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Midsummer(5)
입술을 떼자 푸, 하고 숨을 쉬는 이선우의 얼굴이 평소보다 많이 발그레했다. 눈에 웃음기도 고여 있는 것 같고 눈매가 조금 더 촉촉해진 것도 같았다.
“취했네.”
문도는 자신의 다리 위에 앉은 선우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 주는데 선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안 취했어요.”
취하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 입술을 문도가 가볍게 물고서 부드럽게 빨았다. 선우가 그의 목을 안으며 다리로 살짝 그를 조였다. 고개를 비틀어 거듭 입술을 물자 선우가 떨리는 숨을 쉬었다.
문도는 맥주맛이 나는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한 손으로 감싸 쥔 선우의 뺨에 발그레 열이 올라 있었다.
혀를 깊이 넣어 안쪽을 휘젓자 선우가 으응,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 작은 동작에도 아랫배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두피를 긁어내리자 척추에 찌르르 전기가 흘렀다.
“취한 거 맞는데?”
문도는 입술을 떼고 말했다. 이선우의 뒤로 TV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붉은 노을이 푸른 밤으로 변해 가는 순간, 문도는 여자가 요정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홀리는 요정.
“안 취했어요. 그냥.”
허벅지 위에 앉혀 놓은 여자가 붉은 얼굴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얼굴이 좀 빨개진 거고요. 심장도 조금 빨리 뛰는 거예요.”
문도는 피식 웃으며 선우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걸 취했다고 해요.”
“아니에요. 취하지 않았어요.”
선우는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안 취했는데, 라고 한 번 더 말했다. 원래 식구들이 전부 그랬다. 아빠도 술이 약했고, 엄마는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
얼굴부터 목까지 붉어지고 심장도 두근두근 온몸에서 뛰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이러다 몇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래요. 안 취했어.”
문도가 봐주겠다는 듯이 말하자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아니라는 듯 눈도 힘주어 뜨고 입술도 꼭 다물었는데, 그래 봤자 얼굴이 빨개서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재밌다는 듯이 웃으니 선우가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귀엽게 굴지 말아요.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그 말에 선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얼굴이 붉어진 이선우는 주머니에 쏙 담아서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고작 맥주 한 캔에 술 냄새 나는 한숨을 쉬는 것도 귀여웠다.
“원래 술 마시면 얼굴이 잘 붉어져요.”
“그럼 내 앞에서만 마셔요.”
이런 모습은 나만 보게. 문도는 말하며 고개를 내려 선우의 입술을 다시 베어 물었다. 이선우가 그의 입속으로 네, 하고 한숨 같은 대답을 흘려보냈다. 이럴 땐 왜 또 이렇게 고분고분해. 사람 미치게.
문도는 선우의 혀를 감아올리며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아랫배가 맞붙고 가슴도 맞붙는다.
같은 냄새, 같은 맛이 나는 살덩이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머리가 돌아 버릴 것처럼 좋아서 한숨이 나왔다. 이러니 내가 이틀을 못 참고 달려오지.
문도는 선우를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침대에 선우를 누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새삼스럽게 눈이 끓는다. 욕정이라고 불렀던 어떤 것과는 조금 다른 뜨거움이었다.
“왜 이렇게 예뻐?”
너무 예뻐서 자꾸 잊어버려. 쉽게 마음을 보여 주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너무 빨리 무너지지 않기로 다짐한 것도 자꾸 잊어.
이미 붉어졌던 선우의 얼굴에 다시금 열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눈 둘 곳을 몰라 방황하는 선우의 턱을 잡아서 제게로 고정시켰다.
“취하셨나 봐요.”
선우가 그를 보며 말했다.
“내가?”
문도는 웃었다. 말술을 마셔도 혼자 멀쩡한 게 자신이었다. 그러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선우에게 취해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거라고.
“네.”
선우가 대답했다. 조명처럼 비추는 TV의 불빛에 여자의 얼굴이 색색으로 변했다. 어쩌다 굴러 들어온 트레이너한테 빠져선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게 됐을까.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런가 보네.”
문도는 대답하며 선우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취해서 이선우가 너무 예뻐.”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예쁘단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눈이 달렸으니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인식하긴 했지만, 문도의 눈에 그건 비례가 잘 맞는 조형물 같은 거였다.
눈이 아리도록 예뻐서 움켜쥐고 싶은 존재는 처음이었다.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갖고 있는데도 갖고 싶고, 입을 맞추고 있는데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말해요.”
문도는 선우의 얼굴을 눈으로 쓸면서 말했다. 선우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동자와 마주 닿을 때면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좋아해요.”
등줄기가 저릿거렸다. 문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몇 번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말이었고, 듣고 있는데도 부족한 말이었다.
“한 번 더.”
문도가 고개를 내리며 말하자 선우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으며 말했다.
“좋아해요. 전무님.”
심장이 녹는 말이었다. 문도는 여자의 입술을 다시 베어 물었다.
* * *
선우는 부스스 눈을 떴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며칠 못 올 거예요. 제주도로 출장을 가서.’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남자는 셔츠를 입으며 누워 있는 선우에게 말했다. 일어나 배웅을 하려고 하니 거울로 선우를 보며 말했다.
‘나올 필요는 없고. 푹 쉬어요.’
가볍게 미소를 지은 남자가 떠난 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시간은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선우는 누운 채로 TV를 틀었다.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공연을 보여 주는 아트 TV에서 채널을 멈추었다.
국립발레단의 지젤이 상영되고 있었다. 2막이 시작되는 파드되를 보다가 선우는 채널을 돌렸다.
아까 잠깐 보았던 영화 채널을 틀고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이 보였다.
‘아쉽지 않아? 나 같으면 미련 많이 남을 것 같은데. 그냥 재활받고 발레 계속하는 건 어때?’
흘러가는 화면을 보며 선배 은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평생 해 온 일이었고, 그것 말고는 따로 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까.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를 따라 학원에 갔다가 한눈에 반해서 엄마에게 발레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했었다.
하고 싶은 일은 해 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엄마가 흔쾌히 보내 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돈이 정말 많이 들었다. 아빠의 사업이 피기 전에는 낡은 토슈즈를 몇 번이나 고쳐서 신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일이었지만 그만두게 되었을 때 생각만큼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아쉽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민우의 보호자가 된 것. 그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주어진 상황이었으니까.
상황이 바뀌었으니 바뀐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선우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기꺼운 마음으로 학원을 선택했었다.
‘누나, 괜찮아?’
민우가 물었을 때도 담담한 마음으로 대답을 했었다.
‘응. 괜찮아.’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걸.
선우는 남자가 떠난 자리를 눈으로 더듬으며 생각했다. 서문도는 그녀를 뜨겁게 안고 난 뒤에 차분히 옷을 입었다.
다정한 미소로 더 자라 말을 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서 별채로 돌아가곤 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밤을 지새고 가는 일은 없었다.
그건 다행인 일이면서 한편으로 허무한 일이었다.
남자가 떠난 뒤의 집은 관객이 모두 떠난 무대 같았고, 선우는 혼자서 쓸쓸히 무대에 남은 배우가 된 것 같아서.
민우야.
무릎을 끌어안고서 민우의 이름을 소리 내지 않고 불러 보았다. 상자 하나 속에 들어 있는 민우의 삶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길이었다.
누나는 괜찮지 않아.
선우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한 번씩 그만두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아무리 목표만 생각하고 버텨 보자 생각을 해도, 한 번씩은 모든 걸 멈추고 그냥 편히 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지 못하는 건…….
사랑했던 동생의 마지막 순간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엄마와 아빠, 민우까지 잃어버린 삶은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허공으로 발을 딛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선우의 발목을 붙든 건 가려진 진실이었다.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일.
선우는 지금의 시간들을 그렇게 생각했다. 민우의 핸드폰을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
그렇지만 외롭고 외로운 일.
“생각은 그만.”
눈을 꾹 감은 선우는 소리 내서 말했다. 반짝 눈을 뜬 뒤 시트를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TV는 끄고 불을 켰다.
밤이라서 그런 거였다. 잠시나마 온기를 주었던 남자가 떠난 후라서. 별채로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느라 지쳐서 괜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뿐이었다.
찬물이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릴 겸 선우는 냉장고를 열었다. 서문도가 사 온 수박이 보였다. 선우는 붉은 속살을 드러낸 수박을 바라보다 두 손으로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숟가락을 꺼내고 설탕도 꺼냈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해 줬듯이 수저로 수박을 몇 스푼 떠 놓고 그 위로 설탕을 솔솔 뿌렸다. 붉은색의 수박즙이 수박살 아래로 고이며 설탕을 품는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별채로 들어가게 되면 민우의 핸드폰을 찾을 테니까. 그럼 이모가 있는 세종으로 내려가서 작은 학원을 차릴 거니까.
환한 햇살이 잘 들어오는 연습실에 보고만 있어도 귀여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앙 바 자세부터 가르쳐 줘야지. 예쁜 토슈즈도 선물해 주고, 가방도 만들어서 나눠 줘야지.
그때는 조금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숟가락을 들었다. 설탕을 품은 수박이 달콤하고 시원해서 견딜 수 있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