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불안의 이유
모처럼 여유가 있는 토요일 오전이었다. 일부러 만든 여유이긴 하지만.
“네, 여사님. 별채인데요, 유라 씨가 점심으로 비빔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서요.”
1층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문도의 귀에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문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버린 지 오래인 커피였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네. 아, 잠시만요. 유라 씨 요구 사항이 따로 있는데요, 고추장은 넣지 말고 식초랑 간장, 고춧가루, 설탕……. 아니다. 여사님 제가 잠깐 들를게요. 네. 금방 가요.”
둘이서 유튜브를 보니 마니 왔다 갔다 거리더니 결국 그 먹방인지 무엇인지를 보았나 보다. 영상에 나온 비빔국수가 그렇게 먹고 싶다는 서유라의 요청에 선우가 나선 듯했다.
“유라 씨 저 잠깐 숙소동에 다녀올게요. 아주머니께 아까 그 영상 보여 드리고 올게요. 네. 금방 다녀올게요.”
게스트룸으로 간 이선우가 서유라에게 이야기를 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 거실로 나왔다. 손에는 태블릿 패드를 들고 주방의 뒷문으로 향하였다.
“이선우 씨.”
문도는 소파에 앉은 채 고개만 꺾어서 선우를 불렀다. 거꾸로 보이는 이선우가 멈칫 뒤를 돌았다.
“잠깐 이리로.”
회사에 가지 않은 이유를, 2층의 서재에서 해도 되는 일을 1층 거실까지 끌고 내려온 이유를 정녕 모르나.
노트북 펼쳐 놓고 두 시간 남짓 설렁설렁 일을 하고 있는데, 이선우는 그를 샥샥 잘도 피해 다녔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고개 숙여 묵례를 건넬 뿐이다. 어쩔 땐 못 본 척 지나기도 했다.
“먹고 싶은 거 뭐 있어요?”
“네?”
“뭐 좋아하냐고. 내일 점심 같이하려는데, 예약을 해 둘까 싶어서요.”
물어보는데 답은 안 하고 주위만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고. 없으니까 물어보지. 뭘 다시 확인을 해.
“저는 다 괜찮아요. 전무님 드시고 싶으신 걸로 고르시면 될 거 같아요.”
선우의 얼굴에 빨리 대화를 마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문도는 피식 웃으며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아니이, 나 말고 이선우 씨요. 이선우 씨가 먹고 싶은 거 말하라고요.”
하아. 선우는 돌아서려다 다시 멈칫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든 태블릿 패드를 움켜쥐고 게스트룸 쪽을 보았다.
서유라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 거기다 조리사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저는…….”
빤히 보는 서문도 때문에 생각이 흐려졌다. 아까부터 거실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신경이 쓰여서 자꾸만 헛손질을 하게 되었다.
서유라가 불러도 잘못 알아들었고, 흘깃 쳐다보다 물을 흘리기도 했다.
넓은 2층 두고 왜 여기서 이러는 건지. 왜 굳이 바깥에서 뭘 먹자는 건지. 그리고 아무거나 먹으면 될 걸 메뉴까지 고르라고 하는 건지.
이러다 정말 들키면 어쩌려고.
선우는 한숨을 삼키며 방해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고 생각할 때였다. 문득 외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김치만두가 생각이 났다.
“만두요. 만두 좋아해요.”
선우의 말에 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잠깐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얼른 걸음을 돌렸다.
문도는 핸드폰을 들고 주방 뒷문을 열고 나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가끔씩 가는 만둣집이 하나 있어 검색을 하는데 화면이 사라지더니 전화가 왔다. 명 실장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 전무님, 명규진입니다.
“네.”
— 어제 한 탐정님 만나 자료 받았습니다. 월요일에 뵐까 했는데 조찬 모임 참석하시는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 시간 언제쯤 괜찮으실까요?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나. 문도는 창 너머 푸른 정원으로 시선을 두며 명 실장에게 대답을 했다.
“오후에 시간 됩니다. 집으로 오세요.”
— 네, 그럼 이따 4시 정도 괜찮으실까요?
“괜찮습니다.”
—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만둣집에 전화를 걸었다. 오후 1시. 예약을 잡으며 문도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볕이 두껍고 진했다. 이 자리에 앉은 이선우는 늘 이 햇살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겠지.
낮에는 집에서, 더군다나 1층의 거실에서 지낼 일은 거의 없어 서유라가 뭐라 지껄이던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음이 쓰인다.
블라인드를 달아 볼까.
보는 앞에서 태연히 블라인드를 내리면 이선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진다.
* * *
똑똑.
최지상은 카페의 미팅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스터디나 미팅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격리된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희준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지상 씨, 어서 와. 요즘 아주 난리도 아니던데. 앉아요.”
정희준은 지상파 방송국의 예능 프로 메인 PD였다. 드라마 ‘바람소리’가 온에어되면서 프로그램 홍보 차원에서 토크쇼 출연 스케줄이 있었는데, 오늘 따로 만나자는 요청이 있어 나온 참이었다.
“예, PD님. 잘 지내셨죠.”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먼저 시켜 놨는데 괜찮죠?”
“그럼요. 잘 마시겠습니다.”
바람소리의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들과 토크쇼 녹화는 벌써 떴고, 방영일은 다음 주 화요일이었다.
“지상 씨가 토크가 좀 되더만. 센스가 좋아. 편집하는데 지상 씨 컷을 많이 살리게 되더라고.”
“하하. 전 그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요.”
메인 PD가 따로 만나자 하고, 만나서 칭찬을 할 때는 프로그램 섭외 시도가 있기 마련이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잘 보이려 노력했겠지만 지상은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바람소리로 아주 빵 떴어. 정원 선배 인기가 어마어마해. 얼마 전에 유성 전자 컬러풀 시리즈 광고도 계약했다며.”
“아, 하하. 아니에요, 뭐 그냥 단발로 3개월짜리. 잠깐인데요.”
PD 앞에선 겸손을 떨고 있지만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성 전자는 국내를 넘어선 세계적인 기업이었다. 게다가 유성 전자 광고는 세련되고 감각적이기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 광고에 짧게나마 출연을 했다는 건 현재 가장 핫한 인물이라는 뜻이고, 광고 계약이 성사되는 순간 여기저기서 물밀듯이 출연 섭외가 들어왔다.
“이 사람아, 너무 겸손해도 안 되지. 자랑할 건 해야지.”
껄껄 웃는 정희준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런데 PD님, 오늘 보자고 하신 건.”
“스타 다큐 한 편 찍읍시다. 어때요?”
지상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다 꾹 다물어졌다. 그러나 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저었다.
“제 주제에 무슨요. 주인공인 민혁 선배도 있고 은지 씨도 있는데. 전 아직 스타라기엔. 하하, 아이고 민망하다.”
지상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이거 왜 이래. 소문 다 났어. 이번에 넷피아 뭐야, 그거 이강옥 작가 거 주인공 땄다며.”
“아니에요. 아 왜 또 소문이 그렇게 나. 주인공 아니고 그냥 조연. 거기 얼마나 대선배님들이 나오는데요.”
지상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아이스커피를 쭉 빨아 마셨다. 겸손을 떨고 있지만 요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 세계적인 OTT 서비스 플랫폼의 자체 제작 드라마에 주조연급으로 출연이 확정되었다.
작가는 스릴러 장르물을 잘 쓴다고 소문난 이강옥 작가였고, 감독은 감각적인 장면과 독특한 구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주태준이었다. 넷피아에서도 전격 지원을 한다고 들었다.
같이 출연하는 출연진들은 또 어떻고. 이름만 들어도 헉 소리 나는 대형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을 한다. 지상은 그중 젊은 교수이지만 강인한 의지로 사건을 풀어가는 데 핵심이 되는 오윤상 역을 맡게 되었다.
“나는 자기가 이렇게 뜰 줄 알았다니까. 바람소리 첫 회 보는데 따악 감이 왔어.”
5회차까지 방영된 지금, 각종 커뮤니티는 ‘정원 선배’로 들끓고 있었다. 일전에 지상이 고생하며 찍었던 케이블 채널의 예능이며 단편 영화들도 다시 주목을 받았다.
“다 주변에서 잘 도와주신 덕분이죠. 일단 실장님이랑 상의도 해 보고요.”
“아 거기랑은 벌써 다 얘기가 됐지. 지상 씨가 어지간한 프로들은 고사한다고 해서 내가 직접 만나자 한 거고.”
하하. 지상은 다시 쑥스럽게 웃었다. 희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런저런 프로그램 섭외가 물밀듯 밀려들었지만 신중하게 골라 몇 개만 출연하는 중이었다.
너무 빠른 이미지 소비는 득이 될 게 없다는 게 지상의 생각이었고, 그 저변에는 이러다 뭐라도 터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깔려 있었다.
호스트 경력이야 눈속임하기 좋은 모델 에이전시 소속이었던 데다, 관련된 인물들도 내로라하는 사모님들이라 어지간해선 터지지 않을 테지만.
“자기는 지금 찍을 거리가 넘쳐. 아침에 일어나는 걸로 시작해서 광고 미팅, 촬영 현장 스케치에, 대본 연습에. 정원 선배의 평범한 일상도 좀 보여 주고.”
“네. 생각해 볼게요. 하하 아이고, 요즘 정말 정신없네요.”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연락을 하겠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눴다. 정희준이 먼저 스케줄이 있다며 카페를 나갔고, 지상은 매니저 성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아. 서유라만 아니면 할리우드 가는 건 시간 문젠데.”
중얼거린 지상은 남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쭉쭉 뻗어 나가는 만큼 불안감도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서문도의 손에 들어간 핸드폰이 유출되면 어떡하나.
무엇보다 사건을 전부 알고 있는 서유라가 가장 큰 불안의 이유였다. 기회를 봐서 헤어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건 서유라 성격에 가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처음부터 서유라랑 엮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의 한숨이 나왔다. 많고 많은 사모들 중에 젊고 예쁜 데다 심지어 재벌 2세이기까지 해서 봉 잡았다고 생각했더니 썩은 동아줄이었다.
서유라와의 염문설이 터지는 것도 걱정이었다.
서유라의 이미지는 바닥 중 바닥이었다. 조용히 남자나 밝히며 살았더라면 대중들이 누군지나 몰랐을 텐데, 셀럽을 자처하며 연예인보다 더 화려하게 하고 다니니 대한민국에서 서유라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선량하고 건강한 이미지의 정원 선배가 저런 여자와 연애 중이라고 하면 발칵 뒤집힐 거였다.
남자를 하나 붙여 줘? 하……. 어렵다, 어려워.
지상은 생각 끝에 핸드폰을 잡았다. 핸드폰은 잘 찾고 있는지 중간 점검도 한번 해 둬야지. 지상은 이선우의 번호를 누르고 메시지를 적었다.
그런데 정말 이 추세라면 할리우드 진출을 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네. 그땐 서유라고 뭐고 이 땅 떠 버리는 거야.
지상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