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Midsummer(3)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 두어야 할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오후가 되도록 문을 닫고 있었더니 갑갑해지는 것 같아, 선우는 잠깐 에어컨을 끄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널어 두었던 빨래가 바짝 말라 있기에 하나씩 걷는데 밥솥에서 삐-삐- 취사가 다 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선우는 마른빨래를 침대에 놓고 주방으로 건너왔다. 밥솥을 열고 주걱으로 밥을 뒤적이는데 이 집에서 처음 밥을 해 먹었을 때가 생각났다.
‘민우야, 밥은 다 되면 한 번 뒤적여 줘야 해. 알았지? 안 그럼 떡지거든?’
발레단을 그만두고서 지젤 발레학원에 막 취업을 했을 때였다. 취사 버튼을 눌러 놓고 출근을 하면서 말했더니, 막 대학교 2학년이 되었던 민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었다.
‘누나보다 내가 더 잘 알거든? 행주는 펴서 널고, 국은 한 번 끓여 놓고. 아 참, 누나. 멸치볶음 좀 냉장고에 넣지 마. 딱딱해진다구. 일부러 빼놓은 건데 왜 자꾸 넣어?’
하얀 쌀밥을 뒤적이다가 선우는 피식 웃었다. 그랬었다. 엄마를 도와서 살림을 곧잘 배웠던 것도, 김치볶음밥이니 떡볶이 같은 걸 만들어 먹었던 것도 민우였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누나나 잘 챙겨 먹어. 누나가 할 줄 아는 건 발레밖에 없잖아? 갈 때 운전 조심하고, 출구 놓치면 그냥 직진으로 가서 유턴을 해. 알았지?’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는데, 잔소리 많은 오빠처럼 굴었던 것이 생각난다.
밥을 잘 뒤적여 놓은 선우는 방으로 돌아와 TV를 틀었다.
침대에 앉아 아까 놓아두었던 빨래를 끌어왔다. TV에서는 뉴스를 하고 있었다. 열대야니 여름 휴가니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빨래를 개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여름의 오후는 느리게 흘렀다.
다 불은 라면을 먹고 간 서문도는 그 뒤로도 두 번 더 왔었다. 늦은 밤에 벨을 누르고 들어와 선우를 안았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밥을 먹고, 빨래를 하고, 책을 읽었다. 남자를 대접하기 위한 과일을 사다 놓는 정도가 선우가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밤이 내려오면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은 가겠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어느 연락에도 선우의 답은 같았다.
보고 싶어요. 기다릴게요.
이틀 걸러 한 번 정도 서문도가 벨을 눌렀다.
남자가 벨을 누르면,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을 했다. 당연하다는 듯 내려오는 입술을 받으며 목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남자의 아래에서 좋아한다고 속삭이고, 남자의 눈동자를 오래도록 마주 보았다. 남자가 느슨하게 풀어진 미소를 보이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별채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선우는 쓴웃음을 웃었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참 무섭긴 한가 보다.
처음엔 그저 서문도가 돌아봐 주기만 해도 좋겠고, 그걸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더니, 막상 돌아와 관계를 맺는 날이 이어지자 언제 별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만 기다리게 된다.
일단은 그거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다시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서문도 전무에게 잘 보이는 게 지금으로써는 최선이니까.
마지막 수건을 개는데 식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발신인은 서문도였다.
“네, 전무님.”
선우는 목소리를 밝게 하고 전화를 받았다.
— 뭐 하고 있어요?
“빨래 개고 있었어요.”
선우의 말에 문도가 가볍게 웃었다. 주말인 오늘도 출근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하다 전화를 걸었겠지, 짐작하면서도 선우는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전무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 일.
간단한 대답에서 짜증이 조금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주말인데 일하시려면 힘드시겠어요.”
의례적인 말까지 덧붙이니 수화기 너머의 서문도가 가볍게 웃었다.
— 일은 다 했고, 이제 퇴근하려는데.
선우는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 어떻게 할까요.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너 하기에 달렸다는 듯이.
선우는 개고 있던 수건을 꾹 눌렀다. 이럴 때면 조금 막막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 달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나를 쫓아내지 않을까. 다시 시작한 이 관계는 전보다 조금 더 어려워졌다.
“괜찮으시면……. 저녁 같이 드실래요?”
— 안 괜찮으면요?
안 괜찮으면 처음부터 어떻게 하겠냐고 묻지를 말았어야지. 선우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다시 돌아왔어도 서문도는 여전히 어렵고, 여전히 힘들었다.
남자는 밤마다 말했다. 더 매달리고 더 좋아하라고.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선우를 향한 욕망이 남아 있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잘라 버렸던 서문도였다. 거꾸로 말하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는 남자를 붙잡아 두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돈 때문에 접근한 여자의 연기를 했을 땐 무턱대고 비싼 물건을 사면 됐었는데, 좋아한다는 애절한 고백으로 붙잡은 지금은 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것도 사랑의 마음을.
차라리 밤에는 흉내라도 낼 수 있었는데, 이렇게 평상시 대화를 할 때면 뭐라 해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많았다.
좋아하는 남자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답을 할까. 어떡하긴. 오기 싫으면 오지 말라고 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많이 바쁘세요?”
무턱대고 와 달라고 조를 수도 없어서 물어보았더니 서문도가 아니, 라고 답했다.
— 바쁘진 않아.
어쩌라는 거야.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왠지 수화기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바쁘지도 않고, 퇴근도 하시는데, 저녁 먹는 건 안 괜찮으신 거면.”
그럼 그냥 오지 말고 쉬어요. 그 말이 목 끝까지 차는데 꾹 씹어 삼키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답을 모르겠을 땐 질문하는 것도 방법이니까. 선우의 말에 문도가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뭘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면 뵐 수 있을까요?”
— 날 왜 보려 하는데.
“그야 당연히.”
선우는 턱에 핸드폰을 끼고 수건을 들었다. 욕실로 향하며 기계적으로 대답을 했다.
“보고 싶으니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요. 지금 출발할 테니까.
“네. 조심히 오세요.”
— 이럴 땐 조심히 말고, 빨리 오라고 하는 거예요.
남자의 말에 선우는 김빠진 웃음을 웃었다. 아니야. 빨리 안 와도 돼요. 그 생각을 하며 남자에게 답했다.
“늦어도 좋으니까 조심해서 오세요. 기다릴게요.”
그래요. 문도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전화를 끊었다.
* * *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이선우가 계단을 내려왔다. 문도는 차창을 내렸다. 선우가 문도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문도의 인사에 선우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벨트를 하고는 잠시 앞을 본다. 이 분위기가 어색하기라도 한 듯, 작게 숨을 쉬었다.
“어색해요?”
물어보니 고개를 돌려서 문도를 본다. 입술을 맞다물며 웃더니 작게 말했다.
“네. 아직은 조금 어색하긴 해요.”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매가 예뻤다.
언젠가 서유라에게만 저렇게 웃어 주어서 속이 뒤틀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에게도 웃어 주지 말고 내게만 웃어 주라고 하면 미친놈 보듯이 보려나.
문득 사진으로 찍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때나 꺼내 볼 수 있게.
“뭐가 그렇게 어색해. 그렇게 많이 했는데.”
문도의 말에 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눈동자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선우를 빤히 보았다.
“제가 식당을, 찾아봤어요.”
핸드폰을 꺼내며 화제를 돌리는 여자의 턱을 가볍게 쥐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깜빡깜빡 두 번 정도 눈을 감았다 뜨는 이선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을 맞추자 여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기는. 문도는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입술을 뗐다. 선우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문도를 보았다.
“인사.”
문도의 말에 선우가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끝까지 내려가 있는 차창 덕분에 누가 봤을 수도 있긴 했다.
“좀 더 길게 할걸 그랬나.”
선우를 보면서 말하자, 선우가 뻐끔 입을 벌렸다.
“네?”
“아쉬우면 언제든지 말해요.”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하니 선우가 아니요, 라며 고개까지 저었다.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거 알아요?”
뭐를요, 하고 묻는 것 같은 눈동자를 보면서 문도는 싱긋 웃었다.
“나는 하지 말라면 더 해.”
문도는 손을 뻗어 선우의 뺨을 쥐었다. 절반 이상 몸을 기울여 선우의 입술을 찾았다. 기분 좋게 서늘한 여자의 입술을 빨고 씹었다. 열린 창문을 의식한 선우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져서 조금 웃었다.
“더 할까?”
입술만 살짝 떼고서 묻자 선우가 대답을 못 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할 것 같고, 그렇다고 더 하라고 하면 진짜 더 할 것 같고.
여자의 생각이 읽혀서 문도는 웃었다. 몸을 떼어 자리로 돌아오며 물었다.
“식당 찾아봤다고 했죠?”
“잠시만요. 어디냐면요.”
선우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장해 둔 페이지를 여는 선우에게 문도는 문득 물었다.
“싫었어요?”
“네?”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이 선우가 고개를 돌려 문도를 보았다.
“키스한 거.”
“아…….”
선우가 당황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지? 표정에 너무 정직하게 쓰여 있어서 문도는 웃음을 삼켰다.
“싫었나 본데?”
“아, 아니에요. 좋아, 좋았어요.”
말을 해 놓고 다시 얼굴을 확 붉히는 선우가 예뻤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이선우는 그냥 다 예뻤다.
그래서 일부러 못되게 구는 것도 있었다. 아무리 자발적 호구가 되기로 결심했다지만 너무 빠르게 무너지는 건 아닌가 싶어서.
아직은 네가 나를 더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심호흡을 하고 조절을 하는데도 참아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오늘처럼 문득 달려오고 싶을 때가 있었고, 아무 때나 전화를 걸고 싶을 때가 있었다.
흠, 하고 쳐다보자 선우가 더듬더듬 부연 설명을 한다.
“아까는 창문이 열려 있는데 그러시니까 신경이 쓰여서.”
“그러시는 게 뭔데요.”
“그……. 키스……를……. 한 거요.”
물어본다고 또 대답을 해요. 창피해하면서 대답하는 선우를 보며 문도는 차창을 올렸다. 눈을 드는 선우에게로 다시 몸을 기울였다.
이제 아무도 보지 못할 테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더 오래. 더 많이.
달큰한 선우의 입술을 욕심껏 머금었다. 벌리라 하면 벌어지고 혀를 달라 하면 혀를 내주는 여자의 입술을 물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공기 방울처럼 터져 나오는 선우의 신음 소리조차 예쁘다고 생각을 하면서, 문도는 선우의 뺨을 감싸 쥐었다.