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81화 (81/168)

81. 뱀술

재개발을 앞둔 상가의 골목은 한낮에도 을씨년스러웠다. 문도는 커다란 상가동의 통로를 걸었다.

전파사와 음향사, 공구사와 수선소 등을 지나자 모서리의 금칠이 거의 다 벗겨진 계단이 나왔다. 문도는 휴대폰으로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B동 209호.

계단을 올라 전선과 기물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복도를 지나 조그맣게 걸려 있는 명패를 올려다보았다.

209호. 가나통신사.

유리로 된 문에는 누렇게 바랜 통신사 로고들이 붙어 있었고, 오래전에 나왔던 핸드폰 기종들을 최신형이라 홍보하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출장중’

핸드폰 번호도 적어 두지 않은 채 출장 중이라는 간단한 팻말만 걸어 놓은 상가 앞에서 문도는 핸드폰을 들었다. 명 실장에게 받은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네, 가나 핸드폰입니다.

심드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규진입니다.”

— 오셨구나, 어디세요?

“문 앞입니다.”

불이 꺼져 있던 상가의 안쪽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더니 덜컹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보아야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노란 금발 머리의 남자가 문도를 향해 까딱 인사를 했다.

“들어오세요. 잘 찾아오셨네요.”

문도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남자는 말을 이어 갔다.

“지난번처럼 카페에서 얘기하기 힘들 것 같아서 가게로 오시라 했어요. 앉으세요. 커피?”

어두운 공간을 지나 안쪽에 보이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불이 환하게 밝혀진 사무실이 나왔다. 낡은 철제 책상과 간이침대, 대용량 서버, 노트북과 데스크톱 따위가 보였다.

“작업은 전부 끝났습니까?”

문도는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를 받아 들며 남자에게 물었다.

“네, 뭐. 할 게 별로 없었어요.”

틱이 있는지 남자가 양쪽 눈을 동시에 꿈쩍 감았다 뜨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두 개의 핸드폰이 담겨 있는 비닐 팩을 들고 와서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풀썩 자리에 앉는다.

“어디 보자. 어, 이거부터 말씀드리면.”

남자는 1이라 네임택을 붙인 낡은 휴대폰을 꺼냈다. 모서리가 깨져 있고 액정의 필름도 군데군데 들떠 있는 낡은 휴대폰이었다.

쓱쓱 패턴을 그린 남자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주인이 돈도 없고, 숨길 것도 없고, 꼬인 데도 없는 사람이죠? 의뢰받은 핸드폰 보면 대강 성격 나오는데, 딱 본인들처럼 쓰거든요.”

나름의 근거가 있다는 표정으로 남자는 말을 이었다.

“휴대폰 3사 중에 제일 인기 없는 회사 거죠? 최소 3년은 더 된 모델인데, 이게 한참 특가로 풀렸을 때 거의 무료였거든요. 이렇게 비춰 보면, 패턴은 니은.”

남자가 휴대폰을 비스듬히 불빛에 비춰 보이고 액정 위로 크게 ‘ㄴ’자를 그렸다.

“누가 니은으로 패턴을 쓰냐면, 자기 핸드폰을 아무나 열어 봐도 괜찮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숨길 게 없는 사람들이 그러거든요. 열어 보면, 역시 별게 없죠.”

남자가 능숙하게 화면을 넘기며 설명을 이었다.

“사진첩 보시면 친구들하고 찍은 사진도 좀 있고. 고양이 좋아하고, 여자친구랑 소소한 음식점에서 데이트하는 뭐 그냥 평범한 대학생?”

쓱쓱 지나가는 사진에는 친구들이 많았고, 커피 사진도 많았다. 길고양이 사진과 음식 사진도 보였다.

“특이 사항이라면 알람이 많더라고요. 알바를 많이 했나 봐요? 커피 사진도 라떼아트 연습한 걸로 보이고.”

알람 어플을 보여 주며 남자가 말했다. 시간을 쪼개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원을 다녔더라면서.

“메시지 어플은……. 직접 보시죠.”

문도는 낡은 휴대폰을 받았다. 메신저 어플을 누르자 몇 개의 대화방이 보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아혀니’와 ‘선우 누나’. 그다음으로 학과 단톡방, 친구들 단톡방.

별표가 붙어 있는 아혀니와의 대화방과 이선우와의 대화방에는 숫자가 떠 있었다. 읽지 못하는 이민우에게 보낸 메시지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선우와의 대화를 읽으려고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가 멈추었다.

이걸 누르면 숫자가 사라지겠지.

문도는 그 아래 ‘영김재’, 라고 쓰여 있는 대화방을 눌렀다.

“영김재, 그 사람이 김영재고요. 가끔씩 친한 친구 이름 뒤집어서 별명처럼 쓰는 사람들 있더라구요.”

다시 눈을 꿈쩍인 남자가 말했다.

“둘이는 꽤 친한 친구고, 김영재는 졸라 떨린다고 했고, 이민우는 꼭 거기 들어가야겠냐고 물었고요.”

묽게 탄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남자가 화면을 쓱 보곤 설명을 이었다.

“김영재가 룸서비스 시키면 니가 들고 올라와야 한다고 말했고, 이민우가 알겠다는 말도 했고. 그 뒤로 통화도 한 번 했고요.”

문도가 대화방을 거꾸로 읽어 올라가기를 기다린 남자는 2번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건 신형이라 풀기가 까다로웠다는 점 알아주시고요.”

남자가 패턴을 그려 보인 뒤 문도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같은 대화가 있고, 무수히 많은 대화방이 있었다.

김영재의 핸드폰을 대충 넘겨 본 문도는 두 개의 핸드폰을 다시 비닐로 된 지퍼 백에 넣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별로 할 것도 없었어요. 보수가 좋아서 위험한 일 아닌가 했는데, 이쪽이 더 감사하죠.”

남자의 인사를 받으며 문도는 다시 상가를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돌아와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최지상과 서유라의 핸드폰 옆에 이민우와 김영재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머리를 헤드레스트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서유라와 최지상의 핸드폰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다. 서유라를 병원에 넣기 전, 눈앞에 던져 주고 풀어 보라 했으니까. 그걸 직접 눌러 볼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천천히 눈을 뜬 문도는 최지상의 핸드폰을 들었다. 녹음 파일을 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듣다가 멈춰 놓았던 부분부터 다시 재생이 시작되었다. 이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친구 얼굴 한 번만 볼게요. 김영재, 아시죠? 영재 걔가 이거 시켰는데, 저한테 팁 진짜 많이 준다고 그랬거든요. 저 그 돈 받아서 여자친구 선물 사러 가야 돼요. 잠깐,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안 된다고 말하는 혀 꼬인 목소리는 서유라. 너 뭐야, 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남자는 최지상. 그리고 다시 이민우.

‘영재야, 김영재! 팁 준다며! 빨리 가지고 오라며! 어딨냐?’

‘씨발, 너 뭐야! 문 닫고 꺼져 이 새끼야!’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야, 정신 차려! 얘 왜 이래요? 김영재! 야! 너 왜 이래! 119 불러…….’

퍽, 하는 둔탁한 소리. 쨍그랑,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 쿵, 하고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 서유라의 비명 소리. 최지상의 욕설 소리.

녹음 파일은 밖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로 끝이 났다.

문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쓰디쓴 웃음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선우가 찾는 진실이 여기 있었다.

서유라가 숨겼고, 아버지가 도왔으며, 그가 외면했던 진실이.

바로 그의 손안에 있었다.

* * *

피식.

웃음이 술처럼 흘렀다. 아니, 실제로 술이 흘렀나. 어쩌면 침일지도. 문도는 손목의 안쪽으로 입가를 닦았다.

오랜만의 폭음이었다. 어지간히 마셔서는 취하지도 않는 체질인 까닭에 취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중간중간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지. 바 테이블에서 주차장까지 어떤 경로로 이동을 했는지. 기억은 점멸등처럼 깜빡거렸다.

후우.

문도는 긴 숨을 뱉으며 허리를 바로 세우고 휘청이는 땅을 디뎠다. 2층의 홀을 휘청휘청 가로지르며 뱀술 생각을 했다.

건강식품을 유난히 좋아하던 회장의 담금주 컬렉션은 보란 듯이 거실 한편에 장식되어 있었는데, 백사를 산 채로 담가 만든 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뱀이 움직이는 듯 보일 때가 있었다.

뻐끔, 하고 숨을 쉬는 것만 같고. 한 번씩 눈동자가 쉭, 움직이는 것도 같고.

내가 그 뱀이 됐네?

웃음 머금은 문도는 주머니를 더듬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집에 돌아왔으니 이선우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벨 소리가 근처에서 들렸다. 환청인가. 그렇다면 웰컴이지. 이제라도 하나씩 맛이 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도, 눈도, 입도, 코도, 진작 죄다 맛탱이가 가 버렸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눈에 담은 것도, 귀로 들은 것도 없게.

“전무님.”

앞에 이선우가 보였다. 홀에 있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오는 이선우는 흔들흔들 두 개였다가, 세 개였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는 그의 앞에 섰다.

“내가 전화를 했던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보면서 말했더니 선우가 그를 잡으며 알려 줬다.

“아니요. 아까 전화를 하셨다가 끊으셔서.”

“언제?”

“조금 전에요.”

이선우가 그랬다면 그런 거지. 문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깊이 숨을 마시고 길게 내뱉은 뒤 터벅터벅 걸었다.

중문을 활짝 열고 어두운 거실로 들어갔다.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다가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괜찮으세요?”

안으로 들어온 이선우가 물었다. 물어오는 이선우에게서 이선우 냄새가 났다. 씨팔, 너는 왜 냄새도 좋을까. 문도는 웃으면서 선우를 안았다.

“안 괜찮아.”

이선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머리를 묻었다. 흰 목덜미, 쇄골 윗부분의 옴폭하게 파인 부분에 코를 비비면서 숨을 마셨다.

숨을 크게 마셔도 이선우가 모자라서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그래도 모자랐다. 나란히 술에 담가지면 좋을 텐데.

이렇게 둘이서 꽉 껴안은 채로 술병에 들어가서, 평생을 취해서 나는 너를 쉭, 보았다가 한 번씩 숨이나 뻐끔뻐끔 쉬면서 살면. 이렇게 네 목에서 나는 냄새나 맡으면서 살 수 있으면.

문도는 술에 절여지는 생각을 하다가 우스워서 웃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이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걱정이 묻어 있는 게 웃겼다. 네가 내 걱정을 할 리가 없는데.

“지금이 몇 시죠.”

“새벽 3시요.”

“새벽 3시.”

문도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웃음을 쓰읍, 하고 닦았다. 술에 취했더니 웃긴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

“이선우는 새벽 3시에도 부르면 오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도가 선우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내가 이 짓거리를 하려고 불러도 오고. 오지 말라고 해도 오고. 그치?

함부로 더듬었더니 이선우가 아픈 소리를 냈다. 그래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해. 문도는 그게 또 웃겨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난다. 한숨처럼 웃은 문도는 선우의 뺨을 쥐었다. 호수처럼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네가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그래. 미칠 것 같아.

한 번 더 말하며 문도는 선우의 입술을 물었다.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우스워서 이선우의 입술을 물고서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문도의 발밑에 술처럼 고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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