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스릴 있겠네
만둣집은 부암동 꼭대기에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선우는 커다란 소나무가 지키고 있는 2층의 양옥집을 바라보았다. 고재나무로 만든 간판이 있었고, 안쪽 정원으로 들어가는 긴 산책로가 보였다.
[1시, 다온 손만두.]
선우는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서문도가 보내온 메시지에는 만둣집의 위치가 나와 있는 웹사이트 링크가 걸려 있었다.
굳이 밖에서 따로 식사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선우는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밤에 2층으로 올라오라고 불러 주지. 작게 한숨을 쉬며 선우는 산책로를 걸었다. 안쪽으로 보이는 너른 마당에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위치적 특성 때문에 대체로 차를 타고 오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정갈하게 정리된 마당을 걷는 사람은 선우 혼자였다.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으로 별채로 들어갔던 날이 생각난다. 마당이 넓고,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이 흰색이어서일까.
2층 어딘가에서 서문도 전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물 앞까지 다가가니 서문도의 차가 보였다. 선우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건물 위로 높이 솟아 있어서인지 볕이 하얗게 보이며 눈이 시려 왔다.
“어서 오세요. 혹시 예약하셨나요?”
가정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개량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다.
“네. 1시, 서문도 씨로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일행분 안쪽에 계시네요. 2층, 6번 방입니다.”
선우는 고풍스러운 난간을 가진 목재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이 나오고 몇 개의 방이 보였다. 열려 있는 방문을 훑는데 서문도의 모습이 보이는 방이 있었다.
창을 등지고 식탁에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선우는 살짝 묵례를 하며 걸음을 걸었다.
“앉아요.”
서문도가 선우의 물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일찍 도착하셨나 봐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선우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1시가 몇 분 남은 시간이니 선우도 늦은 건 아니었다.
“조금.”
짧게 대답한 문도가 선우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물잔을 선우의 앞에 놓아주고 메뉴판을 건네준 뒤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만둣국 하나 하고. 이선우 씨는?”
“같은 걸로 할게요.”
선우는 메뉴판을 열지 않고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문도가 주문을 마저 했다.
“만둣국 두 개하고 녹두전 하나 주문하겠습니다.”
“네.”
종업원이 빌지에 주문 내용을 적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 나가실 때 문 좀 닫아 주시고요.”
“네.”
종업원이 나가며 방문을 닫았다. 옆 테이블이 비어 있어서 둘만 남겨졌다.
적적한 공간에 둘만 남자 살짝 어색해진다. 그러고 보니 환한 낮에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선우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맞은편의 창문을 보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부암동이 내려다보였다.
“여기 와 봤어요?”
문도가 물었다.
“아니요. 처음이에요. 경치가 좋네요.”
“만두도 맛있어요. 내 취향이야.”
문도가 싱긋 웃었다. 취향이라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네, 하고 선우는 대답을 했다.
그런 뒤에도 남자는 태연한 시선으로 선우를 보고 있었다. 선우는 애꿎은 식탁만 내려다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우는 별채가 아닌 곳에서 그와 마주 앉게 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수저가 아직 놓이지 않은 것을 깨닫고 수저통으로 손을 뻗었다.
수저통을 여는 선우의 손을 서문도가 가볍게 저지했다. 선우는 눈을 들어서 문도를 보았다. 남자가 선우의 앞에 수저를 나란히 놓아주었다.
자신의 앞에도 놓고, 작은 종지에 간장도 따랐다. 동작이 세련되고 매끄러웠다.
“너무 낮추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수저 놓는 게 뭐 그리 낮추는 일이라고.
“끈질긴 이선우한테 내가 잡혀 줬잖아. 이선우 씨가 위너야.”
남자는 매끈하게 웃었지만, 선우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을 뿐이다.
이런 위너가 어디 있을까.
“그런가요?”
되묻는 선우를 보면서 서문도가 미소를 지었다.
“즐겨요. 어려워하지 말고. 뭐든 다 해 줄 테니까.”
또렷한 눈동자가 선우를 향해 있었다. 밝은 햇살 아래 남자의 눈빛은 사람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직선이었다.
“뭐든지요?”
“뭐든지.”
그럼 내 동생 핸드폰, 그거 돌려줘요. 선우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볼게요. 감…….”
감사합니다, 인사가 자동으로 나오려고 해서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서문도가 피식 웃으며 물잔을 들었다. 때마침 방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다가왔다. 만둣국이 나와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선우는 숟가락을 들었다.
* * *
명 실장이 보내온 메일은 한 줄이었다.
‘서류와 다르게 이선우 씨 남동생 이민우 씨는 사망으로 나옵니다.’
모든 것을 하나로 관통하는 문장이었다.
그 메일을 보는 순간 문도는 이선우가 왜 최지상을 만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끈질기게 자신에게 접근했던 이유. 서유라의 만행들을 견뎌 내며 이 집에 붙어 있어야만 했던 이유.
그 이유가 저 한 줄에 들어 있었다.
최종 확인은 아침에 회사에서 했다. 장 변호사에게 건네받았던 경찰 측 최종 파일을 열고 사망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민우.
그 모든 모순을 꿰뚫는 하나의 화살. 그림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
이선우와 이민우.
“괜찮아요?”
문도는 반으로 가른 만두를 입에 넣는 선우에게 물었다.
“맛있어요.”
선우가 대답을 했다. 기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저 맑고 연한 얼굴이라니.
이토록 긴 시간 그를 속여 온 여자는 거짓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 할 것처럼 선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이네. 많이 먹어요. 부족하면 더 시키고.”
그의 말에 선우가 말없이 웃었다. 마치 회사의 상사에게 웃어 주는 직원처럼. 그리고는 담담히 만둣국을 먹는다. 차라리 식사를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얼굴로.
그 순간 문도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선우는 한순간도 자신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그 긴 시간 내내 여자는 단 한 순간도, 그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왜 몰랐을까. 이렇게나 선명한 것을. 문도는 뜨끈한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 이상하다 했지. 너는 앞뒤가 맞지 않았어. 네가 하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모두 다른 사람 같았는데.
돈 때문에 견디는 거라고 했던 여자와 서유라를 돌보는 일에 이상할 정도로 사명감을 가졌던 여자.
남자의 침대로 몸을 내던지는 여자와 잠자리에 소극적이고 서툴렀던 여자.
그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보고를 하던 여자와 좋아한다고 절절한 고백을 하며 매달렸던 여자.
그렇게나 모순적인 모습을 내내 보여 왔는데 몰랐다.
아니, 몰랐던 게 아니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그 모습에 꼴려 했었지. 주체 못 하고 꼴려 있다가 잠자리 한 번에 아주 그냥 눈이 돌아 버렸고.
서문도, 이 역대급 호구 새끼는 상등신이기도 해서 의심을 하기는커녕 그 사이의 간극에 그저 몸이 달아 욕정만 채우고 있었던 거였다.
욕정만 채웠으면 다행이게. 결국은 순정도 바쳤지. 네가 어떤 여자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문도는 실소를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나와서 데이트하는 거 어때요?”
문도는 국물을 떠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짐작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만 이선우랑 편하게 만나고 밥도 먹게, 서유라 내보내려고.”
선우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는 것을 문도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굳어진 표정과 당황한 눈동자를 보니 이선우는 그리 대단한 사기꾼도 못 되는 여자였다. 속은 사람이 등신일 뿐.
“어, 저는. 저는 지금도 괜찮아요.”
“서유라 나가 살라고 하고, 이선우 씨 앞으로 집 하나 해 줄게요. 이선우 씨 집은 둘이 지내기엔 좁아서.”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진짜로요.”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되는 거겠지.
별채에서 내쫓으려 하니 절박해지는 이선우를 보는데 웃음만 나왔다. 문도는 녹두전을 찢으며 선우에게 말했다.
“돈이 문제라면, 학원 하나 차려 줄 테니까.”
태연한 문도의 말에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하기 싫으면 그냥 쉬면서 지금처럼 월급으로 받아 가도 좋고.”
문도는 조각낸 녹두전을 선우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너무…….”
“너무 뭐?”
스폰 관계 같다고? 몸 파는 여자 같다고? 이제껏 그 연기를 그렇게 펼쳐 놓고 새삼 무엇이 달라서?
“그렇게까지 도움 주지 않으셔도 돼요. 전무님께 그런 식으로 돈 받고 싶지 않고요, 유라 씨 일도 계속하고 싶어요.”
“뭐 하러. 힘들기만 한데. 서유라 보는 게 보통 일인가? 내 옆에 있고 싶어서 했던 일이니까, 이제 그만둬도 되잖아요?”
이선우가 어렵게 침을 넘기는 모습을 보며 문도는 다정하게 말했다.
“내 여자 힘든 거 나는 싫은데.”
“힘들지 않아요. 유라 씨랑 같이 있는 거 힘들지 않고, 좋아지는 모습 보면서 책임감도 느끼고요.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 뒤의 말은 무엇이 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도는 선우를 보았다. 선우가 그의 눈을 보면서 답했다.
“그렇게 되면 전무님 매일 뵐 수가 없어서요. 지금은 매일 밤마다 만날 수 있고, 가까이에서 뵐 수도 있으니까요.”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문도는 크게 웃었다. 이선우의 얼굴이 그렇게 진심일 수가 없었다.
“그럼 그냥 이대로 숨어서 연애나 할까요?”
“네. 저는 그러고 싶어요.”
문도는 웃음이 남아 있는 얼굴로 선우를 보았다.
이 여자는 자신이 방금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너는 그렇게 하자고 했어야 했다. 서유라 일은 그만둘 테니 학원을 차려 달라고 했어야 했다. 숨어서 하는 연애는 그만하고 커다란 집을 얻어 우리 둘이 편하게 만나자고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눈감아 주었을 텐데.
너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전부 잊어 주었을 텐데.
기꺼이 역대급 호구 새끼 노릇을 이어 갔을 텐데.
“스릴 있겠네.”
문도는 웃으며 대답했다.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