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묵밥집을 나서는 여자
정원을 건너는데 아침부터 햇살이 뜨거웠다.
“아무리 맛있어도 바깥 밥이 밥인가요. 간단하게 먹어도 집에서 먹어야 든든하고 그렇지.”
현관을 열고 들어와 다이닝룸으로 가는데 장 여사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이거는 약이다, 생각하고 드세요. 회장님 드실라구 주문한 거라 최고급이래요.”
테이블 위로 무언가 내려놓는 장 여사가 보였다. 선우는 고개를 숙여 문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전무님, 좋은 아침입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싱긋 웃었다. 선우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장 여사가 뒤를 돌아 있길 망정이지. 정말이지, 요즘 너무 아슬아슬했다.
선우는 눈 마주칠 틈을 주지 않고서 장 여사에게 인사를 했다.
“여사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우 씨도 잘 잤어?”
살가운 물음에 선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네.”
쟁반을 들고서 아일랜드 쪽으로 오고 있는 장 여사에게 웃어 주면서도 시선 한끝은 식탁에 앉은 서문도에게 쏠린다.
왜 이렇게 빤히 봐. 들키면 어쩌려구요.
선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문도가 피식 웃었다. 웃긴 왜 웃어요. 지금 웃을 일이 뭐가 있다고.
선우는 돌아서 거실로 나오며 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들킬까 봐 애타는 건 언제나 선우뿐이었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하고 싶은 건 기어이 하고 마는 서문도는 뻔뻔했고, 태연했고, 심지어 짓궂었다.
조심성이 없는 건지,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콘돔 때도 느꼈지만 서문도는 제멋대로 상황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들키면 곤란한 사람은 본인이 아니니까 그러는 거겠지.
이젠 절대 넘어가지 말아야지 생각하는데,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선우 씨는 잠깐 나 좀 보죠.”
“네?”
뒤를 돌아보니 말끔한 차림의 서문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쓱 스쳐 지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무심한 표정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되짚어 보게 하였다.
“선우 씨 뭐 잘못한 거 있어?”
쟁반을 정리하던 장 여사가 슬그머니 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막내 아가씨 일로 부르는 거겠지? 얼른 올라가 봐요.”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긴장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를 지나 살짝 열려 있는 중문 앞에 섰다.
“전무님, 이선우예요.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이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잘 닫은 뒤 뒤를 돌았더니 마스터룸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전무님?”
고개를 기울여 안쪽을 보다가 파우더룸을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 들킨 건가. 가슴이 졸아드는데 문도가 걸어오더니 선우를 당기는 동시에 달칵, 방문을 닫았다.
놀란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털썩 침대에 눕혀졌다. 무릎을 굽혀 자신의 위로 올라온 남자를 선우는 기막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왜 이러세요.”
참다못해 한숨을 쉬었더니 문도가 웃었다. 그리고 선우의 뺨을 쓱 쓸면서 말했다.
“왜 이러겠어요.”
내려오는 입술에서 민트향이 났다.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웃음 머금은 눈으로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속은 내가 바보지.
그 생각을 하는데 다시 입술이 내려온다. 장난처럼 선우의 입술을 깨물었고, 그러다 순식간에 깊이 들어오기도 했다. 기어이 숨결을 흐트러트려 놓은 문도가 입술을 뗐을 때, 선우는 한숨처럼 말했다.
“들키고 싶지 않아요.”
“안 들키게 하잖아.”
씩 웃는 눈동자가 얄미웠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선우의 몸도 일으켜 주었다. 옷매무새를 털어 주고 머리카락까지 귀 뒤로 넘겨준다.
“밤에 만나잖아요.”
정말 이러지 말았으면 했다. 들킬까 봐 무섭기도 하지만 익숙해질까 봐 무서워서.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짧은 입맞춤과 그 뒤를 잇는 장난스러운 미소는 단단하게 닫아 놓으려는 선우의 마음을 자꾸만 두드렸다.
“어제는 못 봤잖아.”
문도가 많이 늦은 데다 숙소동 거실에서 정원을 손보는 인부들이 잠을 자는 바람에 건너올 수가 없었다.
대신 통화를 조금 오래 했다. 잘 들어갔느냐는 말이 무얼 먹었냐는 말로 이어졌고,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로 이어졌다.
수화기 너머로 통화를 하다가 테라스로 나와 통화를 이어 갔다. 남자는 별채의 데크에서, 선우는 숙소방의 테라스에서 서로를 멀리서 보며 목소리를 들었다.
알고 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 이 남자는 꽤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잘리기 전에도 그랬었다.
거실에서 가만히 입을 맞추었고, 아무렇지 않게 다이닝룸에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 주었고, 다정히 머리를 넘겨주었다.
그걸 아는데도, 그래서 다시 속지 않으려고 마음을 꾹꾹 닫아 두려 하는데도, 이런 순간이면 마치 몰래 연애를 하는 연인이 된 것 같았고, 정말로 사랑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아니라고 매번 생각한다. 잊지 않는다. 이 남자의 마음이 가벼운 욕망에 불과한 것임을. 더하여 자신은 그런 남자를 속여야만 하는 처지인 것도.
속이되, 속아서는 안 되는 것.
욕망하게 만들되, 욕망해서는 안 되는 것.
선우에게 남자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이런 순간들이 힘들었다.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남자가, 서문도가 조금씩 진심이 되어 갈까 봐.
“이거.”
문도가 협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집어 선우에게 내밀었다. 언제 그런 열정에 휩싸였냐는 듯 다시 매끄러워진 모습으로.
“어제 주려 했는데 못 줘서 올라오라 했어요.”
문도가 내미는 쇼핑백 안의 상자에는 선우가 차고 있는 목걸이와 같은 모양의 팔찌가 들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문도는 상자 안의 팔찌를 들어 직접 선우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줄에 자그마한 리본이 붙어 있는 팔찌가 가는 손목에 동그랗게 걸렸다.
“예쁘네.”
선우의 손을 들어 올린 남자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장난스럽게 웃는 미소가 마음을 쿡 찌른다.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 사람에게 그런 미소를 보이는 건 반칙이야. 어쩌면 당신은 죄가 많은 남자였겠다. 선우는 속으로 생각하며 문도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잊지 말아야 해.
이 사람은 민우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너무 깊지 않게. 너무 얕지도 않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마음에 들어요.”
선우는 가볍게 문도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문도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 *
마지막 더위를 태우기라도 하는 듯한 오후였다.
사방에서 매미가 정신없이 울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명규진 실장은 카페의 문을 열었다. 소음이 일제히 멎으며 시원하고 쾌적한 바람이 가득한 공간이 나왔다.
“실장님, 여기입니다.”
키가 작은 중년의 남자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규진을 불렀다. 소문난 심부름센터의 한세호 탐정이었다.
“한 탐정님, 일찍 나오셨네요. 잘 지내셨어요?”
규진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공적으로 이용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하청 업체라면 하청 업체였는데, 규진은 세호에게 한 번도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저야, 뭐. 예, 잘 지냈습니다. 아이쿠. 커피 나왔나 봅니다. 얼른 가져올게요.”
세호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카운터로 향했다. 얼음이 가득 든 아이스커피에 빨대를 착착 꽂았다. 동작은 가벼운데 시선은 끌지 않았다. 몸집이 작은 중년의 남자는 아무 곳이나 잘 섞여 들었다.
전직 소매치기. 절도 전과 5범인 남자는 담당하는 형사와 엮이며 다른 식으로 본인의 재주를 펼치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심부름센터를 차려 은밀히 들어오는 의뢰를 받는다. 폭력적인 일도, 심하게 불법적인 일도 하지 않는다. 조용히 누군가를 따르며 기록을 할 따름이다.
“지난달 최상규 기록입니다.”
최상규.
예명으로는 최지상. 한세호가 건네는 노란색 파일 위에는 매직으로 7월, 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서유라가 병원에서 나와 이태원 저택으로 들어온 뒤로 서문도가 지시한 사항이었다.
최지상의 동선을 지켜볼 것. 서유라와 같이 있게 될 때는 즉각 즉각 알릴 것.
한세호는 서유라와 최지상이 만나는 날은 짧은 메시지로 명 실장에게 보고를 해 왔다. 나머지 잡다한 동선에 대해서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파일을 건넸다.
“주로 촬영장에 있었어요. 지금 찍는 드라마가 시간에 쫓겨서 그런지 대부분 문경에 있었는데.”
는데, 라는 말꼬리가 규진의 귀를 붙잡았다.
“그런데요?”
“이게 그분을 만난 건 아니라 즉시 보고는 안 드렸는데, 잠깐 서울에 올라와서 어떤 여자분을 만났습니다. 위치는 한남동 묵밥집인데, 시간은 얼마 안 되었구요.”
“흠.”
“이날입니다. 여기 사진이고요.”
수평이 맞지 않는 비뚤어진 사진 한 장이 규진의 눈에 들어왔다. 묵밥집을 나서는 여자의 얼굴을 규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7월 첫째 주 금요일이네요.”
“네.”
모자를 깊이 눌러쓴 최지상의 뒤로 이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연속된 사진이 아래에 붙어 있었다.
최지상이 먼저 가게를 나오고,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이선우가 나오고, 각자의 길을 가는 모습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거의 촬영장이랑 모텔에만 있어서 요즘 같아선 거의 공돈 버는 기분이에요.”
“더위 조심하시고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예, 예.”
남아서 커피를 마저 마시겠다는 남자를 뒤로하고 명 실장은 카페를 나섰다.
최지상과 이선우.
서유라의 심부름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겠다고 생각하면서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여전히 밖은 델 듯이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