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내가 가고 싶은 곳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선우가 계산대 앞에서 인사를 하니 빌지를 들고 있던 서문도가 고개를 까딱였다.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새삼스럽게 키가 큰 사람이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다른 손으로 빌지를 들고 있는 서문도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늘씬한 몸, 커다란 키,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과 특유의 무심하고도 오만한 표정.
남자는 자신이 선우에게 잡혀 주었다고 표현했다.
같이 잠을 자는 사이로 돌아간 것만으로도 이선우 네가 위너라는 시혜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는지 겉모습만 보아도 알 것 같긴 했다.
“오랜만에 나왔는데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가고 싶은 곳이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앞마당으로 가면서 문도가 물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어요.”
“가고 싶은 곳은?”
데이트랄 것까진 없겠지만 그래도 휴일 오후,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었다.
서문도가 선우를 위해 따로 시간을 빼서 일부러 만든 자리. 그러니 남자를 좋아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게 되면 어떤 걸 하고 싶을까.
멀리까지 가는 드라이브, 골목골목을 걷는 느린 산책, 우유 얼음이 곱게 갈린 팥빙수를 나누어 먹는 데이트, 그런 것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선우는 그냥 무난한 대답을 택했다.
“저는 아무 데나 괜찮아요. 전무님 가고 싶은 곳으로 갈게요.”
“나만 있으면 된다?”
“네. 전무님만 있으면요.”
습관이 되어 버린 말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서문도가 그 대답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타요.”
차는 부암동 언덕길을 부드럽게 내려갔다. 차창 너머로 북악산이 보였다.
하늘은 새파랗고 산은 푸르른, 그림같이 예쁜 여름날이었다. 뭉게구름은 선명한 하얀색이고 나뭇잎 사이를 통과한 햇볕은 길 위에 반짝이며 내려앉았다.
“햇볕이 달라진 것 같아요.”
선우는 운전을 하고 있는 문도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어디가? 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서문도가 선우에게 잠깐 시선을 돌렸다.
“습기가 걷혀서 그런지 가을 느낌이 나요. 말복이 지나니까 귀신같이 서늘해졌다고, 옥수댁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진짜 그런 것 같아요.”
선우의 말에 문도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데이트를 하는 동안 다른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 서문도 전무의 취향에 맞춰서 너무 낮추지 않으며, 어려워하지 않고 즐기는 건 또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날씨는 그림처럼 예뻤고, 만둣국은 맛있었으니까.
굳이 나와서 서문도 전무를 만나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던 것도 스르륵 잊혀진다. 조용하고 쾌적한 차 안에 앉아 아무런 생각 없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 전환이 되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풍경들을 눈에 담고 있을 때, 문도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 돌아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문도를 바라보았다. 흘깃, 선우에게 시선을 던진 문도가 말했다.
“이런 질문 무례한가.”
“아, 아니에요. 돌아가신 지는 4년 정도 되었어요.”
“사고?”
“네.”
흔한 사고라고 했다. 도로에 낀 얇은 얼음에 미끄러진 사고는.
모처럼 친구들과 제주 여행을 가는 엄마를 공항까지 바래다주러 아빠가 이른 새벽에 나섰던 날이었다.
며칠간 눈이 내렸다 녹았다를 반복했던 길이, 커다란 다리 밑을 지나는 그늘진 부분에 살얼음이 얼어서.
차는 여러 바퀴를 회전하면서 돌다가 앞서가던 대형 화물차의 뒤를 받았고, 뒤이어 속력을 줄이지 못했던 덤프트럭에 한 번 더 받쳤다.
즉사였다고 했다.
“힘들었겠네요.”
선우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힘들었어요. 사고의 책임이 전부 아버지에게 있었거든요. 그래서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었어요.
선우는 그 말은 하지 못하고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괜찮아요.”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군대 갔다고 했었나요?”
그 순간 선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긴장해서 서문도를 보는데, 핸들을 돌리는 남자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력서에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흐려서.”
이력서를 쓸 당시 동생에 대한 것까지 샅샅이 살펴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군복무 중이라고 썼었다.
운이 나빠 자세히 조사를 한다고 해도, 서류에서 탈락하는 것뿐이니 잃을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배짱을 부려 모험을 했는데 무사히 면접까지 마쳤다.
이번에도 그렇게 넘길 수 있어.
그냥 으레 하는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에 당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네. 군대 갔어요.”
“언제 나와요? 요즘엔 휴가도 자주 나오죠?”
선우는 침을 삼킨 뒤 목소리가 태연하길 바라며 대답했다.
“멀리 있어서요. 자주 나오지는 않아요.”
멀리 있는 군부대를 물으면 어떡하지. 아는 부대 이름이 하나도 없는데. 뭐라도 생각해 내려 애쓰다 보니 머리가 뜨거워졌다.
“동생 나오면 말해요. 휴가 줄 테니까.”
“네, 그럴게요.”
다행히 부대가 어디냐고 묻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어 주던 남자가 방향 지시등을 켜며 말했다.
“다 왔어요.”
신호가 바뀌고 차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커다란 건물 밑으로 들어간 차가 멈추어 서자 도어맨들이 보였다.
여기는…….
창문 너머 호텔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선우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고 싶은 곳.”
서문도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말해서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벽이 없는 방이었다. 유리로 된 창이 벽을 대신하는 방. 햇볕이 사정없이 들이치고 건너편 광화문의 빌딩과 서소문 거리가 경계 없이 보이는 방.
“제발.”
선우는 그 방에서 남자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너무 환했다. 너무 밝았고, 너무 적나라했다.
“그만……. 아흑.”
선우는 허리를 들면서 시트를 움켜쥐었다. 들썩이려 꿈틀거리던 허리는 허벅지를 꽉 누르고 있는 남자 때문에 파르르 떨리기만 할 뿐이었다.
“뭘 그만해.”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에 서문도가 있었다. 피식, 입김이 된 웃음이 젖은 살을 스쳤다. 선뜩한 느낌에 다리에 힘을 주는 찰나, 뜨겁고 두툼한 무언가가 선우를 핥아 올렸다.
“아읏.”
첫 번째 정사로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곳이 흡착되어 뭉개졌다. 뇌리가 터질 것만 같은 잔혹한 쾌감에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에어컨이 만들어 낸 서늘한 공기와 남자의 뜨거운 혀가 감각을 어지럽혔다. 감은 눈 속에서도 빛은 밝아 세상이 온통 강렬한 주황빛이었다.
“전무님.”
아, 소리를 내는 선우의 목이 하얗게 휘어졌다. 부탁을 할 때마다, 그만하라고 애원을 할 때마다 남자는 그 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더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싫……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쾌감이,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까 봐 무서운 쾌감이 무자비하게 선우에게로 퍼부어졌다.
“싫어……요. 그만해…….”
이런 것일 줄 몰랐다. 엉겁결에 호텔에 들어와 먼저 샤워를 하고 어색하게 나왔을 때만 해도 남자는 담담해 보였기에.
투두둑. 협탁 위로 여러 개의 콘돔을 흩뿌리듯 놓았을 때 알았어야 했을까. 블라인드를 내려 달라는 말에 빙그레 웃으며 싫다고 했을 때 알았어야 했나. 대낮부터 호텔에 들어왔을 때 짐작했어야 했을까.
젖은 살을 빠는 소리가 난잡하게 방을 울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이런 건 싫었다. 햇살이 밝아서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정사는 이에 비하면 다정했던 거였다.
잔인한 자극이 계속되었다. 때리듯 퍼부어지는 쾌감에 선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아니야. 아닌 것 같아.
아래에서부터 쭉 뻗어 올라온 커다란 손이 선우의 가슴을 쥐었다. 정점이 눌리는 동시에 예민한 살점이 잘근 씹혔다. 불이 번쩍하고 눈앞에서 터지는 느낌에 선우는 결국 긴 소리와 함께 허리를 뒤틀었다.
“뭘 했다고 벌써 가.”
쾌감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선우의 몸이 주륵 아래로 끌려갔다. 상체를 세우고 앉은 문도는 선우의 다리를 쭉 당겨 제 허벅지에 올리고 가느다란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제게로 단숨에 당겼다.
아읍.
선우의 목이 다시 한번 하얗게 휘었다. 푸른 정맥이 보이는 흰 목덜미를 보며 문도는 한숨처럼 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눈이 뜨겁게 끓으며 마음이 풀어지려 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대충 가린 이선우가 가여워서. 햇살이 얼룩진 하얀 몸이 한 줌이어서. 붉게 흐트러진 이선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서,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뭘 했다고.
고작 호텔에 데려와 벗기고 몸을 탐하는 게 그가 생각한 한심한 복수였다. 그 와중에도 이선우가 최지상의 여자는 아니었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호구 새끼는 그것부터 확인을 했다.
너는 침대에서도 거짓이었을까.
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이미 죽은 동생을 위해 낯선 남자에게 몸을 던졌나. 내가 아니었어도, 그 누가 되었어도 이럴 생각이었나.
내가 나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찾는 무언가를 가진 남자라서 기꺼이 다리를 벌렸던 걸까.
허리를 쥐고 사정없이 몸을 밀어 넣을 때마다 선우가 흐느꼈다. 쿵쿵 몸이 부딪힐 때마다 반쯤 허공에 들린 선우의 몸이 춤을 추듯이 흔들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시트를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허우적거리며 베개를 쥐는 모습도 보였다. 마침내는 그 베개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리는 것도 본다.
문도는 허리 짓을 하는 자신이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천박한 개새끼 같다고. 그럼에도 몰아붙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선우가 원치 않는 절정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붉은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길게 흘러내리는 것을 무감하게 바라본 뒤 문도는 선우의 몸을 뒤집으며 말했다.
“허리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