 것 외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서유라 씨 사진 찍는 거 도왔구요. 사진 찍고 나서 늦은 점심으로 즉석 떡볶이 드시고 싶다는 거 안 된다고 말렸고요.”
서문도가 웃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웃음에 발바닥이 저릿거렸다. 선우는 발끝에 힘을 주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유라 씨 샐러드 챙겨 드리고 2층 대청소하신대서 옥수댁 아주머니 잠깐 도와 드리고, 전무님 전화받고 나온 거……. 그게 전부예요.”
“아침엔 뭐 먹었어요?”
“커피하고 쿠키 먹었어요.”
“점심은?”
오렌지색 조명이 환하게 밝은 정원을 걷는 남자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얼굴로 질문을 이었다.
“유라 씨 샐러드 줄 때 토마토 갈아서 먹었어요.”
“배고팠겠네. 어쩐지 잘 먹더라.”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아래로는 하월재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결혼식을 올렸는지 차려입은 사람들이 행사에 쓰였던 꽃을 쥐고서 단청 아래를 걷고 있었다.
“이만 올라갈까.”
커다란 정원을 두 바퀴 정도 돌았을 때 서문도가 말했다. 선우는 잠시 호텔동을 올려다보았다.
올라가면 그렇고 그런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조금만, 아주 잠시만 더 이렇게 있고 싶은데.
“네. 올라가요.”
선우는 미련을 버리고서 대답했다. 호텔로 오면서 바로 잠자리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긴장했었는데 뜻밖에도 평범한 시간을 가졌다.
처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했고, 처음으로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었다. 잠시지만 오래전의 평범한 이선우로 돌아갔었던 것 같은 시간.
이 정도로 충분했다. 조금 더 길어지면 돌아가고 싶지 않아질 수도 있으니까.
“하나만 더 얘기해 봐요.”
서문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선우는 뒤를 돌았다.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을 가볍게 움켜쥔 남자가 묻는다.
“올라가기 전에 뭐 하고 싶은지.”
가끔, 당신이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들어가기 싫다고 내 얼굴에 쓰여 있었을까.
“팥빙수 먹고 싶어요.”
백일몽 같다고 생각했었지. 한낮에 꾸는 길고 긴 꿈이라고.
한 번쯤은 좋은 꿈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꿈을 꾸어도 좋지 않을까. 한 번쯤은 깨고 싶지 않은 그런 좋은 꿈을 꾸어도 괜찮다면.
“실은 여름 내내 팥빙수가 먹고 싶었어요.”
선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게 뭐라고 이제껏 참았는지, 말해 놓고도 머쓱해서 웃음이 나왔다. 문도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커피컵을 구겼다.
“소박하네. 팥빙수 먹으러 갑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팥빙수는 전혀 소박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라운지 카페에서는 망고 빙수만을 팔았고, 선우는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문도는 둘은 같은 음식이 아니라며 기어이 차를 몰아 호텔 아래로 내려왔다.
내려와서도 문을 닫은 빵집 때문에 이리저리로 헤매야 했다. 마침내 동네 빵집에서 팥빙수를 먹게 되었을 땐, 허무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맛이…….”
스푼을 물고서 선우가 말하자 문도가 답했다.
“없죠.”
단호한 대답에 선우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얼음이 덜 갈린 팥빙수가 왜 이렇게 웃긴 일인지 모르겠다. 팥은 이가 아릴 정도로 달았고 덜 갈린 얼음은 덜걱덜걱 씹혔다.
“먹어요. 먹고 싶다 했잖아.”
서문도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해서 더 웃겼다. 선우는 웃음을 참으며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묽은 국물을 한 숟갈 뜨는데 으득, 얼음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시원하고 좋네. 이에 금 가겠어.”
웃음이 또 터졌다.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
안 웃긴 말인 거 선우도 너무 잘 알았다. 그냥 다 웃겼다. 툴툴거리면서 빙수를 먹는 서문도도, 돌고 돌아 사 먹게 된 팥빙수가 정말 정말 맛이 없는 것도, 이렇게 웃을 일이 아닌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자꾸 그렇게 웃음으로 때우려 하지 말고 먹어요. 장 여사가 음식 남기지 말랬어.”
“네. 그럴게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선우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문득 이 남자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해졌지만, 거기까지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이선우의 부탁대로 불을 켜지 않았다.
커튼까지 내린 방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눈에 어둠이 익을 때까지 문도는 선우에게 입을 맞추었다.
도톰한 입술을 벌리고 그 안에 고여 있는 달콤한 즙을 거듭 마셨다. 한 번씩 이선우는 고개를 틀어서 숨을 쉬었다. 문도는 그런 여자를 뒤쫓아 다시 숨을 빼앗았다.
어둠에 눈이 익었을 때부터는 이선우의 실루엣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둥글게 부푼 가슴을 오래오래 머금었고, 오목하게 파인 배꼽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냥……. 그냥 하셨으면 좋겠어요.”
아래로 내려가려 하니 이선우가 그를 붙잡았다. 이선우는 쾌감이 증폭하는 구간을 못 견뎌 했다. 수치스럽다 생각하고 낯뜨겁다 생각했다.
그런 이선우가 기어이 그의 앞에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는 게 그의 쾌감 중 하나였지만, 그래. 오늘만큼은.
“싫어서 그래요?”
“그게 아니라.”
뒷말을 씹는 여자의 얼굴이 붉었다. 어둠 속에서도 느껴질 만큼 열이 오른 얼굴이었다.
“아니면?”
“빨리……. 전무님을.”
문도의 목이 뜨거워졌다. 이게 거짓인지 진실인지 가늠할 길도 없으면서, 그를 견뎌 내는 일을 적당히 해치우려고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이선우의 무릎을 세우고 몸을 맞추었다. 허리를 당기며 단번에 안으로 삽입을 하는 순간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많이도 젖었네.”
그의 말에 이선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마저 눈을 뜨겁게 해서 까만 어둠이 빨갛게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보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깊은 애무를 하지 않았는데도 매끄럽고 뜨거웠다. 살아 있는 무엇이 그를 힘껏 빨아 당기는 기분이었다.
문도는 선우의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웠다.
“눈 뜨고.”
문도의 말에 물기를 머금은 이선우의 눈이 문도를 향했다. 문도는 몸을 뒤로 물렸다가 앞으로 단번에 치고 나갔다. 아읏, 신음 소리와 함께 이선우의 목이 희게 꺾인다.
평소보다 물기가 많이 어린 이선우의 안쪽이 뜨거워서 맞닿은 부분이 녹을 것 같았다. 결합된 부분에서 둥둥 맥이 울리는데 그게 이선우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전무님. 제발.”
넣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더니 선우가 허리를 틀며 말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이 시트를 움켜쥐었다.
“넣어 달라고, 빼 달라고?”
그런 말은 듣기 힘들다는 듯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문도는 허리를 숙여 선우의 입술을 잡아 물었다. 잘근 씹으면서 다시 물어보았다.
“넣어요, 빼요. 말을 해.”
답을 하는 대신 이선우가 그의 입술을 마주 물었다. 문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제가 먼저 입술을 붙여 왔다. 혀를 마주 대며 보채듯이 신음 섞인 숨을 쉬었다. 심장이 뻐근하게 벌어지는 느낌에 문도는 여자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주세요. 더 깊이.”
깊은 입맞춤으로 숨이 가파르게 오른 선우가 말했다. 후우. 문도는 숨을 길게 내쉬며 허리를 세웠다. 뒤로 물렸다가 빠르게 안으로 밀고 들어가니 선우가 허리를 휘며 신음을 흘렸다.
문도는 그런 선우를 내려다보며 속력을 올렸다. 빠르게, 더 빠르게. 깊고 더 깊게. 어둠 속에서 침대는 무겁게 출렁거렸고, 이선우는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무너지며 그에게 매달려 왔다.
전무님, 제발.
긴 비명을 삼킨 선우가 그의 목을 안으면서 허리를 들었다. 하얗게 눈앞이 부서지며 세상이 아득히 무너져 내렸다.
아주 잠시, 문도는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런 자신이 답도 없는 놈 같아서 큭큭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