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너는 나 안 좋아하지
그래. 미칠 것 같아.
서문도의 웃음소리가 맞물린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 낮고 깊은, 어딘가 뒤틀린 웃음소리는 이내 뜨거운 입맞춤으로 변했다.
마주 댄 입술이 형체 없이 뭉그러졌다. 혀가 비벼지고 타액이 삼켜졌다. 머리가 젖혀지고 숨이 넘나들었다.
데일 것 같았다. 아니, 타는 것 같았다. 남자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알코올 냄새가 선우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화한 알코올 냄새가 희고 푸른 불꽃이 되어 식도를 타고 등줄기를 내려갔다. 아랫배와 다리를 지나 발바닥까지 불이 붙는다.
“하아…….”
어느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파란 숨을 쉬는 선우의 양팔을 잡고서 남자가 몸을 뗐다. 선우를 밀어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문도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이 선우를 느리게 훑는다.
“전무님…….”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내게 왜 이러냐는 물음은 차마 나오지도 않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속은 엉망으로 휘저어진 진창이었다.
“늦었으니 건너가요.”
등을 세운 남자가 말했다. 서늘한 목소리였다. 쓱, 선우를 스쳐서 걷는 걸음은 무심하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늦는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해 줘서 새벽까지 기다리게 해 놓고, 갑자기 전화를 해서 아무 말 없이 끊더니 이제는 가라고.
진심으로 진심이라는 말이 말뚝처럼 가슴에 박혀 뽑히지 않았던 하루였다. 덜컹 내려앉아 버린 심장은 하루 종일 흔들거렸다.
‘그래. 계속해.’
그렇게 돌아온 서문도와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친밀했던 미소와 농담들이, 건네주었던 선물들이 차례로 떠올라 숨을 쉴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남자였다.
서문도는 시리도록 차가웠다가 데일 듯이 뜨거웠다. 수치심을 주었다가 매끄럽게 웃었다. 희망을 주었다가 절망을 주었고, 절망에 잠겨 갈 때 손을 뻗어 끌어냈다.
그러니……. 아마 아닐 것이다. 네가 좋다는 말은 술에 취한 농담일 거였다.
서문도가 자신을 진지하게 만날 리 없었다. 그건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저무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거여서 의심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몸만 섞는 관계에서 아주 조금 더 마음을 내어 준 정도일 거야. 그러니까 주말에 데이트 정도는 할 수 있는, 차 한잔 마시면서 대화는 할 수 있는 그런 사이. 그래, 그 정도의 사이.
나는 당신 안 믿어.
뜨거웠던 입맞춤이 다음 날이면 차가운 조롱으로 변했었지. 다정히 웃어 주고서 며칠 뒤에 그만하자고 했었잖아. 내가 좋다고 매달리니까 그제야 받아 주는 정도인 거잖아.
“네. 전무님도 주무세요.”
선우는 마스터룸으로 들어가는 서문도에게 인사를 건넸다. 휘청이며 걷는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중문을 향해 걸어가는 선우의 귀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씨발, 욕을 씹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는 마스터룸 안에서 짙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다시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아.
선우는 잡고 있던 중문의 문고리를 힘껏 쥐었다. 신경 쓸 것 없이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마음과 되돌아가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팽팽하게 맞섰다.
“내가 진짜…….”
돌아가면 마음 편히 못 잘 것 같아서 그래.
선우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열려 있는 마스터룸으로 걸어갔다. 활짝 열린 방문을 지나니, 침대 발치에 구겨져 있는 문도가 보였다.
“전무님. 일어나세요.”
어깨를 흔들었더니 귀찮은 듯 고개만 비틀었다.
“일어나셔서 침대로 가요.”
선우는 구겨져 있는 남자의 팔을 잡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문도를 부축해서 간신히 침대에 눕혔다. 괜찮을까, 살펴보는데 남자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가.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렇게 엉망인데.
선우는 입술을 꾹 맞다물었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마스터룸을 나가 중문을 닫고, 다시 돌아와 방문도 닫았다.
이걸 어떻게 벗기지.
재킷을 어떻게든 벗겨 보려다 포기하고 느슨하게 걸려 있는 타이를 먼저 풀었다.
목을 조이는 셔츠의 단추를 서너 개 풀고 소매의 커프스링크도 풀었다. 몸을 일으키다 허리의 벨트가 눈에 밟혀서 그것까지 풀었다.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남자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을 틀어서 수건을 적셨다. 비틀어 짠 다음 침대로 향했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선우는 머뭇거리다 수건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조심스럽게 이마를 닦았다. 관자놀이를 닦고, 뺨에도 수건을 댔다.
잠이 들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남자는 눈을 뜨지 않았고, 선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깨트릴 수 없는 침묵이 침실을 가득 메운 것 같았다. 젖은 수건이 조심조심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셔츠 깃을 벌려 쇄골 아래를 닦아 줄 때였다. 문도가 선우의 손목을 잡았다. 반짝 눈을 뜬 남자와 어둠 속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가라니까 말 안 듣고.”
손목이 휙 당겨지며 선우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남자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황한 선우는 젖은 수건을 움켜쥐며 말했다.
“갈게요. 이제 가려고 했어요.”
일어나려는 선우의 허리에 문도의 팔이 감겼다.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남자는 선우를 바짝 당겨 안았다. 등과 가슴이 맞붙고, 다리와 다리가 얽혔다. 선우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서 남자가 말했다.
“가지 마.”
숨이 막힐 정도로 선우를 꽉 안은 채 문도가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등을 통해 울렸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술에 취해 그런 거라 애써 생각했지만, 등에 닿는 체온이 너무 뜨거웠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서문도는 작게 말하며 선우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명치 끝이 시큰거려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숨만 쉬었다. 그조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침묵이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선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무님.”
선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응.”
남자의 대답이 선우의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저희 정말……. 사귀는 거예요?”
차마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거냐고 물을 수는 없어서 돌려서 물어보았다. 낮은 웃음소리가 몸을 울렸다.
“저 싫어하셨잖아요.”
한순간에 선우를 밀어냈던 남자였다. 심장까지 얼려 버릴 것 같은 차디찬 눈으로 마주치는 것조차 싫다고 했었다.
“싫어한 적 없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닿은 어깨가 홧홧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더 그랬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을 옥죄고 있는 남자는 가끔씩 선우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 그 행동에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려 했다.
“그럼 왜…….”
나를 밀어냈느냐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 좋아져서.”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목의 안쪽에 뜨거운 덩어리가 걸린 것만 같았다. 커다란 덩어리가 목을 틀어막고 가슴을 틀어막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생각을 하는 선우에게 남자는 이어 말했다.
“그때가 아니면 도저히 못 놓을 것 같았거든.”
뜨거운 불씨 같았던 말이 목을 뻐근하게 넘어갔다. 어째서 울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인지 선우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남자는 피식 웃었다. 조금 더 깊이 선우의 어깨에 머리를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너는 나 안 좋아하지.”
질문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한 말을 중얼거린 뒤 남자는 소리 없이 웃었다. 선우는 눈을 꾹 감았다. 뭉근한 통증이 명치에서 일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 * *
남자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 선우는 천천히 허리에 얹힌 남자의 팔을 들었다.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잠이 든 서문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야. 그만.
숨을 깊이 쉰 선우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젖은 수건을 집었다.
남자의 옆자리, 자신이 누웠던 자리의 구겨진 시트를 펴고, 수건은 파우더룸의 빨래통에 두었다.
그대로 나가려다 발을 멈추었다. 입술을 깨물고 욕실 안쪽의 드레스룸을 보았다. 한 발을 디뎌 안으로 들어가는데 자신을 비웃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그런 여자인데. 나는 자꾸 그걸 잊어.’
뜨거운 것이 목을 치고 올라왔다. 서문도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남자를 속인 여자였다. 몇 번이나 차를 들고 올라갔고, 잠자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카드를 받았고, 시계를 샀다. 거짓으로 웃음을 웃고, 거짓으로 고백을 했다.
나는 이런 여자이니까.
잠든 남자를 뒤로하고 선우는 욕실 문을 닫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몇 칸의 수납장을 뒤졌다.
‘좋아한다는 말, 진심이야?’
마지막 서랍을 여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선우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니야.
‘왜 이렇게 예뻐?’
아닐 거야.
‘네가 너무 좋아.’
아니어야만 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뻐근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니야. 그만. 마음을 다잡으려는 순간 목덜미에 스며들었던 남자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넌 나 안 좋아하지.’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선우는 서랍을 잡고서 주저앉았다. 아프게 쉬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응, 맞아. 난 당신 안 좋아해.
나는 그래야 해.
천천히 눈을 뜬 선우는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접혀 있는 베갯잇들을 모두 손으로 만져 본 뒤 허리를 폈다.
민우의 핸드폰은 이곳 마스터룸에는 없다. 이제 거실에 있는 드레스룸을 제외하곤 모두 찾아보았다.
바깥 드레스룸까지 살펴볼까. 욕심이 생겼지만 오늘은 이만하기로 했다. 더 지체하다간 날이 밝을 수도 있으니.
발소리를 죽인 선우는 조용히 욕실을 나왔다. 깊게 잠든 서문도를 지나쳐 마스터룸을 나왔다.
숨을 멈춘 채로 중문을 열고 다시 소리 없이 닫아 두었다. 조심스럽게 2층의 계단을 내려와 주방의 뒷문을 열었다.
후원을 건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울렁거렸다. 발밑의 땅이 물컹이며 선우의 발목을 잡아채는 것만 같았다.
선우는 어둠이 걷혀 가는 하늘을 뒤로하며 서둘러 후원을 건넜다. 누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바라보고 있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한 채였다.
“아니 잠깐만, 선우 씨가 왜 저기서 나와.”
본관을 나오던 장 여사의 옴폭 파인 눈이 끔뻑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