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80화 (80/168)

80. 끝내주는 밤 @AW

중반을 넘긴 최지상의 드라마 ‘바람소리’가 연일 화제였다.

드라마 자체의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았는데, 민정원 역을 맡은 최지상의 주가는 날로 높아져 TV만 틀면 최지상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눈이 높다니까. 난 얘 진짜 잘될 줄 알았어. 이때까지 키운 보람 있다, 있어. 와, 게시판에 정원 선배 찾는 년들 왤케 많아. 기사 또 올라왔네.”

신선한 마스크에 요즘 보기 드문 순애보 역할을 잘 소화해 내서, 이름보다 정원 선배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진다는 기사를 유라가 소리 내어 읽었다.

다이닝룸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유라를 멍하니 보는데 아침에 보았던 서문도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인사 안 해요?’

‘잘 다녀오세요.’

선우가 인사를 건네자 피식 웃은 서문도가 그녀의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그렇게 말고.’

그럼 어떻게? 라고 생각하며 서문도를 보았을 때 입술이 포개졌다.

또 시작이라 생각하며 밀어내는데도 남자는 웃으며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선우는 뒷걸음질을 치다 벽에 막혔고, 남자는 기어이 그녀의 숨을 흩뜨려 놓았다.

‘이렇게 심장이 콩알만 해서 어디 큰일 하겠어요?’

다시 내려오는 입술을 막지 못했다. 누가 올까 봐 심장은 쿵쿵 뛰었지만 입술 사이로는 젖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발밑이 물컹거리는 것 같았고, 아랫배에는 뜨거운 물이 고여 드는 것 같았다.

‘이따 봅시다.’

머리를 흩뜨리며 했던 말. 그때의 그 눈웃음과 가벼운 미소.

“야, 봤냐고. 이선우, 뭐 해?”

서유라의 날 선 목소리가 선우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네?”

“이거 사진 봤냐고. 진짜 잘 나왔지? 정원 선배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 같으면 진짜 정원 선배 고른다. 남자 주인공보다 훨씬 낫지 않아?”

서유라는 최지상과 정원 선배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리뷰는 물론, 기사와 사진, 각종 커뮤니티를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디 프로필 다시 준비하실 거죠?”

선우의 질문에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해야지.”

“사진작가 스케줄 다시 잡아 놓을까요?”

“응. 다시 잡아 봐. 아, 정원 선배한테 전화는 언제 오는 고야. 금방 한댔는데, 왤케 안 와.”

서유라가 다시 통화를 해 봐야겠다며 거실로 나갔다. 선우는 토스트와 샐러드가 반절씩 남아 있는 접시를 개수대에 가져다 놓고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했다.

빈 접시는 수세미로 깨끗하게 닦고 물로 뽀득뽀득하게 헹구었다.

커다란 테이블도 닦고, 물기가 남은 아일랜드와 싱크대도 행주로 여러 번 닦았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 마음이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왜 이걸 선우 씨가 했어. 내가 할 일인데.”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으니 조리사 아주머니가 뒷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냥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서문도 생각이 자꾸 나기 때문이라는 말은 못 하고 머쓱하게 웃는 선우에게 조리사 아주머니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빈 반찬통을 챙겨서 돌아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선우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수시로 그녀를 찾는 서문도에게 자꾸만 익숙해졌다. 몰래 하는 도둑 키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난번 호텔에서의 난폭했던 잠자리에 대한 보상이라도 해 주듯, 남자는 부쩍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밤에는 한 번씩 거칠게 그녀를 안을 때도 있었지만 이내 다독이며 달래 주었다. 헤어질 땐 아쉽다 말했고, 만났을 땐 기다렸다는 듯 입술부터 삼켜 왔다.

‘자고 가면 좋을 텐데.’

지난밤, 아쉬워하며 입을 맞추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라 선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마음을 주면 안 돼.

그건 정말 안 돼. 한 번 더 질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어서 핸드폰을 찾는 것만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 * *

물소리가 들렸다.

문도는 방금 전까지 이선우가 앉아 있던 침대의 모서리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가 씻고 나오면 항상 이선우는 모서리에 옷을 쥐고 앉아 있었다.

허물 같은 옷으로 알몸을 가리고 욕실로 가서는 물을 튼다. 물소리는 항상 길었다.

때로는 욕조에 몸을 담가 가며, 때로는 샤워를 아주 길게 하며 이선우는 안쪽의 드레스룸을 칸칸이 뒤졌다.

많이도 아니었다.

하루에 네 칸, 많으면 여덟 칸. 매일 조금씩 꾸준하고 성실하게 여자는 서랍을 뒤졌다. 그 네 칸을 뒤지기 위해 기꺼이 그와 혀를 얽었고, 몸을 열었고, 쾌락을 견뎠다.

이미 죽고 없는 동생을 위해.

똑똑.

문도는 욕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바로 문고리를 돌렸다. 덜컥덜컥 소리가 나도록.

“이선우 씨, 잠들었어요?”

들어간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씻기도 버거운 시간을 주어 놓고 문도는 문을 퉁, 두드렸다.

안쪽이 조용하더니 찰박, 물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임이 가벼운 여자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아니요. 욕조에 있었어요.”

샤워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도 못하고 문을 열어 준 여자의 얼굴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얘기를 하지. 같이 들어갔을 텐데. 다음부턴 같이 씻을까요?”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는 여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런 점들이 문도는 못내 안타까웠다.

더 완벽한 가면을 써야지. 더 교묘해야지. 태연히 나를 가지고 놀아야지. 그래야 들키지 않지.

“다음에요.”

기껏 한다는 말이 다음이란다. 언제라는 약속도 하지 않는 여자에게 문도는 다시 물었다.

“다음에 언제.”

“다음에, 제가 준비가 되면.”

준비는 무슨 준비.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뒷목도 홧홧해졌다. 가까스로 대답을 하며 낯을 붉히는 이선우에겐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여기서 한 번 더 안을까, 그런 생각만 들 뿐.

“그래요. 준비되면 말해요. 기다릴 테니까.”

문도가 웃으면서 말하자 선우가 네, 그럴게요. 작게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문제였다. 이선우가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을 할 때마다 뜨끈한 무언가가 속을 훑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전무……님.”

널 한입에 삼키고 싶어지지.

“흣.”

문도는 선우의 말캉한 입술을 삼켰다. 살냄새와 치약맛과 단내가 얽힌 이선우의 입술을 빨았다가 벨벳 같은 혀에 자신의 혀를 마주 대었다. 쓱 훑을 때마다 이선우가 신음하며 그의 팔을 쥐었다.

입술을 뗀 문도는 벌어진 가운 사이로 고개를 내렸다. 물방울이 도르륵 굴러가고 있는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씹을 때마다 선우가 몸을 움찔거렸다.

숨이 넘어가는 신음 소리를 낼 때, 문도는 입술을 뗐다. 다리 사이에 손을 내려 안쪽의 물기를 확인하며 일부러 젖은 소리를 나게 했다. 선우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이런 건 싫어했던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선우를 보면서 젖은 소리를 계속 나게 했다. 두어 번을 그러다 아쉬운 듯 손을 뗐다. 이 정도에서 참아 주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가여운 이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리 와요.”

손을 이끌며 말을 하니 이선우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침대에 선우를 앉힌 문도는 협탁 서랍에 두었던 주얼리 박스를 꺼냈다.

“선물.”

문도는 여자의 눈앞에서 주얼리 박스를 열었다. 이선우가 멍한 얼굴로 반짝이는 목걸이를 보았다.

도톰하고 동그란 메달에는 자그마한 다이아가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달빛에도 반짝반짝 눈부신 빛을 냈다.

“아, 저는 이런 거……. 안 사 주셔도 돼요.”

“지난번 거는 너무 싸구려라.”

“저는 이게 마음에 들어요.”

가격도 얼마 되지 않는 실처럼 가느다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선우가 말했다.

그렇겠지. 부담이 없으니까.

“나는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이건 너무…….”

부담스러워요. 비싸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들을 삼키며 이선우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나는 네가 곤란해지길 원해.

받고 싶지 않은 것들을 받아야만 해서 마음이 무거워지길 원해. 족쇄 같은 목걸이를 차고서 스스로를 팔아 버린 기분을 느끼기를.

“사귀는 사이에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의 말에 이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믿지 못할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대체 뭐에 놀랐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문도는 더듬거리는 이선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희…….”

저희 뭐.

“사귀는 거였어요?”

처음엔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했다. 사귀는 거냐니. 당연한 걸 왜 내게 되묻지? 이제까지 본인이 연기한 것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을…….

헛웃음이 터져 나온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섹스 파트너였다. 이선우에게 서문도는.

사귀는 흉내조차 내려 하지 않는.

“그럼 뭐라고 생각했어요?”

문도는 매끄럽게 미소를 지으며 선우에게 되물었다. 머리가 뜨거워지니 생각은 차가워졌다.

“저는 그냥 이전처럼 돌아갔다고…….”

이전처럼 돌아가기 위해서 내가 그 염병첨병을 떨었다고. 웃음이 터졌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떼어지지 않는 너를 선택하면서, 내가 어떤 타협을 했었는데. 어떤 마음으로 다시 시작을 했는데.

결정을 번복해서 인생의 방향을 비트는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원칙을 부수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었다. 한낱 감정 앞에 무릎 꿇고 싶지 않았었다. 지고 싶지 않았었다.

감정을 인정하기까지, 그래서 모든 걸 내려놓기까지 나는 내내 너를 향해 있었는데.

그런데 너는 아예 그런 척을 할 생각도 없었다고.

시작도 끝도 없이 찰나의 순간에 몸이나 섞어 주고 이용이나 당해 주는, 이선우의 일회성 남자. 그게 자신이었다.

“이전이라면 돈 받고 몸 주는 그런 관계?”

노골적인 문도의 표현에 선우가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그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말을 고르는 선우를 문도는 기다렸다.

“전무님 곁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사이로요.”

그를 몇 번이나 흔들었던 이선우의 표정이었다. 도무지 거짓이라 보기엔 너무 진심인 표정. 이제는 알겠다. 그가 왜 속았는지, 어째서 마음이 흔들렸는지.

정말로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 이선우는 늘 진심이었다. 다만 생략된 몇 마디가 있을 뿐.

‘제가’와 ‘전무님’ 사이에 생략된 말.

‘동생의 핸드폰을 찾기 위해’.

이선우는 그토록 진심이었던 거였다.

“고작 그 짓이나 하자고 내가 계속하자고 했을까.”

그럴 거면 애초에 중단할 필요도 없었지. 부르기만 하면 올라와서 다리를 벌려 주던 너였는데. 문도는 비스듬히 웃으며 말했다.

“몰랐으면 이제라도 알아 둬요. 나는 이선우한테 진심으로 진심이야.”

문도가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선우가 난처함을 숨기며 애써 웃었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밤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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