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아무도 없으니까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로 선우는 출근 준비를 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선우 씨, 오늘은 조금 늦었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조리사 아주머니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식탁에 앉아 있던 장 여사가 뒤를 돌아 선우를 보았다.
“네. 조금 늦었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장 여사가 커피 한 모금을 호록 마시며 선우에게 물었다.
“막내 아가씨 어제는 뭐 했어? 아직도 늦게까지 선우 씨 붙잡아 놓고 그래?”
선우는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답을 했다.
“아니요. 어제는 마사지 받고 일찍 주무셨어요. 저는 제시간에 퇴근했고요.”
“그렇구나. 아 참, 내 정신 좀 봐. 별채에 붕어즙 가져다 놓으려고 들러선, 얼른 커피 한 잔만 마신다는 게 너무 오래 있었네. 어제 아주 인사불성이 돼서 들어왔다는데.”
“누가요? 서 전무님이?”
장 여사의 말에 조리사 아주머니가 물었다.
“강 기사가 데려왔다고 하더라고. 대체 무슨 일이래, 내 이제까지 우리 전무님이 술 마시고 그렇게 됐다는 얘기는 들어 본 일이 없는데. 어디서 몰래 연애라도 하는 건가.”
“아.”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받던 선우가 작게 소리를 냈다. 생각 없이 물을 너무 많이 받다가 튀어 오른 뜨거운 물방울에 손등을 데었다.
“선우 씨, 괜찮아?”
“네. 물이 튀어서 그랬어요. 괜찮아요.”
머그잔을 내려놓고 다른 손으로 손등을 문질렀다.
“나는 먼저 가요. 선우 씨, 이따 보고.”
김치 냉장고에서 붕어즙을 꺼낸 장 여사가 주방을 나섰다.
“선우 씨는 아침 뭐로 먹을래? 미역국 있는데 그거 줄까?”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쿠키 한 조각 먹을게요.”
아일랜드 한쪽에 놓여 있는 쿠키 상자에서 하나를 꺼내 식탁에 앉았다. 느리게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조각내서 먹었다.
이제 서문도 전무의 얼굴을 어떻게 보나. 잠은 잘 잤을까. 어제 일은 기억할까.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선우는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보았다. 출근 시간인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서문도 전무가 일찍 출근을 하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별채로 들어가니 다이닝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서문도 전무가 다이닝룸에 있다는 걸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막연히 품었던 기대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선우 씨 또 보네, 아침은 먹었어?”
주방을 들어가자마자 장 여사가 먼저 선우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네. 먹고 왔어요.”
선우는 대답을 한 뒤 괜히 입술만 잘근 씹었다. 옆을 보아 서문도 전무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괜히 곤란하고 등이 따끔거렸다.
“왔어요?”
머뭇거리며 인사를 하려는데 서문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며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매끈한 모습의 서문도가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 전무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잘 잤습니다.”
문도가 커피가 든 머그잔을 들었다. 평소와 아주 같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남자에게서 남아 있는 술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 에너지 수혈이라도 받아 오는 걸까 싶을 정도로 힘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잘 자기는 뭘 잘 자요. 기억이 안 난다며. 커피는 고만 드시구 이거 드셔요.”
장 여사가 데운 붕어즙을 꺼내면서 타박하듯 말을 했다.
“기억이 안 나니까 잘 잤겠죠.”
“어제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는 알고요?”
“잘 들어왔겠죠. 그러니까 이렇게 장 여사님도 보는 거고.”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장 여사가 문도를 보았다. 장 여사가 내어 주는 비릿한 붕어즙을 웃으며 받은 문도가 컵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술을 그리 드셨대.”
“잔소리는 1절만.”
빈 컵을 내려놓은 뒤, 장 여사가 들고 있는 접시에서 초콜릿 하나를 집어 먹으며 서문도가 말했다.
밉지 않게 흘겨보는 장 여사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서문도는, 너무나 평소의 서문도 전무 같았다.
그러니까, 이전과는 같고 어젯밤과는 다른.
남자가 말끔히 지워 낸 것은 술기운만이 아니었나 보다. 어제 새벽의 일들은 남자에겐 모두 기억나지 않는 일인 듯했다.
다행인데. 그런데.
“토요일인데 출근하세요?”
“해야죠.”
“낮에 2층 대청소 한번 하려는데 괜찮으신가 해서.”
“하세요. 퇴근 늦게 하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두고 선우는 뒤를 돌았다. 거실로 나와서 소파에 앉았다.
잘된 일이다. 다행인 일이고. 남자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 선우 역시 없었던 일이라 생각하면 되었다.
“그럼 드시구서 가세요.”
장 여사가 주방 뒷문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서문도는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너무 멀쩡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다행인데,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괜히 억울했다. 사람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고 혼자만 멀쩡해.
“잘 잤어요?”
출근을 하려는지 거실로 나온 문도가 선우에게 물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서 선우는 문도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눈가에 피로가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네. 잘 잤어요.”
조금 느리게 나온 선우의 대답에 문도가 피식 웃었다.
“토요일은 일찍 끝나죠?”
“네.”
“저녁에 시간 비워 둬요.”
대답을 하지 못하고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선우의 머리를 툭 가볍게 짚으며 문도가 말했다.
“목걸이 하고 나오고.”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목에 걸려 있는 얇은 목걸이를 만졌다. 그제 밤에 새로 사 준 목걸이는 상자에 다시 넣어서 숙소방에 넣어 두었다.
“숙소에서 하기엔 너무 비싼 거라서요.”
“알아요. 그러니까 이따 보여 달라고.”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는 선우를 문도가 내려다보았다. 미간을 찡그리면서 웃더니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고개를 내린다.
“전무님.”
“조금만.”
남자의 입술이 선우의 입술에 가볍게 포개졌다가 느리게 떨어졌다.
“아무도 없으니까.”
슬쩍 웃는 얼굴이 다시 다가와 선우의 입술을 한 번 더 훔쳤다. 짧은 입맞춤인데 눈을 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지.
“이따 나와요.”
서문도가 인사를 남기고 출근을 했다. 마음이 자꾸만 복잡하게 엉겨들어서 선우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며칠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차에 세운 문도는 핸드폰을 들었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가는 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했다.
— 장현성입니다.
“주차장입니다. 내려오시죠.”
— 네, 전무님.
긴장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어왔다. 문도는 전화를 끊고 시트 깊이 몸을 기댔다. 옅은 두통과 뻐근한 눈이 숙취의 흔적이었다.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는데 환청이 들려왔다.
‘저 싫어하셨잖아요.’
목소리는 머릿속을 한 바퀴 돌아 목구멍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뜨거운 물처럼 속을 훑으며 내려가서 단전 아래 어디쯤에 고였다.
꾸욱, 손끝으로 눈을 눌렀다가 뗀 문도는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파일을 들었다. 2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순서대로 정리한 파일이었다.
이민우, 김영재, 최지상, 서유라 각기의 동선과 통화 내역, 메시지 내역이 들어 있었다.
멀리서 금테 안경을 쓴 장현성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보통 체격에 금테 안경을 쓴 남자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문도는 가까이 다가와 조수석을 기웃거리는 남자에게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타시죠.”
“네. 그런데 전무님, 일단 사무실로 올라오시면.”
“타세요.”
장현성이 조수석에 앉았다. 문도는 창문을 올리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핸들에 손을 올린 채로 무심히 앞을 보면서 장현성에게 말했다.
“참고로 저는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합니다.”
현성은 침을 삼켰다. 별말을 하지 않았어도 서문도는 사람을 긴장시켰다. 차 안에 가두어 놓은 공기까지도 틀어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서문도의 아버지인 서중호의 뒤를 닦아 준 지 5년째. 제법 드나드는 일이 있었음에도 서문도를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서유라와 최지상이 사고를 쳤을 때 한 번, 사건 마무리 후 최종 사건 파일을 정리해서 올렸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
“이건 올라가셔서 읽으시고.”
서문도가 파일을 건넸다.
“메일로 보내 드릴 파일도 있으니 같이 확인하세요.”
“네.”
현성은 빠르게 파일을 눈으로 훑었다. 며칠 전 만나자는 전화가 왔을 때부터 직감은 했었다.
무엇을 알아낸 것인가. 꼼꼼히 봉해 두었을 텐데 어떻게. 부회장님 지시였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장 변호사님 차례입니다. 정리해서 말씀해 주시죠.”
“듣고 싶으신 게 정확히 어떤.”
서문도가 웃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동안 눈동자에서는 빛이 났다. 사람을 꿰뚫을 것만 같은 빛이었다.
“그건 장 변호사가 알아서 판단하시고.”
전부를 듣겠다는 말이다. 그 말은 전부를 알고 왔다는 말과 같았다. 현성은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경찰서에 가서 서유라 씨가 최지상 씨의 알리바이를 댔습니다. 최지상은 남자 둘이 쓰러진 뒤에 왔고, 당황해서 신고하겠다고 하는 최지상 씨를 자신이 내쫓았다고요.”
최지상은 이제 막 뜨는 배우인 자신의 입지를 위해, 서유라는 그런 최지상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핸드폰을 받은 서문도가 나머지 처리를 맡기고 현장을 뜬 뒤에 현성은 현장에서 최지상부터 내보냈다. 현장에 경찰이 도착했을 땐 서유라와 현성 둘뿐이었다.
서유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당연히 알았다. 부회장에게 보고를 했을 때, 덮으라는 지시가 있어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다.
살인사건이 아닌 사망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증인이 되어야 하는 당사자 둘은 죽었고, 몸에는 치사량의 약물이 있었으며, 서유라와 최지상의 증언이 있었다.
핸드폰은 몇 개를 더 거둬서 분실로 처리했고, 웨이터 몇몇을 매수해서 최지상의 입장 시간에 대해 증언을 하게 했다. 출입구 쪽 CCTV는 클럽과 합의하에 고장 난 것으로 해 두었다. 경찰과 검찰은 굳이 검증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이야기를 전부 들은 서문도가 물었다. 현성의 머릿속에 순간 두 가지 대답이 동시에 떠올랐다. 어느 쪽의 줄을 잡아야 하나.
분명한 건 서중호와 서문도 사이에는 금이 그어져 있다는 것이다. 딛고 있는 땅이 다른 느낌.
지금은 등과 등을 맞대고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언젠가는 떨어져 나올 존재였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숨통을 쥐게 될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전부, 알고 계십니다.”
“최지상이 범인이고 서유라가 공범인 것 전부요.”
“네.”
자신을 빤히 보는 서문도의 눈빛은 서중호를 닮았다. 아니, 닮았지만 달랐다. 서중호가 뱀의 눈을 하고 있다면 서문도는 호랑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만난 일에 대해서는.”
서문도가 잠시 사이를 띄웠다. 현성은 문도가 원하는 답을 말했다.
“함구하겠습니다.”
서문도가 짧게 웃었다.
“알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고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서문도의 차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현성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