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78화 (78/168)

78. 좋아한다며

물소리가 들렸다.

문도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모서리로 다리를 내리는데 마른침이 목구멍을 힘겹게 넘어갔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선우는 천천히 몸을 굽혀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샤워 가운을 주웠다.

온몸이 얼얼해서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끔찍할 정도로 길었던 정사였다. 그 끝이 오기는 할까 싶었던 잔인한 쾌락의 시간.

커피를 마시러 갈 줄 알았는데.

순진했던 자신의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다 그마저도 사그라들었다.

다정한 데이트를 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정사를 하게 될 거라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그냥 기본적인 코스가 있으니까. 밥을 먹고 커피 한잔 정도는 하고. 그러고 나서…….

막연히 늦은 시간일 줄 알았고, 별채의 침실처럼 어둡고 평범한 공간일 거라 생각했었다.

이렇게 환한 햇살 아래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의 쾌락 속으로 잔인하게 떠밀릴 줄은 몰랐지.

맹수 앞에서 찢어발겨진 먹잇감이 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씻어요.”

문도의 목소리에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욕실을 나오는 남자는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깨끗하고 차분한 얼굴로 물병의 뚜껑을 따는 남자는 낯선 사람 같았다. 비릿한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가늘게 웃던 모습이 방금 전이었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평정심을 찾을 수 있을까.

선우는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고 대답을 할 기운도 없었다.

한 걸음을 떼는데 아랫배 안쪽이 욱신거렸다. 물리고 빨려서 얼얼하게 부어 버린 부분들은 스치는 공기에도 예민하게 자극을 받았다.

“힘들어요?”

느리게 걷는 선우에게 문도가 물었다. 선우는 대답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물병을 손에 쥔 남자가 선우에게 다시 묻는다.

“씻겨 줄까?”

다정한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듣는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선우는 힘겹게 침을 넘긴 뒤 천천히 대답을 했다.

“아니요.”

소파에 걸쳐진 옷을 들었다. 커다란 대리석 세면대 위에 옷을 두고 샤워부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틀고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샤워를 한 뒤엔 세면대 한쪽에 올려 두었던 옷을 하나씩 입었다. 부어오른 부분들이 천에 쓸릴 때마다 아려 와서 숨을 고르며 속옷을 입고 스커트를 걸쳤다.

마지막으로 옅은 하늘색 블라우스를 들어 팔을 넣었다. 앞섶의 단추를 채우는데 손가락 힘이 풀렸는지 자꾸만 헛손질을 하게 되었다.

하아.

뜻대로 되지 않는 손놀림에 가벼운 한숨을 쉰 선우가 다시 천천히 단추를 여밀 때였다.

“잘 안 돼요?”

선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서문도와 눈이 마주쳤다.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는데 몸이 돌려지더니 서문도와 마주 보게 되었다.

문도가 단추를 쥐고 있던 선우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제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차분히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뼈가 굵은 긴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손등에 불거진 핏줄도 움직임을 따라서 꿈틀거렸다. 저 손가락이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자동으로 떠올라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위에서 두 번째 단추까지 잠근 문도가 손을 떼는 듯해, 선우는 눈을 떴다.

단추에서 떨어진 손가락이 옷깃 사이의 맨살에 닿는다. 문도의 검지손가락이 느리게 실처럼 가는 목걸이를 훑었다. 움찔 놀란 선우가 숨을 들이켜자 피식 웃었다.

“오늘 좋았어요.”

쇄골 사이에서 빛나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뗀 서문도가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태연히 웃고 있는 서문도가 선우에게도 묻는다.

“이선우 씨도 좋았나?”

그 말에 선우는 울컥 마음이 솟았다. 좋았을 리가 없잖아. 선우는 주먹을 쥐었다. 아무리 내쳐지면 안 될 처지라지만 이 말은 해야 했다.

“저는……. 저는 싫었어요.”

남자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이런 식은, 이런 식으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식?”

“너무, 날 것 같은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때려 붓듯이 퍼부어지는 쾌감은 정신을 놓게 했다. 수치심이 더해진 자극들은 선우를 헐떡이게 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남자는 샅샅이 파헤쳤고, 긴 시간 동안 선우는 무방비하게 허물어졌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가 버리던데?”

문도의 말에 선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건, 전무님이 저를…….”

뒷말을 잇지 못하는 선우를 보며 문도가 말했다.

“나 좋아한다며?”

선우의 입이 다물렸다.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익숙해져요. 이선우가 좋아하는 서문도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걸 무척 좋아하니까.”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태연히 던진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미소였다.

“저는…….”

익숙해지겠단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바닥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싫어요. 이런 건 싫어요.”

“뭐가 그렇게 싫었어요?”

물어보는 남자의 목소리가 꿀처럼 부드러웠다.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하고서 한참 서로를 보았다. 남자가 천천히 선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말했다.

“얘기해요. 뭐가 싫었는지.”

“너무…… 창피했어요.”

“더한 짓도 할 건데, 그땐 어떻게 감당하려고.”

놀란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문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에요.”

방금 전의 일들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달콤한 미소였다.

흠, 가볍게 한숨을 쉰 남자가 선우를 당겨 안았다. 커다란 손이 등을 감쌌다. 말없이 선우를 안고서 등을 다독였다.

남자의 품이 따뜻하게, 심지어 안전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 기막힌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선우는 그 품에 안겼다.

길쭉한 손가락이 선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어진다.

“참아 볼게요. 가끔은 못 참겠지만.”

살짝 입술을 뗀 남자가 말했다. 왠지 목이 메어 온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입술이 포개어졌다. 달콤한 키스에 취해 갈 때 문도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말했다.

“저녁은 고기 사 줄 테니까 많이 먹고.”

“네.”

선우의 대답에 서문도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선우도 비로소 웃어 줄 수 있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침실의 창으로 숙소동이 보인다. 문도는 창가의 윈도우 시트에 앉아 담뱃재를 털었다.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핸드폰을 들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보았다.

[고기 맛있게 잘 먹었어요. 운전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푹 쉬세요. 내일 뵐게요.]

메시지 아래에서 깜찍한 토끼가 꾸벅 인사를 한다. 문도는 무심한 눈으로 메시지를 보다가 화면을 바꾸어 명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가는 동안 건너편 숙소동을 본다. 2층 제일 가장자리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 네, 전무님.

“보내 주신 건 확인했고요. 내일 출근하시면.”

— 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건너편 숙소동을 향했다. 닫힌 블라인드 뒤로 선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선우에 대해 알아봐야 하는 것들이 아직 많았다.

“이선우 백그라운드 조사 새로 해 주세요. 부모님, 남동생까지 싹.”

— 네, 알겠습니다.

“남동생 사망 이후 이선우 행적, 재정 상태, 친인척 관계도 알아보시고.”

— 네.

그리고 또 뭐를 해야 하더라. 짧아진 담배를 한 번 더 마시고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문도는 말을 이었다.

“업체 하나 수소문합시다. 핸드폰 풀어서 보는 곳들 있죠?”

— 네. 알아보겠습니다.

문도는 은행 금고에 넣어 둔 네 개의 핸드폰을 떠올렸다. 사건이 있던 날 가지고 있는 게 안전할 거라며 장 변호사가 건네준 것들이었다.

한꺼번에 네 개의 핸드폰이 사라졌지만 경찰은 문제 삼지 않았고, 문도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었다. 압박과 뇌물을 동시에 써서 틀어막았겠지.

아버지와 장 변호사가 서유라의 치부가 될, 나아가 약점이 되고 목줄이 될 증거물을 외부에 공개할 리는 없었으니.

이선우가 찾고 있는 건 그중 하나거나, 모두이거나.

서유라를 거쳐 그에게, 더 나아가 최지상에게까지 접근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너무 뻔해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목표물을 향해 꾸역꾸역 돌진하는 이 여자는 속임수도 쓸 줄 모르고 자신을 가릴 줄도 몰랐다.

한 겹만 들추면 모든 게 탄로 나는 아슬아슬한 상황인데 이렇게 무모할 수가 있을까.

핸드폰이 별채에 있을 거라 믿는 그 순진함은 또 어떻고.

이미 한 번 서유라가 뒤집어 놓은 별채였다. 핸드폰을 찾겠답시고 그가 출장을 갔을 때 2층에 올라와 서랍을 전부 뒤집어 놓았다.

제 딴엔 다시 되돌려 놓는다고 정리를 한 것 같은데 그의 눈에는 난장판 그 자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서유라만큼 미련한 여자를 생각하며 문도는 웃었다. 애초에 별채에는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보고는 전부 메일로 바로 주시고요.”

— 네.

조사를 하다 보면 이선우가 서유라의 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명 실장도 알게 되겠지만 상관없었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핸드폰을 바꿔 들었다.

“회장님 뵌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 아, 네. 차 한 대 뽑아 놓으라 하셨습니다. 노란색 페라리로요. 박소영 씨께 선물할 거라고 비밀리에 준비하라고 하셨고요.

웃음이 나왔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첩 주제에 낭비하면 안 된다고 기어코 국산 차를 뽑아 주더니, 기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정 내며 무르고, 토라진 첩 달래 보겠다고 차값만큼 명품관에서 돈을 쓰고는 결국은 사 주겠다고.

그 유전자를 받았으니 내가 이 모양 이 꼬라지지. 칼을 쥔 여자가 턱밑까지 쳐들어온 줄도 모르고 절절하게 네가 좋다고.

끓는 마음으로 고백을 하던 자신을 생각하니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뿌리까지 흔들려 영혼을 바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명 실장의 인사에 이선우의 메시지가 겹쳐진다.

내일 뵐게요.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봐야지. 바라는 것 따위 쥐여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놓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시작은 이선우가 했으니, 끝은 그가 결정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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