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Midsummer(4)
저녁은 대학가 앞의 파스타집에서 먹기로 했다. 민우와 한 번씩 기분을 낼 때 가던 곳이었는데 매콤한 해물 파스타가 맛있는 곳이었다.
“어떠세요?”
선우는 파스타를 한입 먹은 문도에게 물어보았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되었다.
매번 솜씨 좋은 장 여사님이나 조리사 아주머니가 차려 주는 정갈한 음식을 먹던 사람이니 평범한 대학가 식당의 음식이 성에 차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솔직하게 말해요?”
그냥 예의상 맛있다고 하는 게 보통 아닌가. 하긴 예의 같은 거 별로 안 차리는 사람이었지. 왜 이런 것까지 사람을 긴장시키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우는 대답을 했다.
“네.”
살짝 긴장한 것 같은 선우의 표정에 문도는 웃음이 나왔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평범한 대학생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게 꾸며 놓은 실내와 적당한 가격, 그럭저럭 괜찮은 맛을 가진 곳이라는 게 솔직한 평이지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맛있어요.”
선우가 살짝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대체 뭘 얼마나 고급지게 먹고 산다고 생각을 하기에 파스타 한 접시에 긴장을 하는 건지.
“라면보다 나으면 됐지, 뭘.”
심드렁한 문도의 말에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불어서 국물이 졸아들었던 라면이 생각나는 순간, 긴장이 풀어지며 나와 버린 웃음이었다.
맥없이 웃는 선우를 문도도 피식 웃으며 보았다. 이선우가 저렇게 웃을 때가 좋았다.
어색해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 어색함이 풀어져 한 번씩 진짜 이선우의 모습이 보일 때는 마음이 뻐근하게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맛있으니까 걱정 말고 먹어요.”
“네.”
그 뒤로 별다른 말 없이 식사를 했다. 그러다 너무 조용한 것 같아 선우는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내일도 출근하세요?”
“그러지 싶어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니 다시 정적이었다. 평소엔 무슨 말을 했더라. 매번 잠자리를 하거나 서유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전부라서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아, 서유라가 있었지. 화젯거리를 찾은 선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라 씨는 평창 별장에서 지내는 게 힘든가 봐요.”
문도가 눈을 들어 선우를 보았다.
“산모기도 많고, 같이 놀 사람도 없대요. 매일 산책도 같이 나가야 한대요.”
평소라면 내가 왜 서유라 이야기를 들어야 하냐고 했겠지만, 문도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서유라 이야기를 하는 이선우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 번씩 짓는 눈웃음이 예뻤고, 잔잔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다음 말을 이어 갈 때는 살짝 웃었는데, 그때마다 조명을 반사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래서 서울에 빨리 오고 싶다고요.”
말을 마친 선우가 다시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물잔을 쥐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포크를 잡는다. 문도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선우에게 말했다.
“노력 많이 하네.”
평소 그다지 말이 없는 걸 안다. 필요한 말을 할 때를 제외하곤 이선우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런 거 같아요. 어제는 휠체어도 밀었대요.”
“서유라 말고 이선우 말이에요.”
문도의 말에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력하는 건 좋은데 너무 애쓰지는 말아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선우가 문도를 보았다. 헷갈릴 수 있는 말이라는 건 알았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는 말이니.
이선우가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건 안다. 편하게 생각할 여지를 별로 주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문도는 이런 스스로가 좀 우습다는 생각도 했다.
자신에게 좀 더 매달리기를 바라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길 원하다니.
그러니까 다시 요약하자면.
서유라의 트레이너를 원하는 게 아니다. 말 잘 듣는 직원처럼 고분고분하길 원하지 않는다. 이선우가 자신을 조금 더 보여 주기를, 스스럼없이 웃기를, 너무 낮추지 않기를 바랐다.
“날 좀 더 편하게 생각하라는 뜻이에요.”
선우가 살짝 미간을 모았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죠? 라고 묻는 것 같아 문도는 피식 웃고 말았다.
* * *
저녁을 다 먹고 나오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도는 잠깐 차를 세워 놓고 상가의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샀다.
매대에 반 통짜리 수박이 보이길래 그것도 사고, 계산을 하려는데 냉동고에 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이 보여 바닐라맛과 초코맛 두 통을 샀다. 비닐봉지를 뒷좌석에 두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선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뭘 그렇게 사셨어요?”
잠깐 맥주 한 캔 사 오겠다고 했던 남자를 바라보며 선우가 물었다.
“그냥, 먹고 싶어서.”
비어 있었던 냉장고가 생각나서 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놀이터 옆에 주차를 하고 함께 집으로 올라와 식탁 위에 봉투를 내려놓는데 선우가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힘드셨죠.”
수박 반 통에 맥주 한 번들, 아이스크림 두 통이 힘들 건 아니지 않냐는 물음 대신 피식 웃었더니 선우가 다시 말했다.
“수박은 들고 올라올 엄두가 안 나서 못 샀거든요.”
담담히 말하는 걸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왜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전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그마한 집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하지만 단출한 집은 묘하게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고요하고 외롭다. 이선우를 볼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럼 몇 통 더 사다 놓을까요?”
문도는 가볍게 말했다.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이것도 많아요. 다 먹지도 못하고요.”
“먹고 싶어지면 말해요. 별로 힘든 일 아니니까.”
선우는 맥주를 꺼내 냉동실에 넣는 남자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렵고 힘들기만 한 남자는 한 번씩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선우의 마음을 툭 건드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네. 그럴게요.”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피식 웃는 문도를 보며 선우는 어쩌면 이게 문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어렵고 힘들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한 번씩 마음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순간들이 있어서.
“씻고 나올 테니 쉬고 있어요.”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려던 문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선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금방 떨어졌는데 따뜻함은 오래도록 남는다. 선우는 가만히 이마를 쓸어 보았다.
* * *
씻고 나온 문도가 냉동실을 열어 맥주 두 캔을 꺼내 침대로 왔다. 벽에 기댄 채 침대에 앉아 TV에서 해 주는 영화를 보고 있던 선우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있어요.”
문도가 침대로 올라오며 말했다. 슈퍼 싱글 사이즈의 침대는 남자가 올라와 앉으니 소파처럼 보였다.
“영화 보고 있었어요.”
고개를 끄덕인 문도가 달칵 맥주 캔을 땄다. 하나는 선우에게 건네고 하나를 다시 따 입에 대고 마셨다. 에어컨을 틀어 놓아 서늘해진 방에 꿀꺽꿀꺽 맥주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선우도 가만히 맥주를 마셨다.
술이 약한 편이기도 하고, 얼굴이 금방 붉어져서 꼭 마셔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잘 마시지 않는 편이었는데, 차가워진 맥주가 식도를 넘어가니 몸 전체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시원해요.”
“그 맛에 먹는 거죠.”
대답을 하는 서문도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흩어져 있었다. 정갈하게 넘겼을 땐 빈틈 없이 매끈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모습은 싱그러운 소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난 문도가 불을 껐다. 밝은 형광등 불빛이 사라지자 어둠에 밀려나는 붉은 노을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어둑한 방 안에는 TV 불빛만이 조명처럼 켜져 있었다.
화면 안에서는 진주 목걸이를 찬 여자가 부지런히 요리를 했다. 레시피를 적고, 다시 오븐에 무언가를 넣는 모습이 나왔다.
“제목이?”
“‘줄리 앤 줄리아’래요.”
문도의 물음에 선우가 답했다.
“영화 좋아해요?”
“가끔 봤어요. 자주는 못 봤어요. 레슨받고 연습하느라고요.”
문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재밌어요?”
“이제 틀어 놓은 거라서요. 저 줄리라는 여자가요, 줄리아라는 유명한 쉐프의 레시피북에 있는 요리를 전부 다 해 보는 걸 도전하기로 했어요.”
얘기를 하는 선우를 보다 문도는 고개를 내렸다. 가볍게 입술을 훔치는데 이선우의 눈꺼풀이 깜빡이는 게 느껴졌다. 문도는 입술을 떼면서 말했다.
“재밌겠네.”
얼굴이 조금 붉어진 이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는 자세를 바로 하고 남은 맥주를 마시며 화면을 보았다.
선우도 맥주를 홀짝이며 화면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데, 느슨하게 벽에 기대앉아 맥주를 마시는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시야에 걸렸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노을이 지는 여름밤.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 이 순간이 마치, 평범한 연인들의 주말 데이트 같아서.
“전무님.”
선우는 맥주를 내려놓으며 문도를 불렀다. 이런 말랑한 시간들은 길지 않았으면 한다. 남자가 있는 풍경에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더는 흔들려서는 안 되었기에.
선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는 문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함께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지만 결국은 이걸 위해 온 거니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서문도의 입술 위로 선우는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만히 입술만 포갰는데도 쌉싸름한 맥주맛이 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맥주 마시더니.”
입술을 떼자 문도가 말했다.
“용감해졌네.”
짙어지는 남자의 눈빛을 보는데 얼굴로 열이 몰렸다. 선우는 맥주를 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한 캔을 다 마셨으니 곧 붉어지기도 할 터였다.
“조금 더 해 봐요.”
문도가 선우의 허리를 잡아 제 위로 앉히며 말했다. 선우는 고개를 내려 남자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벌써부터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