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7월 보고서
“7월 보고서입니다.”
명규진이 문도에게 노란색 파일을 내밀었다.
문도는 서재 책상에 걸터앉아 파일을 받았다. A4용지 속 간단한 서식의 투박한 표에 최지상의 동선이 날짜별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주로 문경 촬영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일전에 터졌던 스캔들은 최지상 소속사가 언론에 발표한 대로 오해였고요.”
문도는 서유라가 죽겠다고 난동을 피웠던 날을 기억했다. 이선우의 팔에 길게 상처가 난 날이기도 했다.
눈이 뒤집혔던 날. 그래서 이선우를 잘랐던 날.
그날을 생각하며 최지상의 행적을 눈으로 읽었다. 간결했다. 문경 촬영장. 모텔. 술집. 모텔. 촬영장. 그러다 어느 한 줄에 시선이 멎었다.
서울. 한남동 묵밥집. 신원 미상의 여자.
문도의 시선이 그 줄에 머물렀을 때 명규진이 말했다.
“최지상이 이선우 씨를 만났습니다. 뒷장에 사진 첨부했습니다.”
순간 문도는 눈을 좁혔다. 꿈틀하고 핏줄이 움직였다.
한 장을 넘기니 방금 전 거실에서 보았던 여자가 거기 있었다. 그리 좋지 않은 화질의 사진 속, 깊게 모자를 눌러쓴 최지상의 뒤에.
문도의 시선이 잠시간 선우의 얼굴에 머물렀다. 왜, 라는 간단한 질문을 던진 뒤 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에 두더지 잡기 게임이 생각났다. 이선우가 최지상을 왜 만났는지를 추측하는 이런저런 가정들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문도는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생각을 지웠다. 모두가 섣부른 추측들이지.
“왜죠.”
문도의 짧은 질문에 명규진은 답했다.
“정확한 사실은 아직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서유라 씨의 심부름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알아볼까요?”
최지상이 이선우를 통해 서유라에게 약을 건넸을 것이라 명규진은 추측하는 듯했다. 이 가정은 설득력이 없다. 서유라는 외출이 자유로우므로.
서울까지 올라온 최지상이 약을 전달하기 위해 서유라를 제치고 이선우만 만났을 리 없다.
문도는 사진 속 최지상의 미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들었다.
“우선.”
명규진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
“최지상과 이선우가 과거에도 만난 적이 있었는지 알아봐 주시죠. 그러니까, 이선우가 여기 취직을 하기 이전에. 그리고 8월에도 두 사람이 따로 만난 일이 있는지 체크해 주시고요.”
“네.”
“전에 이선우 면접 볼 때 올렸던 고용계약서 있죠?”
“네.”
“백그라운드 체크되었죠?”
“네. 뒷장에 첨부했었습니다.”
쓱쓱 사인을 했던 자신의 모습이 기억난다.
이력을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명 실장 선에서 백그라운드를 체크하고 최종 면접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이선우가 며칠 안에 그만둘 사람이라 생각해서 대충 눈으로 훑고 넘겼었다.
“메일로 다시 보내 주시고.”
“네.”
한 가지 가정으로 생각이 자꾸 모여들었다. 최지상의 미끈한 얼굴. 은밀한 만남.
이선우는 최지상의 휴대폰을 찾으러 온 그의 여자일까. 피가 싸늘히 식어 가는 기분이지만 일단 판단은 보류했다.
“최지상 여자관계 알아봐 주시고요.”
“네.”
마지막 말은 할까 말까 잠깐 생각했다가 입을 열었다.
“이선우 남자관계도 체크하세요.”
“네.”
“따로 연락할 것 없이 알아보는 대로 바로 메일로 보내시고요.”
“고용계약서는 회사 복귀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문도는 명 실장에게 물었다.
“바로 회사에 복귀하시나요?”
“아뇨, 회장님께서 찾으셔서 잠깐 뵙고 갑니다.”
“용건은요?”
“아직 모르고요, 뵈면 알게 될 것 같습니다.”
명 실장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서재를 나갔다. 문도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창문 너머의 후원을 바라보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바람이 없는 서재에서 연기는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다 어느 순간 구름처럼 퍼졌다. 흰색의 연기가 공기와 섞여 사라지는 모양새를 보면서 천천히 담배를 태웠다.
올라간 담배 연기는 이선우의 여러 모습들이 되어 그를 둘러쌌다.
보고를 하는 이선우. 서유라를 감싸던 이선우. 정원을 건너는 이선우. 그를 보던 이선우. 다리를 벌리는 이선우. 최지상의 뒤에 있던 이선우.
아직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판단은 모든 자료들이 모였을 때 하겠노라고.
* * *
선우는 2층의 난간에 서 있는 서문도를 바라보았다.
난간에 팔을 걸친 서문도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금은 무심한 표정으로 구경을 하듯이 아래를 본다.
이내 선우는 가방을 들고나온 유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서문도가 지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갔다.
“어때, 둘 중에 어떤 거 팔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서유라는 유행 지난 가방을 팔아야겠다며 옷장을 뒤엎었다. 카드만 주고 현금은 주지 않는 부회장 부부 때문에 이런 식으로 현금을 마련한다고 했다.
“아씨, 이거 구하기 힘들었는데. 한정으로 VIP 고객한테만 나온 거라서 몇 개 없는 거거든. 넘 귀엽지?”
손바닥만 한 미니백 세 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서유라가 말했다. 선우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우 씨.”
난간에 서 있던 서문도가 선우를 불렀다. 서유라도 고개를 들었다. 서문도를 보곤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내려서 입을 삐죽거렸다.
“네, 전무님.”
“내일 쉬죠?”
“네.”
“고모님 심심하겠네.”
그 말에 서유라가 혀를 내밀고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퇴근이 6시죠?”
“네.”
2층의 서문도가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보고하러 올라올 필요 없어요. 시간 되면 퇴근하고, 가서 쉬어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2층을 올려다보던 선우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날엔 시시때때로 잘만 불러올리더니 왜 하필 시간 많은 오늘은 왜 올라오지 말라는 건지.
“네.”
서문도가 빙그레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는데 마음이 일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선우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서유라도 있어서 뭐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정 못 하겠다. 일단 얘는 킵. 대여섯 개는 팔아야 돈이 좀 되는데. 엄마가 미국에서 사 왔던 거 그거부터 팔까?”
왜 들어가지 않는 걸까.
아직도 서문도가 2층의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위에서 드리운 그림자에 신경이 쓰여서인지 서유라의 말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야, 나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서문도가 있어서 거실에서 담배를 피지 못하는 서유라가 속삭였다.
“저는 커피 한 잔만 마실게요.”
“어 그럼 나두. 아이스로 내려 줘.”
네, 대답을 하고 선우는 짧게 위를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느껴져서 아직 그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서문도는 없었다.
* * *
“전무님 주말에 집에서 쉬는 거 보니까 좋네요. 물막국수에 민어전 했어요.”
건너온 장 여사가 저녁을 차려 주며 말했다. 문도는 자리에 앉으며 건너편의 빈자리를 보았다.
“서유라는요?”
“아직 저녁 전이신데 샐러드만 드시겠대요. 전무님 드시면 차려 주려고요.”
“잠깐 불러 주세요. 비싼 민어전 맛은 봐야죠.”
6시를 넘겼으니 이선우는 퇴근을 했다. 문도는 자리에 앉아 서유라를 기다렸다. 쿵쾅대며 나온 서유라가 왜 불렀냐는 표정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여사님, 자리 좀.”
문도의 말에 장 여사가 서유라 앞에 앞접시와 젓가락을 놓아주고 주방의 뒷문으로 나갔다. 싸하게 고요한 공기가 다이닝룸을 감돌았다.
“드세요, 고모님.”
서유라가 계란물을 입혀 노랗게 부쳐 낸 민어전을 흘깃 보더니 픽 하고 고개를 돌렸다.
“너나 먹고, 용건이나 말해.”
문도는 민어전을 집어 엷게 만든 소스를 찍으며 물었다.
“최지상 만날 때 약 하는 거, 이선우가 알아요?”
“허. 무, 슨. 야아악?”
서유라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거짓말을 할 거면 눈깔을 흔들면 안 되지. 참 발전이 없는 인간이었다.
“본론으로 갑시다. 약 하는 거 아냐고.”
“나 걔 안 만나거든?”
또 못 알아듣고 딴소리를 한다. 이런 인간과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마주 앉아야 한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었다.
“내가 몰라서 물을까?”
문도는 서유라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실금 같은 웃음을 웃자 서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알면서 왜 물어보는데? 다 알면서 뭐 하러 묻냐고! 그래, 나 최지상 만난다, 어쩔래!”
“질문을 왜 여러 번 하게 하지? 약 하는 거 이선우가 아냐고 물었을 텐데.”
“아씨, 걔가 어떻게 알아!”
흠. 문도가 가볍게 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건 왜?”
눈을 둥글리며 서유라가 물었다. 문도는 민어전을 입에 넣고 씹었다. 초조해진 서유라가 다리를 떨었다.
“이선우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서.”
“무슨 거짓말?”
“고모님 약 안 한다고 하길래. 뒤로 약 하는 거 도와주면서 나한테는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잘라야지 않겠어?”
서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걔는 모르지. 아, 아니. 나 약 안 하거든? 무슨 쌉소리야. 진짜 웃겨. 왜 아무 죄도 없는 애를 잘라? 자르기만 해!”
핸드폰에 메일 알람이 떴다. 명 실장이었다. 문도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진짜 걔는 모른다구!”
서유라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2층으로 올라왔다. 노트북을 켜고 화면을 클릭했다. 이선우의 고용계약서였다.
이름 : 이선우
나이 : 28세
학력 :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력 : 국립발레단, 지젤발레학원
가족관계 : 부, 이장명, 사망
모, 정혜숙. 사망
제, 이민우. 군복무 중
출력을 해서 책상 위에 놓고, 왼쪽부터 차례로 훑었다.
스케줄러에서 출력한 7월 첫째 주 금요일 스케줄. 한 탐정의 7월 보고서. 최지상과 이선우가 차례로 나오는 사진. 이선우의 고용계약서.
금요일의 스케줄은 사장 주재 임원 회의. 태정 모비스 미팅. 이노베이션 포럼 준비. 나란히 놓인 네 장의 서류 위로 그날,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무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병원은 잘 다녀왔냐고 이선우에게 물어보는 자신의 모습이 영상처럼 보였다.
드레스룸이었고, 이선우는 진열장 앞에 있었다. 거기서 무얼 하냐는 자신의 질문에 당황했던 표정을 지우면서 대답을 했었다.
‘그냥……. 구경했어요.’
‘무슨 구경.’
‘넥타이랑 시계랑.’
이선우.
‘전무님이요. 저는 그냥 전무님이 필요했어요.’
이선우.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아주 잠시라도 좋아요.’
이선우.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새 메일이 날아왔다. 명규진이었다. 내용은 한 줄.
‘좋아해요, 전무님.’
씨발, 이선우.
문도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