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백일몽(1)
지난번처럼 시간과 장소를 보내올 줄 알았는데, 서문도는 전화를 걸어왔다. 저녁 6시, 선우가 막 퇴근을 하고서 숙소동 방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죠?
선우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대답을 하기 전에 서문도가 먼저 말했다.
— 한 시간 정도면 넉넉한가?
“네. 그 정도면 괜찮아요.”
— 그럼 7시, 택시 보낼 테니까 타고 와요.
“아니에요, 제가 나가서.”
— 예쁘게 하고 오고. 이따 봅시다.
택시는 알아서 탈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어디를 가는 건지, 무엇을 할 건지 물어볼 사이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전화를 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선우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랍 안에서 목걸이도 꺼내고 서문도 전무가 돌려주었던 시계도 꺼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서문도는 너무나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반복되었다.
그래서 뭐랄까……. 선우는 눈을 뜨고 꿈을 꾼 기분이었다.
하기야.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것이 백일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대한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일지도.
꿈에서 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때까지는 그만둘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꿈속의 세상.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마음을 쓴단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서문도 전무인데.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가 꿈속의 허상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싸늘히 식어 버릴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남자가 꿈에서 깨지 못하도록, 아직은 달콤한 꿈에 취해 있도록 웃어 주어야 할 때였다.
선우는 옷장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냈다. 그래 봐야 몸에 붙는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일 뿐이지만 그래도 가진 옷 중에는 제일 비싸고 좋은 옷이었다. 화장품 파우치도 꺼내 놓은 뒤 얼마 전에 산 새 속옷을 챙겼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남자에게 보이기 위한 속옷을 사고, 보란 듯이 입고 가게 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었는데.
그래도 괜찮아. 여기는 꿈속이니까. 한낮에 꾸는 길고 긴 꿈일 뿐이니까. 거짓된 사랑을 속삭이며 달콤하게 웃어 주는 여자는 꿈속의 나일 뿐이니까.
선우는 욕실로 향했다. 7시까지 준비를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선우 씨 오늘 무슨 일 있어?”
화장을 하고 원피스를 입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조리사 아주머니가 눈을 크게 뜨면서 물어보았다.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거야?”
옥수댁 아주머니도 놀란 눈으로 선우를 훑었다. 그 옆에 앉은 장 여사만이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니요. 친구 만나러 가요.”
말을 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서문도를 만나러 나간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으니까.
“아유, 꾸미니까 너무 예쁘다. 평소에도 좀 그러고 다녀 봐.”
“별채에 막내 아가씨랑 갇혀 있는 사람이 뭐 하러. 잘 다녀와.”
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들에게 웃어 보인 뒤 현관을 나섰다. 주차장 옆쪽의 쪽문을 열고 나오니 골목 건너편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이선우 씨, 맞으시죠?”
기사가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타면서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곳이 어디든, 선우에게는 서문도만 있으면 되니까.
택시는 호텔 앞에 섰다. 언덕을 오르기 전, 커다란 체육관이 보였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었다.
짐을 받는 도어맨,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발레파킹을 맡기는 사람들, 안내하는 직원들로 분주한 출입구가 보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택시에서 내리려는데 정복을 입은 직원이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이선우 님, 맞으신가요?”
말끔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은 직원은 문을 열어 주면서 상냥하게 물었다.
“네.”
“이그제큐티브 라운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지고 오신 짐은 룸으로 바로 올려 드릴까요?”
“아……. 짐은 가지고 오지 않아서요.”
“네에, 그럼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로비로 들어섰다. 금빛이 쏟아지는 화려한 로비는 미술관 같기도 하고 유럽의 어느 박물관 같기도 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선우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직원이 라운지층의 버튼을 눌러 주며 인사를 했다.
택시에서부터 라운지층에 도착하기까지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선우 혼자였다.
뭐랄까. 선우는 그것조차 어딘지 모르게 서문도답다는 생각을 했다. 배려 넘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배려하지 않는 그런 것이.
딩,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한 발을 내딛자 프론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서문도의 뒷모습이 보였다.
“전무님.”
그리 크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서문도는 단번에 뒤를 돌아보았다. 선우를 훑는 눈동자에 만족감이 어렸다.
“진짜로 예쁘게 하고 왔네요.”
남자의 팔이 허리에 감겼다. 선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뭐 먹고 싶어요?”
입술을 떼면서 문도는 선우에게 물어보았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반짝이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물기 어린 선홍색 입술과 그를 보는 반짝이는 눈.
룸에는 잠깐 겉옷이나 벗어 두려고 들렀었다. 재킷을 벗어 두고 손을 씻고 나와 보니 이선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산타워의 불빛을 보는 여자의 표정은 마치 꿈을 꾸는 듯 보였고, 문도는 자연스럽게 그런 여자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뭘 하든 어차피 거부도 못 하는 여자, 바로 침대에 눕혀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한 번쯤은 참아 넘길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메뉴를 물은 참이다.
“전무님 드시고 싶으신 거 먹을게요.”
“나는 이선우 먹고 싶은데, 그걸로 할래요?”
웃으면서 물어보았더니 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돌이켜보면 이선우에 대해서는 늘 충동적이었다. 순간의 충동은 예외를 부르고, 거듭된 예외는 뼈아픈 실수가 된다.
눈앞의 여자를 통해 그걸 배웠으니 이제는 반성을 해야 하지 않겠나.
“편하게 라운지에서 먹어도 되고, 아래 식당으로 내려가도 좋고. 좋아하는 걸로 골라요.”
“네.”
이선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안내 책자를 펼쳤다. 다이닝 섹션을 펴고 소개되어 있는 레스토랑의 메뉴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요,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혹시 점심에 뭐 드셨어요?”
세심하기도 하시지. 메뉴가 겹칠까 봐 물어보는 선우에게 문도는 간단히 답을 주었다.
“짜장면 먹었습니다.”
“아, 네.”
아, 하고 네, 사이에 짧은 쉼표 같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다시 책자를 보는 선우에게 문도는 말했다.
“중식당 가고 싶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라운지가 편할 것 같아요.”
피식 웃은 문도는 책상 위에 놓인 전화를 들어 중식당을 예약했다. 당황한 이선우의 표정이 볼 만했다.
“하고 싶은 거 해요.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렇게 해 주려고 불러낸 거니까.”
이선우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네, 하고 대답을 했다.
문도는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도 앞에서 이선우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은.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파편처럼 흩어진 여자의 조각들일 뿐이다. 진짜 이선우는 몇 장의 서류와 이민우의 핸드폰 안에 있었다.
다정한 가족. 성실한 노력. 따뜻한 미소.
부모님의 사고로, 동생의 사망으로 찢겨져 나간 여자의 삶은 단단하고 따뜻했었다.
그걸 세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게 나았을까. 어차피 너는 눈먼 내 등에 칼을 꽂으려 다가온 여자일 뿐인데. 그리고 나 역시 네 등에 무참히 칼을 꽂을 텐데.
“예전에요.”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 문도는 고개를 돌렸다.
“외할머니 환갑이셨는데, 그때는 아빠가 엄마한테 용돈 받아서 쓰실 때였거든요. 아빠가 몇 달 동안 그 돈을 모아서 이모네랑 우리 식구랑 외할머니랑 청연에서 식사를 사 줬어요. 할머니 환갑 기념으로요.”
사진 속, 지적인 인상에 체격이 호리호리했던 중년 남자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아빠는 큰마음 먹고 코스 요리를 사 줬는데, 할머니랑 동생이랑 저랑 셋이서.”
선우가 잠깐 말을 끊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식사로 나온 짜장면이 제일 맛있었다고 했어요. 엄마는 그 말에 아빠 마음 상할까 봐 아니라고, 다른 게 훨씬 고급인데 우리가 뭘 모르는 거라고 하셨고요.”
추억을 말하는 이선우의 눈동자는 따뜻하고 쓸쓸했다.
“아빠가 크게 웃더니 다음에는 짜장면하고 탕수육만 먹자고, 아빠도 사실 그게 제일 맛있었다고 했어요. 그냥 아까 잠깐 그 생각이 났어요.”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그에게 독이 될 터였다.
팻말이 땅땅 써 붙여져 있다. 금지구역이라고. 수심이 깊으니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어느 순간 발이 푹 꺼져 너는 그 안에 잠겨 죽을 수도 있다고.
“좋은 아버지셨네요.”
“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문도는 부드럽게 물었다. 어스름이 저물어 가는 창문 너머로 묽게 탄 잉크 같은 하늘이 보였다. 선우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는요,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셨어요.”
이선우는 조용히 정혜숙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밝고 따뜻한, 활기차고 용감한 사람이었다며. 그런 엄마를 동생이 꼭 닮았다고도 했다.
물어본다고 또 순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선우의 이야기를 문도는 차분히 들어주었다. 쓸쓸하고 따뜻한 그의 연인은 한 번씩 그를 보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지루하셨죠?”
엄마 이야기를 마친 선우가 문도에게 물었다.
“아니. 전혀.”
문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제 정확히 알았다.
서문도는 자신이 이선우가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이선우가, 텅 비어 외로운 이선우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그 쓸쓸한 마음까지도 그에게 내어 주기를 원한다.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의 다정에 두 눈이 멀기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빼앗기기를.
그러다 어느 날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기를. 내어 주었던 마음들까지 모두 무참히 깨어지기를.
이선우의 하나뿐인 빛이, 희망이, 안식처가 되기를.
그리하여 생의 가장 큰 절망이 되기를.
그런 날이 온다면 이 순간이 독이 되어도, 그러다 어느 순간 잠겨서 죽어도.
그래도 좋겠다고, 문도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